♣복음말씀의 향기♣ No3262
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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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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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련은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책 가운데, 참으로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는 우리를 무죄한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도 욥이 온몸으로 겪었던 무죄한 의인들의 고통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 숱한 죄를 짓고 과오를 범하고도, 저리도 건강하게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사는데, 무죄한 이들, 평생토록 신앙 안에서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채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 청춘의 나이에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그를 잃고 슬피 우는 부모, 아직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린아이의 불치병, 평생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일만 해온 의인의 요절….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합니다.
평생토록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악을 멀리해온 욥 역시, 어느 날 갑작스러운 큰 시련과 마주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가축과 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같은 아들과 딸들도 데려가십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까지 심한 부스럼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느님이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차라리 주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조롱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기 2장 10절)
욥이 자신에게 닥쳐온 큰 시련 앞에 처음에는 그리도 당당했지만, 점점 증폭되는 고통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런 독백을 남겼습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욥기 3장 3절)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기 3장 11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 앞에 욥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체험 사이에서 긴 내적 갈등을 거듭합니다. 위로하러 찾아온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위로보다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도 느낍니다.
동시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세밀하게 스캔하면서 혹시라도 주님의 뜻을 거슬렀던 요소가 있었는지 성찰합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우여곡절, 성공과 실패, 병고와 죽음에 관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름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꿈꿉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지속되는 상승 곡선, 이 세상에서의 거듭되는 성공, 고통과 시련 없는 평화로운 인생. 그러나 근본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존재들에게 시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 안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불행한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의 단계 안에 화사한 꽃봉오리 같은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해야겠습니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초대,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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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원한다면 절실하게 원하라>
어제 어떤 분의 소개로 유튜브에서 그리스도인 연애 코칭강사로 알려진 김지윤 소장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는 예들을 들어가며 재치 있는 말솜씨를 곁들여 강의함으로써 노총각, 노처녀뿐만 아니라 누가 들어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작고 통통한 몸매에 평범한 얼굴을 한 김지윤 소장은 지금은 결혼하여 아이까지 가지고 있지만, 20대에는 교회 활동을 하며 29살까지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사귀어보자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신앙만으로 충만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노처녀가 되면서 주위에서 “너는 눈이 너무 높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지 자신은 결코 눈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가 결혼하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절실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방 구들장이 파일 때까지 기도해 봤어?”
사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또 눈도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눈도 높았고 기도를 해도 구들장이 파이도록 절실히 원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고 합니다.
방 구들장이 파이도록 절실히 기도하며, ‘나는 눈이 높을 처지가 아니다.’라고 되뇌며, 조건은 아무래도 괜찮고 그저 남자면 되니 빨리 짝을 만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적 동네 친구를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에게 적극 유혹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먼저 그 사람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옷을 잘 입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가지고 있는 옷을 다 버리고 지금까지는 입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몇 벌 사서 입고 그 남자의 주위를 서성였고, 결국에는 그 남자가 이 여자에게 반하여 사귀자는 소리를 꺼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뜸 들이지 않고 바로 “그래!”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처음 사귀게 된 남자와 결혼해서 지금도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귀면서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잘 살면서 또 결혼을 장려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처음 사귀어 본 남자와 성공한 결혼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절실히 원했던 결혼이었기에, 그만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뭐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하고, 아니면 ... 아닌 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했다면, 결혼을 해서도 많은 어려움이 닥치면 ‘이 남자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결단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어떤 것을 원하든 원한다면 ‘절실히’ 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이 원하기는 하지만 아주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보십니다. 조금만 힘들면 포기할 듯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이런 고생을 감수할 결심을 먼저 가지라고 청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 동네에서는 못된 아들로 낙인이 찍힐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세상의 평판도 중요시해서 80% 정도만 따르겠고 20%는 세상의 평판도 중요시하겠다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 행위는 죽은 사람들의 행위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절체절명의 선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아직 가족의 정을 끊지 못해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청합니다. 세상의 애정 때문에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며 인간적인 애정에 미련을 두어서도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어느 정도만 따르지 말고 온 의지와 생명을 바쳐서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따르는 길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애착들이 결국 끝까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장애로 차후에 더 크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롯의 아내가 소돔을 탈출하다가 도시가 유황불에 재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서 더는 롯을 따를 수 없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 길을 떠났으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을 마음으로 떠나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은 그만큼 절실히 주님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세상에 포기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일단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가기 위해서라도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결심하고 앞만 보며 나아갑시다.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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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고려시대 학자인 길재(吉再: 1353∼1419) 이런 시조를 남겼습니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원천석도 비슷한 시조를 남겼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두 시조의 공통점은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국가도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비슷한 감정을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느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정성을 기울여서 세웠던 교회는 이제는 돌무더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던 성 소피아 성당의 성화는 회칠로 덮여 있었습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성 소피아 성당은 이제 이슬람교도들의 회당이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욥기도 비슷한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헛되고 헛될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사목하던 선배 사제가 시를 한 편 보내왔습니다. “상실이 잉태한 것은 다 잃어버릴 수 없어서 남은 것을 헤아려 본다. 일생을 헌신한 하늘 뜻 하나 붙든 삶의 끝에 Natus* Ingressus* Obiit* 새긴 묘비 베고 누운 그대 숫자들 사이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이름자 넘쳐 새 Cemetery로 모여든 사명 마친 이들 수도원은 비워지고 묘지는 넘친다. 슬픔 과해서 은퇴했노라는 파킨슨스 노 사제 간혹 정지된 생각 속에 길 잃어버린 회로 망각 속에는 영혼구령이라는 구호 하나 남았을 것이다. 애썼던 옛 시간에게 묻는다. 그 열정의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문 닫은 수도원, 비워져 가는 성당, 임종 앞둔 사제들 우리의 수고는 불신의 세대를 낳아 공허한 메아리 차지한 빈 성전을 물려주고 있다. 그래 기쁜 소식은 빈 무덤에서 시작했었지 대답 없는 답변 내일의 그대에게 양도해버린 봉인된 입”(*Natus, *Ingressus, *Obiit 은 태어난 해, 입회한 해, 입적한 해의 라틴어 표기로 수도자들 묘비에 기록된 세 가지이다. 족적 남기신 분들이나 무명의 수도자들 차별 없이 받는 세 가지 숫자이다.) 묘지에 묻힌 형제들은 늘어가고 있는데, 수도원은 비워가고 있음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죽비’와 같습니다. 무상한 인생이라도,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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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 말한다.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 하신다. 이 말씀은 그를 바로 잡아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하여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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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1)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이 말씀의 뜻은, “나를 따르는 길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얻어 누리는 길과는 반대쪽에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다 보면, 나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게 될 때도 있다. 너는 그런 생활도 감수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따름’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목적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사람이 되려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처지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또는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힘든 시기도 만나고, 편안한 시기도 만납니다.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밤도 있고 낮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만날 때도 있고, 안 만날 때도 있습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가 되는 상황을 만날 때도 있고, 그 반대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되든지, 무엇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리지 않고 목적지만 바라보면서 꾸준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힘든 오르막길은 피하고 쉬운 길만 찾는다면, 즉 어렵고 힘들 때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절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하나이니 우리가 걸어야 할 길도 하나뿐입니다.
<쉽고 편안할 때에는 방심하지 않도록, 또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는 좌절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사실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내가 정말로 힘들어서 주저앉으려고 할 때,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나를 부축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만 하시고, 우리에게는 신경도 안 쓰고 당신 혼자서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또는 우리 뒤에서, 어떻게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가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도 역시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를 만나더라도, 그 십자가도 역시 주님과 함께 지는 십자가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이 말씀은, 장례식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장례식을 하되 신앙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나서 그 슬픔과 고통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생활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별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커서 그런 것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우리는 그 슬픔과 고통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의 장사’라는 말은, 세속의 허무한 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라는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죽은 이’가 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은 ‘허무’를 버리고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이’입니다. <우리 교회의 장례미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는 죽은 예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 지내는 살아 있는 예식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지내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장례미사는 ‘허무한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 인생의 시작’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 일을 실행할 의지도 없고, 계획도 없는 사람입니다. 막연하게 주님을 따르기를 희망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가족들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만 하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하고, 지금은 가족들 곁으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작별 인사는 핑계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뒤를 돌아보느라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작별인사가 잘못은 아니고,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잘못은, 하느님 나라를 맨 뒤로 밀어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입니다. (참 신앙인은, 가족과 함께 주님을 따르고, 가족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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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을 따르려면>
1)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하고,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고(마태오복음 16장 26절),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열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루카 복음 13장 25절) 가장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으면, 한눈팔지 말고, 딴생각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도 있고, 세속이 유혹할 때도 있고, 자기 안에서 유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그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사탄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사탄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마르코복음 9장 29절)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세속의 유혹이나 자기 안에서 생긴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3)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루카복음 14장 28절-30절) 이 말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 하고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심판이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힘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 보호와 도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 도움을 받아서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힘들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소연하면 우리를 업고서라도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복음 15장 4절-5절)>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복음 9장 57절-58절)”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온갖 고난과 시련, 사람들의 냉대와 배척을 참고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걸어가는 길은 ‘꽃길’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줄곧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험한 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길 끝에서 부활, 생명, 승리,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얻어 누리는 행복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시련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크고 강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복음 9장 59절-60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은, 집에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마라.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그 제자는 아마도 장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아니라, 사소하고 세부적인 절차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는 말씀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잊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일을 걱정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라는 십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선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분입니다. (마르코복음 7장 9절-13절) 효도는 살아있는 부모에게도 해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일로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 충격과 슬픔은 비난받을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장례식의 세부 절차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거나갈등을 겪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런 일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복음 9장 61절-62절)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속 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마음이 그다지 간절하지도 않고, 또 그 마음이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세속 일을 ‘먼저’ 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그 마음은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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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려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마다(루카 9,57.59.61 참조) ‘주님을 추종하여 따름’을 표현하는 특별한 그리스어 동사 ‘아콜루테오’(따르다)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앞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마태오가 그분을 따라나선 대목에서도 사용됩니다.(루카 5,11.27.28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 사람의 어정쩡한 태도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의 모습과 병행시켜 대조적으로 드러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이는 마땅한 거처도 없이 공생활 내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님과 일행의 삶을 알지 못한 채 드린 공허한 다짐일 뿐입니다. 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각각 아버지의 장례와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를 더 우선시합니다. 물론 유다인들에게 장례는 자식의 마땅한 도리고(토빗 4,3-4; 14,11-13 참조)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 또한 인지상정이지만, 그 어떤 관행이나 기본적인 도리도 결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욥은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라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데는 그 어떤 조건이나 타협도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차마 세상의 방식대로 할 수 없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하고 신앙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마다, ‘그래, 내가 지금 주님을 올바로 따르고 있구나!’라고 확신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결코 하느님의 일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소신을 품고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고 단호히 구원 여정을 이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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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루카 9:57-62]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 즉, 첫 번째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신 말씀이요, 두 번째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신 말씀이고, 세 번째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첫 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따르려면 "희생"을 각오 하라는 말씀이다. 즉, 짐승에게는 그들이 안식을 누릴 굴과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당신은 그러한 안식처, 휴식처를 가질 수 없을만큼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누구도 거짓 구실에 속아서 예수를 따르도록 설득당했고, 사기당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실에 매혹되어 신뢰하며 따랐으며,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여 주었고, 그것을 취득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요구보다 더 큰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기에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두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얼른 듣기에 무자비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들의 풍습에서 보면, 그의 부친이 죽지도 않았고 죽어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에게 부친이 있는데, 그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하는 지금 당장 따르기를 핑계 대고 미루는 표현의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요점은, "모든 일에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미루다가 놓치면 목적하는바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다.
심리학자들도 말하기를 기분이 좋을 때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을 일으키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그 순간에 쓰지 않고 다음 날로 미루면, 그 편지는 그때 마음으로 쓰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즉,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자가 밭이랑을 곧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석양을 향해서 걷는 자가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므로 그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앞일에 몰두하는 적극적인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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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마음 편히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주님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쉬실 곳이 없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례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함을 만납니다.
어디에 얽매여 있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쉼터와 공간을 마련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복음을 논하고 묵상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이나 주석학 지식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기존의 지식으로 복음의 의미를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기존의 지식과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기존에 즐기고 아끼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아까운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떠날 때 기존의 삶이 아쉬운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저도, 우리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얼른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로 멋지게 여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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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마음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오롯한 마음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님 따르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마음을 담기 마련이지요
어떠한 마음으로
내딛느냐에 따라
걸음걸이도 달라질 테지요
부풀린 마음으로는
끝까지 가기 어려울 겁니다
쉬 꺼져버려 멈출 수 있으니까요
갈라진 마음으로도
끝까지 가기 어려울 겁니다
여러 갈래길에서 헤맬 테니까요
오직 오롯한 마음만이
흐트러짐 없이 곧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룰 겁니다
그곳이 어디에든
님 계신 곳에
나 또한 있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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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하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지만, 신앙에는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해 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의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 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는 일,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일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시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십시오. 제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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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짜 고쳐 쓸 수 없을까요? 맞다고 하면 반대의 의견을 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인간은 변화 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고쳐 써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 순간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매우 활발하게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3,300억 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집니다. 이는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는 주기가 약 7년쯤 된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과학적으로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 ‘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삶은 고쳐 쓰는 삶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된 변화를 내 안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났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열정적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기존의 것을 모두 간직한 채 따를 수 있을까요? 약간의 변화를 통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니겠다고 청원합니다. 그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사제 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생을 배우는 사제 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따르는 완벽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말에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말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에 대해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셨으며, 엘리야 예언자도 허락했었던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에 대해서는 “쟁기에 손을 대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로지 달려야 할 길만을 꾸준히 달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고침으로 충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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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시험>
-예수님을 따르려면-
말한마디 천량빛을 갚는다 했습니다. 침묵도 좋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은 더욱 좋습니다. 분위기를 밝게 하는 유머나 청담이나 덕담, 적절한 칭찬은 좋고 감사와 위로, 격려가 되는 말은 치유의 구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밭 농사가 신통치 않아 약간 상심하는 농장 수사님과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수사님, 배밭 농사에 절대 실망하지 마세요! 믿음의 시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의 시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국은 잘 될 것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시험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어제는 배 수확하는 첫날이었습니다. 마침 예수성심자매회 월모임이 있었고 이를 배려해 농장수사님이 배를 보내 주어 미사후 함께 먹었고 사진과 함께 감사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 배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과 미사후 함께 찍은 사진과 예수성심상 사진, 그리고 메시지도 회장 자매님과 주고 받았습니다.
“모두가 멋지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사랑의 선물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예수님 감사와 축복인사 받으시고 가족 모두가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멘! 신부님!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요즘은 차가 많이 막히네요. 신부님의 사랑을 듬뿍 담고 와 한달을 잘 지낼수 있을 것 같아요. 신부님의 따뜻한 기운으로 훈훈한 삶을 살아보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수십년동안 공동체를 한결같이 충실히 섬겨온 고마운 자매님입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마음은 그대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이래서 어제 하루 믿음의 시험은 잘 통과한 느낌입니다. 삶은 시험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믿음의 시험입니다.
역시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인내와 공부가 얼마나 믿음의 시험에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미사와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평상시 삶이 미사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수도회 연피정 지도를 하면서도 평상시 삶 자체가 피정준비임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해 갈 때 앞으로의 시험은 물론 최종 믿음의 시험이자 최종의 봉헌이자 순종인 죽음도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믿음의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욥기는 전체가 욥이 믿음의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참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에 주목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정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대로 우리 믿음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 파스카의 여정에 각오도 새로워야 할 것입니다. 익명의 사람들 셋은 우리 모두일 수 있습니다. 이들 셋의 믿음의 시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결연한 포기를 요구하는지 깨닫습니다.
첫째,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없다.”
어디로 가시든지 스승님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준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과연 정처없는 예수님을 홀가분하게 결연히 모두를 포기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오직 하느님께 정처定處를 둔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르는 무소유의 삶,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 쉽지 않은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오늘 이 믿음의 시험이자 과제를 마음에 담고 내 삶의 자리에서 힘껏 주님을 따라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사 청하는 이에게 참 몰인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죽은 이들 보다 산 이들의 일이,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믿음의 시험 문제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처신할지 오늘 잘 생각하면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또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깊이 깨닫기만 한다면 실제 상황에서는 각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해 자유로이 처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 조문이 아니며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의 시험 문제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이에게 하신 주님의 답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과 비전의 실현에 전념해야할 사람이 세상일에 너무 관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일에 전념해야 할 제자가 무분별하게 세상의 잡다한 일에 매어 있음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저런일 할 일 다하고 언제 주님을 따르며, 하느님 나라의 꿈을 펼칠 수 있겠는지요! 이 또한 분별의 문제요, 늘 결단해야 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 최대의 유일한 과제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하느님 나라의 목표와 꿈이 선명할수록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도 충실할 것이며 믿음의 시험도 잘 통과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역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화두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욥의 둘째 담론입니다. 욥의 하느님 공부와 인내가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공부하여 깨닫는 욥이요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욥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절대 승복하는 욥이요 반역이나 저주의 성향은 전무합니다. 너무나 하느님을 잘 알고 인간인 자기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 무사하리오.”
욥이 얼마나 깊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지, 하느님의 영역을 존중하는지, 또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깊이와 인간의 깊이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 공부 없이 인간은 절대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참으로 혹독한 믿음의 시험을 잘 치러내는 욥의 인내가 참 장하고 놀랍습니다. 평소 하느님 공부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그의 깊은 하느님 공부의 내공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거인 욥이요, 이에 비하면 우리 자신의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빈약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시험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믿음의 시험입니다. 평상시 꾸준하고 한결같은 하느님 공부가, 하느님 나라 공부가, 예수님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한결같이 잘 따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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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9,58)
<예수님을 따르려면!>
오늘 복음(루카9,57-62)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첫째와 셋째 사람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 죽은 이들의 장사와 가족 관계까지도 뒤로 하면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고난의 길 뒤에는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미와 아직의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기쁘게 따라가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만 잘 기억해도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그리스도)로 믿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이나 사물 또는 재물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도 함께 나누었지만, 고통 없는 기쁨 만을 찾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믿음인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통 앞에서 쉽게 포기합니다.
오늘도 참되게 믿으면서 인내심을 갖고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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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lQ336pTE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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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앞장서서
가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시고
뒤따라 가야할 이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뒤바뀔 수없는
주님과 우리의
자리입니다.
따름의 정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올곧은 정신입니다.
그 어떤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오롯한 마음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져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는 먼저
자아를 비워내는
비움의 진리입니다.
뼈저린 혈육의
정까지도
주님께 맡겨드리는
맡겨드림의 진리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그림자까지도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따름은 수단이 아닌
삶의 목적이며
따름은 핑계가 아닌
심장의 뜨거운
고백입니다.
이 순간
쟁기를 잡고
이 땅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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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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