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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7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의 정점은 인간 창조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살아 숨쉬는 동물들도 땅의 흙으로 그 몸을 지으시고 생명을 그 코에 불어넣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동물들에게는 영혼이 없이 본능만으로 살아간다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것들도 각자의 육체에 맞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유독 사람에 대해서만 그렇게 지으셨다는 기록을 남기셨다. 이는 사람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현격하고 탁월한 피조물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는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도 있는 것이나, 생령이 된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내 생각에 생기는 사람과 동물의 육체의 생명을 관장하는 정신 또는 기운으로서 '혼'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에게만 부여된 생령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교류를 담당하는 '영'을 의미하는 것 같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는 오직 사람 뿐이다. 그래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 혼에 전달하여 의지를 가지고 육체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역으로 육체의 행위는 혼을 학습하여 의지를 가지고 영에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을 전달한다. 그러면 다시 영이 하나님과 소통하여 혼에게 그분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들은 인간은 영-혼-육 세 요소가 아니라 영혼-육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실체적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기능적 관점에서는 영-혼-육의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 하는 논쟁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므로, 이것으로 상대를 정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개인적으로 천지 창조는 영광의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이라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태초에 지으신 사람의 형상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어지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을 따라 사람이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영광과 권세의 수준은 예수님과 사람이 같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인성을 따라서 지으신 사람에게 당신의 많은 권세를 위임하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과 연합하신 성자 하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완벽히 교통하시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태초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시키신 것이다.
태초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아름다웠고 지혜로우며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주장하기를 인간이 원숭이 같은 동물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인류의 조상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이 과연 우리 눈에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사랑스럽게 보이는가.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진화론을 추종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내어버리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비록 세상에서는 어리석다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창조를 믿음으로써 나의 존재가 그리스도 보시기에 너무나 귀한 사람임을 자각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다분히 확률적 가능성만을 두고서 설마 이 넓고 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사람이 있을까, 어딘가에 외계 지적 생명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발견되거나 입증된 바가 없다. 또한 많은 공상가가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제시하는 외계 지적 생명체들은 하나 같이 인간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그들 공상가들도 은연 중에 사람을 최고의 생명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 환경이 반드시 지구와 같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또한 외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 뿐만 아니라 외계 생명체의 육신도 입고 계셔야 하고 그 수만큼 성육신을 하셔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너무나 터무니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의 육체에 한 영혼만을 부여하셨다. 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은 상호 최적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개체와 호환이 절대 불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느 심오해 보이는 타 종교의 윤회설이나 영혼 바꿔치기나 다중 영혼설 등등은 아무리 그럴 듯한 사례가 있더라도 미혹하는 허구와 거짓에 불과하다.
#20211027
#간음
예수께서 죄없는자가 먼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때 군중들의 원죄를 지적하신게 아니라 이 여자와 저지른 간음죄를 지적하신것 같다.
#창조 #부활
태초의 첫날에는 우주의 빛이 창조되었다.안식후 첫날에는 참되신 빛이 부활하셨다.
#여호수아 #Joshua 2:1-3(1)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내다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어느 멍청하고 어리석고 우둔하고 미련한 목사는 여호수아가 뽑은 이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자마자 발각되었다며 그들을 덤앤더머라고 놀리며 조롱하기도 하였으나, 그 조롱은 자기 머리에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호와께서는 직접 당신의 지혜의 영을 여호수아에게 머물게 하셨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고르고 고른 정탐꾼들은 모든 백성들 중에서도 지혜와 덕망과 체력과 용기가 출중한 용사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여호수아가 다스리던 시기의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신앙수준이 높았었다. 38년 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악평하다 죽은 열 명의 정탐꾼들의 신앙이 바닥이었던 것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으로 보낸 두 명의 정탐꾼들을 덤앤더머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세운 여호수아를 멍청하다고 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여호수아에게 임하신 지혜의 영을 무지하다 하는 머저리 같은 신성모독과도 같다.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낼 때 마치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가르치듯이 지형과 주민과 산물 등 조사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으나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내면서 단지 엿보라는 두루뭉술한 지시만 내린다. 그 두 명의 정탐꾼은 38년 전 열두 명이 할 분량을 감당할수가 있었고 여호수아에게서 자세한 지시를 받지 않아도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대번에 알고서 자신들이 확인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유념할 수 있었다. 즉 그 두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다윗의 친위대장 브나야는 특유의 용맹함과 신앙에 기반한 충직함으로써 다윗과 솔로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솔로몬의 신하들은 언제나 솔로몬의 지혜의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에 그 지혜에 젖어 솔로몬의 의중을 잘 파악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르호보암에게 지혜로운 답변을 해줄 수 있었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나 학사 에스라 등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군주들의 마음조차도 시원하게 해줄 수 있었다. 반면에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누구보다도 다윗의 마음을 잘 알았으면서도 다윗보다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데 앞장섰다. 다윗의 책사 아히도벨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과 방불한 지혜의 전략가였어도 다윗을 반역하는데 악용하였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의 사촌인 요나답은 암논의 마음을 헤아렸어도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도리어 교묘히 부추김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신자들 중 대다수가 이 두 정탐꾼 같은 장성한 신앙을 가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38년 전 열두 명의 정탐꾼 마냥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고 책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심지어 열두 제자들에게서조차도 마음의 시원함을 얻지 못하셨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뿐이었다. 오늘날 교회들 중에서도 이 여호수아의 두 정탐꾼처럼 신앙의 지혜와 용기를 갖추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교회는 찾아볼 수 없다.
#20201027
#민수기 #Numbers 2:1-34
진 편성 및 행군 순서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3 동방 해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4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칠만 사천육백 명이며
5 그 곁에 진 칠 자는 잇사갈 지파라 잇사갈 자손의 지휘관은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요
6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사천사백 명이라
7 그리고 스불론 지파라 스불론 자손의 지휘관은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요
8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칠천사백 명이니
9 유다 진영에 속한 군대로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팔만 육천사백 명이라 그들은 제일대로 행진할지니라
회막을 중심으로 제1부대는 유다/잇사갈/스불론 지파의 진영으로 구성되며 회막의 동쪽에 편성되었다. 무대 편성 순서는 동-남-서-북 순으로 지정되는데, 이는 아마도 하루동안 태양의 궤적 순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동쪽에 편성된 세 지파는 태양이 뜨는 아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다 지파로부터는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다윗과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이므로 태양이 뜨는 동쪽에 편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새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을 보여주실 때 예루살렘 성읍 동쪽의 문 세 개를 요셉/베냐민/단 지파의 문으로 지정하신다. 에스겔은 북-동-남-서 순으로 기록하는데 이 또한 태양의 궤적을 따른 것 같다. 에스겔은 이미 바벨론에 1차 포로로 끌려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70년이 지나면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심령을 감동시키셔서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고 새로운 성전을 짓도록 하실 것이므로, 유다 왕조에 같이 있었던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주축이 되어 그 사역을 이루어 갈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회복을 의미하는 동쪽에 베냐민 지파를 배정하신 것 같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말미에 하늘의 새 예루살렘 사면에 열두 개의 문이 세 개씩 있다고 기록하는데 각 문에 해당하는 지파의 명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사면의 순서인 동-북-남-서와 계시록 7장의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14만 4천을 지파별로 1만 2천씩 순서로 기록된 것을 가지고 추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순서를 전제로 한다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동쪽 세 문은 유다/르우벤/갓 지파로 추정된다. 사실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 땅에서의 동서남북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사람의 기준에서는 동쪽이 갖는 대표적인 의미와 더불어, 계시록에서는 재앙의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의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유브라데에 쏟을 때 강이 말라서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장들이 오는 길이 예비되었다고 하므로, 사탄과 그의 무리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무결힌 승리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동쪽 문에 유다 지파가 배정된 것으로 보인다.
10 남쪽에는 르우벤 군대 진영의 군기가 있을 것이라 르우벤 자손의 지휘관은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요
11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육천오백 명이며
12 그 곁에 진 칠 자는 시므온 지파라 시므온 자손의 지휘관은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요
13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구천삼백 명이며
14 또 갓 지파라 갓 자손의 지휘관은 르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요
15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오천육백오십 명이니
16 르우벤 진영에 속하여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천사백오십 명이라 그들은 제이대로 행진할지니라
회막의 남쪽에는 르우벤/시므온/갓 지파가 제2부대로 편성된다.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목격한 새 예루살렘 성읍의 남쪽에는 시므온/잇사갈/스불론 문이 있었다. 사도 요한이 목격한 새 예루살렘의 남쪽 세 문에는 시므온/레위/잇사갈 지파로 추정된다. 르우벤은 장남이었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성품을 갖추지도 못했고 야곱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로서의 탁월함과 명분도 빼앗겼으므로 비록 회막 남쪽의 부대에서는 머리를 맡았으나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에서나 사도 요한의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 지위를 바로 아래 동생인 시므온에게 내어주게 된다. 시므온은 세 번 모두 남쪽에 위치하게 된다. 레위 지파는 회막을 전담하여 섬겨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정 수를 세는데서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이상 레위 지파의 제사 직분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다른 지파와 같이 한 문을 배정받게 된다.
17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18 서쪽에는 에브라임의 군대의 진영의 군기가 있을 것이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19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오백 명이며
20 그 곁에는 므낫세 지파가 있을 것이라 므낫세 자손의 지휘관은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21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삼만 이천이백 명이며
22 또 베냐민 지파라 베냐민 자손의 지휘관은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23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삼만 오천사백 명이니
24 에브라임 진영에 속하여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만 팔천백 명이라 그들은 제삼대로 행진할지니라
회막 서쪽에는 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 지파가 제3부대로 위치하였다. 서쪽에는 라헬의 아들들인 요셉과 베냐민 지파로만 구성되었는데, 이는 서쪽은 동쪽과는 반대로 해가 지는 방향이어서 소멸과 절망 등을 의미하듯이, 비록 야곱의 사랑을 받았어도 자녀를 오랫동안 낳지 못하여 평생을 언니 레아를 질투하며 보낸 그녀의 기구한 삶과, 어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라헬이 애곡하였다는 예레미야의 예언과 성취를 상징하는 것 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목격한 새 예루살렘 성읍의 서쪽에는 갓/아셀/납달리 문이 있었다. 사도 요한이 목격한 새 예루살렘의 서쪽 세 문은 스불론/요셉/베냐민 지파로 추정된다.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 땅에서처럼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없으므로 서쪽에도 그리스도의 광채가 드리우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요셉과 베냐민 지파가 배정된 것은 그들의 어미 라헬이 겪었던 이 땅에서의 고통과 슬픔이 더이상 없을 것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25 북쪽에는 단 군대 진영의 군기가 있을 것이라 단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26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육만 이천칠백 명이며
27 그 곁에 진 칠 자는 아셀 지파라 아셀 자손의 지휘관은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요
28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천오백 명이며
29 또 납달리 지파라 납달리 자손의 지휘관은 에난의 아들 아히라요
30 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삼천사백 명이니
31 단의 진영에 속하여 계수함을 받은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칠천육백 명이라 그들은 기를 따라 후대로 행진할지니라 하시니라
회막의 북쪽에는 단/아셀/납달리 지파가 제3부대로 편성된다. 태양의 궤적으로 보면 북은 밤을 의미한다. 단 지파는 장정 수로는 유다 지파의 뒤를 잇는 규모를 자랑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그에 걸맞은 책임과 모범을 행한 적이 없다. 심지어 날 때부터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암아 나실인으로 성별되어 성령의 능력을 어느 사사들보다도 탁월하게 받았던 단 지파의 삼손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처럼 선을 악으로, 빛을 어둠으로 바꿔버리는 단 지파의 속성은 밤과 어둠을 표상하는 북쪽의 의미와 매우 잘 들어맞는다. 단 지파는 결국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데서도 배제되어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그 이름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목격한 새 예루살렘 성읍의 북쪽에는 르우벤/유다/레위 문이 있었다. 에스겔의 시대는 바벨론에 의해 쇠락하고 멸망 당할 때가 머지않았기 때문에 유다 왕조를 이루는 유다와 레위 지파가 어둠을 의미하는 북쪽에 편성되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또한 포로 귀환 후 잠시 신앙의 회복이 일어났어도 그 이후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회복된 신앙은 다시 유다와 레위 지파를 중심으로 부패하고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암흑과도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목격한 하늘의 새 예루살렘 북쪽 세 문은 아셀/납달리/므낫세 지파로 추정된다. 아셀과 납달리 지파는 이 땅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므낫세는 요셉의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내어주어야 하는 우울한 작정과 섭리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의 광채가 북쪽에도 밤낮없이 비추이므로 이 세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 동일한 영광을 얻게 된다.
32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계수된 자니 모든 진영의 군인 곧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며
33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느니라
3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각 지파의 장정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므로 가장 바깥에 위치하여 회막과 백성을 둘러싸며 보호하고 호위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받은 장성한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영적 전투는 물론이거니와 교회를 위한 교회 차원의 영적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각 지파의 장정들이 연약한 여자들과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보호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교회에서 신앙이 연약한 이들을 위해 배려하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