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는 춤췄고, 조빠는 바다를 바라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를 읽고 나면, 독자들은 대개 한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모든 것을 잃고도 “자, 보스. 춤이나 추자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내, 조르바에게.
조르바는 실패 앞에서 계산하지 않는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삶을 이유 없이 사랑한다.
그에게 인생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인 체험이다.
그런데 내 곁에는 조르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늙어가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그를 ‘조빠’라고 부른다.
한때 바다를 지배하던 사내
조빠는 바다 위에서 살았다.
젊은 시절 배를 탔고, 육상으로 올라와 경험을 쌓았으며,
마침내 해기사의 꽃이라는 도선사가 되어 입출항하는 거대한 선박들을 이끌었다.
그 시절의 조빠는 분명 조르바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위험과 판단이 동시에 요구되는 자리에서, 그는 바다를 읽고 배를 움직였다.
돈도 벌었고,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지금의 조빠, 움직이지 않는 삶
지금 조빠의 하루는 조용하다.
늦은 아침, 믹스커피 한 잔.
정원에서 담배 한 대.
HTS 화면 위를 오르내리는 숫자들.
그리고 혼자 먹는 브런치.
30년 넘게 주식을 했지만,
“내가 사면 떨어지고, 내가 팔면 오른다”는 농담 섞인 자조만 남았다.
2억 5천을 넣고 반 토막이 된 계좌는
이제 투자가 아니라 시간이 만든 상처에 가깝다.
그는 춤추지 않는다.
대신 오후가 되면 동백섬을 돈다.
그리고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조르바는 실패 앞에서 춤추고, 조빠는 실패 앞에서 침묵한다
조르바가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춤을 선택했다면,
조빠는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바다를 본다.
조르바의 춤은 선언이다.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는 외침이다.
반면 조빠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다.
그는 소리 내지 않을 뿐,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더 이상 요란하게 반항하지 않는 방식으로 버틸 뿐이다.
마린시티의 높은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아내의 생활 반경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보다 관계를 택했고,
자기 욕망보다 타인의 일상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이 점에서 조빠는 조르바보다 훨씬 현대적인 인간이다.
조르바는 혼자였고, 조빠는 친구를 기다린다
조르바는 언제나 혼자 자유로웠다.
그의 곁에는 잠시 사람들이 머물다 떠난다.
조빠에게 가장 큰 기쁨은 토요일 등산이다.
돈 이야기도, 자식 자랑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간 날들의 시시한 추억을
친구들이 끝까지 들어주는 그 시간.
그 산길에서는
도선사도, 투자 실패자도,
마린시티 57층의 남자도 아니다.
그저 이름 불리는 한 사람일 뿐이다.
조르바는 우리가 되고 싶었던 삶이고, 조빠는 우리가 되고 있는 삶이다
『희랍인 조르바』가 인생소설로 남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조르바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빠를 보고 있으면, 다른 진실이 떠오른다.
삶은 늘 조르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춤추지 못한 대신,
바다를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는 자유를 포기한 대신,
관계를 끝까지 책임진다.
조르바는 삶을 불태웠고,
조빠는 삶을 견뎠다.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용기다.
마지막으로
조르바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춤췄고,
내 친구는 오늘도 산을 오른다.
둘 다, 자기 방식으로 끝까지 살고 있다.”
그리고 조빠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자네는 춤추지 않아도 된다.
바다를 보는 사람도,
조르바 못지않게 깊다.”
이 수필을 읽는 우리 역시
조르바도 아니고, 조빠도 아니다.
하지만 둘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