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으로 알아보는 동양 철학
'너의 이름은'은 시골의 한 여자애와 도쿄의 남자애의 몸이 어느날 바뀌었다는 설정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에서 우리 모르게 드러난 철학은 무엇일까? 한번 알아보자.
무스비
이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중간중간 '무스비'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실제로 무스비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쓰였다. 단어의 뜻은 맺음 또는 매듭이다. 미츠하가 황혼기가 오기 전 신사로 향하던 도중 그녀의 할머니가 말한다.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더욱 모여 형태를 만들며 뒤틀리고 얽히고 때로는 돌아오고, 멈춰서고 또 이어지지. 그게 바로 ‘무스비’, 그게 바로 시간” 그것은 바로 무스비이며, 시간이다. 시간으로 일컫는 무스비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지 않은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 속에선 타키와 미츠하의 운명적 만남인 무스비의 실현을 위해 그 실체가 “끈목”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머리끈의 역할은 이 '무스비'라는 개념과도 잘 들어맞았다. 이 끈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면으로는 둘이 머리끈을 건네주고 받는 첫 만남과 타키가 건네받았던 머리끈을 다시 미츠하에게 되돌려주는 장면 등이 있다. 중간에 미츠하가 본인의 머리를 자름으로써 머리끈이 불필요하게 되자, 그 이후로 서로의 몸이 더는 바뀌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머리끈이란 이 무스비의 실체는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의 만남을 유지하는 몫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무스비의 개념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이데아
무스비는 하나의 관념, 즉 이데아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여 이데아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초월적인 실재를 뜻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은 수없이 변화하고 일시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이데아는 그렇지 않다. 이데아는 불변하고 항구적이다. 때문에 운명을 정하고 이 영화를 지배하는 '무스비'를 하나의 이데아의 개념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정신의 깨달음으로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영화 장면과 함께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는 '상기'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이미 이데아들과 친숙했다고 보았다. 미츠하와 타키는 신체가 계속해서 바뀌지만 서로 만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3년과 도쿄와 촌락이라는 시공간 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운명을 뒤바꾼 둘은 모든 기억을 잊은 망각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대신 그 둘은 손바닥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속으로 “줄곧 누군가를 찾고 있었어.” 라는 생각을 되새긴다. 무엇인지 모를 인지 전 단계이지만 이미 친숙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은 서로의 이름을 통해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던 매개체였다.
또한, 둘은 마지막에 매듭의 스침을 통해 겨우 짧은 순간 마주한다. 이처럼 인간은 사물과 감각적인 접촉을 통해 잊혀 있던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상기한다. 영화 속에선 매듭이 감각적인 접촉 역할을 하는 것이다. 타키가 손목에 부적처럼 묶어두었던 이 매듭이 스침으로서 둘이 시공간 차를 극복하고 언덕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여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둘은 본인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잊어버렸고 자신이 줄곧 그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구체적인 사물, 매듭)을 통해 망각 상태에서 인지하고 인식의 단계로 거듭난다.
두 번째는 사랑이다. 플라톤은 깨달음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인식을 이데아의 세계로 이끈다고 했다. 이처럼 플라톤은 감각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세계와 별도로 정신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둘이 존재했던 곳은 이토모리 마을과 도쿄라는 실존하는 세계였다. 하지만 둘에게 시공간의 차가 존재해 서로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계속해서 몸이 뒤바뀌고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바로 무스비가 실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무스비는 영화 속에서 시간이라고 말해진다. 본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흐른다. 분명히 실재하지만 보여지지 않는다. 멈추거나 뒤로 가지 않는 영원불변의 존재이다. 하지만 둘에게 시간은 계속 뒤틀리고 얽히고 멈췄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비물질적이고 항구적 속성을 지니는 이데아가 참된 실재로서 물질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사랑”이란 절대적인 가치 판단과 진로로 이어져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시공간의 뒤틀림으로 만난 둘은 실재보다는 허상에 가깝다. 그러나 마지막에 지하철에서 우연히 스쳐버린 둘은 열차를 뛰어나와 계단 위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의 이름은?” 이 영화는 결말에서부터 허상이 아닌 실체로서 진정한 만남이 시작되고 있다.
이 과제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너의 이름은'을 대상으로 어떻게 쓸 지를 생각했다. '너의 이름은'에 나온 '무스비'에 녹아있는 철학 사상은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철학적인 부분을 잘 들어내준다. 이번 기회로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의미없이 스쳐 지나갔던 부분에 대해 작가가 이런 부분을 왜 넣었는지, 어떤 의도를 들어내고 싶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었다.
첫댓글 붉은 인연의 끈은 중국 전통 소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데아와 현실에 적용한 것은 독특합니다. 특히 "시간"을 무스비로 생각한 것도 독특합니다. 시공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것이 다른, 그러나 결국은 한 사람인 이들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좀 더 풀어가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