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삶
맹자의 말씀 가운데 이런 풍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돼지가 없어졌을 때, 난리가 납니다. 횃불을 들고서라도 온 동네를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道가 사라진 지금 소리치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잊어버린 채, 세상적인 것들만을 추구하면서 산다면, 바로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를 보면,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이라고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배고픈 자유인보다 배부른 노예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한심스러운 모습이요 불평인데, 만일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나 믿음을 잊어버린 채,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면서 산다면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는데, 말하자면 ‘지금의 세상이 끝인 것처럼 막가는 대로 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돈 버는 일에만 집착하면서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짐승들과 같은 삶이 되고 맙니다. 정신과 마음은 저 멀리 놓아둔 채, 육체에만 집착하며 살아가는 삶은 결코 참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를 배우라’라고 당부하셨는데,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지녀온 욕망마저도 버렸습니다. 욕망의 옷을 버리고 사랑이라는 옷을 입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따른다면 진정 우리는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글 : 여혁구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주교구
진정한 희생
성경 속 이해하기 힘든 내용 중 하나가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귀한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창세기 22장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땅에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 명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사악은 아버지를 따라나섭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이사악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가고 있으니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은 지옥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설명도 없이 인간에게는 가장 어려운 과제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복종하려 합니다. 이사악 또한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이 대목을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공동체를 위해 누군가를 제물로 쓰는 원시 부족 사회의 “희생제의”의 흔적이라고 설명할 것 같습니다. ‘지네장터’ 같은 우리 민담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구전되는 신화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공동체를 대신한 죄 없는 이의 희생’이라는 주제입니다. 정신의학적으로는 아마 역(逆)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혹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의 콤플렉스’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젊은이들을 배척해, 자기 권력을 지키려는 기성세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세력을 견제하고 억압하며, 젊은 세대들은 그에 반발하며 자기 세력을 넓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식의 대중심리학적 접근은 위험해 보입니다. 모호한 심리학적 용어를 쓰면서, 다층의 신학적 의미를 단순한 플롯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융 분석 심리학은 모든 것을 “병적 심리”로 재해석하는 것을 지양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영성은 과학이나 예술에서 사용하는 용어로는 닿을 수 없는 신비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듣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태도 역시, 아동 학대나 가정 폭력 같은 인간적 상황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상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자, 자신의 미래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도 자신의 성을 딴 가문을 이어갈 것이니, 세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의미를 갖게 해 주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의 상징입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돈과 명예, 건강, 행복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성경 속 역사적 서사가 자식을 희생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는 마음은 복잡합니다. 세속의 이런저런 일로 좌충우돌하면서 스스로의 속됨과 추함에 대비되는 성스러움이 판단을 멈추게 만듭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계속 묻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사랑을 위해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결국, 사랑할 줄 모르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철저히 본능적인 자식 사랑을 뛰어넘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스런 하느님의 뜻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글; 이나미 리드비나 / 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