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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말로4 - 페리를 타고 건너편에 디나르에 가서 해변 길을 산책하다!
어제는 노르망디의 캉 Caen 에서 기차를 타고는 돌 Dol de Bretagne 에서 환승해
밤 9시 17분에 브레타뉴 의 생 말로 Saint Malo 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오늘 5월 28일 생뱅상문 Porte St. Vincen 을 나와 성벽을 끼고 걸어 선착장 Cale de Dinan
에 가서는 페리 를 타고 20분 만에 바다 건너편 도시 디나르 Dinard 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계단 을 걸어서 위로 올라가니 길이 나오는데
해안선을 따라 산책 하면서...... 산을 한바퀴 돌기로 합니다.
바닷가 해변 위 바위에 길 을 낸 이 산책로는 클레르 드 륀 산책로 Promnade
du Clair de Lune 라 부르니...... 디나르의 명물 로 누구나 걷게
된다는데, 먼저 사이클링 을 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는데 자전거를 끌고 오네요?
클레르 드 륀 산책로 Promnade du Clair de Lune 는 다른 말로 달빛산책로 라고 부른다는
데... 새벽에 절벽 해안길 을 따라가다가 운이 좋으면 야생 여우 를 만나기도 한답니다?
그러고는 산책로 를 좀 더 걸어 올라가다가 평지를 만나서는 잠시 벤치 에
앉아 저 아래로 바다를 구경 하는데.... 시간만 충분 하다면 여기
드러누워 바람을 맞으면 한가롭게 책을 읽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는 돌길을 따라 모퉁이를 도니 저 아래로는 배들이 무수히 정박한 모습을 보는데 길
왼쪽에는 또 레스토랑 들이 줄지어 있으니 생선등 해산물 요리 가 주 메뉴 이지 싶습니다.
멋진 집들이 늘어선 여기 언덕길 에는 예외없이 개 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가볍게 목례하고 지나쳐서는 좀더 걸으니....
나무가 우거지고 도중에 작은 공원이 있어 벤치 에서 쉬어가기 좋습니다.
다시 걸어서 성벽인지 축대 인지를 지나 숲길을 한바퀴 도니 도처에 한가롭게
부부나 연인의 손을 잡고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이 참 보기에 좋습니다.
그러고는 왼쪽으로 도니 멀리 무인 등대 같은게 보이고 이제 길은 구부러
지는데 돌로 튼튼하게 축대 를 쌓았으니...... 얼핏 성벽 으로 착각할만 합니다.
디나르 해안가 에서 브레타뉴의 바다 를 보노라니 문득 생각나는
인물이 있으니.... Préfet Maritime de la Manche et de
la Mer du Nord 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로즈 Roze 제독 입니다!
저 이름은 보불전쟁 기간인 1869년 부터 1871년 까지 여기 브레타뉴 해안 을 지키는
프랑스 함대 사령관 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 으로 보는데...... 그는
3년 전인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 함대 사령관 이었습니다.
대원군 시절이던 1866년 가톨릭 탄압의 교령 (敎令)이 포고되니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과 신도 8,000여명이 학살 되었으며 산속에서 굶주림과 병으로 죽은 자 도
엄청 많았다는데...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 가 톈진(天津) 에 있는 프랑스
해군 사령관인 로즈 Roze 제독 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 가 일어납니다.
9월에 1차로 배 3척을 이끌고 강화도등 지형만 정찰하고 물러난후 10월 11일 프리깃함
게리에르를 포함한 7척 군함 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 300명을
포함해 도합 600명의 해병대 를 동원해서는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로
침범해 강화도 갑곶진(甲串鎭) 부근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 합니다.
16일 강화성을 점령 하였으며 26일 프랑스군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 하다가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 부대에게 27명이 죽거나 다치자 산성을 파괴했으며...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의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 을 공략 하려다가 잠복중인 양헌수의 500명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6명이 죽고는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 하게 됩니다.
식민지 베트남에서 반란 이 일어나니 11월 18일 프랑스군은 1개월간 점거한 강화성 을 철거
해 성내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군했는데, 프랑스측 기록에선 병인양요 전 기간중 프랑스군의 피해는 3명의 전사자와
35명의 부상자 가 전부라고 하니.... 차이가 너무 커서 어느쪽 기록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이 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마지막 해가 1866년 병인양요 라는 생각이 드는데,
대원군이 프랑스와 전쟁할게 아니라 서양 신부와 만여명 천주교 신도를 학살한
죄에 대해 사과 및 배상 하고... 경복궁을 짓지 말고 프랑스와 수교한 후에 백여명
청년을 뽑아 프랑스에 유학 시키며 유교를 국교에서 끌어내리고 천주교를 수용 합니다.
서원을 철폐하고 과거제도를 폐지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청년들을 기용하며 신분차별을
철폐 하고 천민과 노비를 해방 하며 과부재가 허용 에 경자유전에 따라 토지를 유상몰수
유상분배 하며 서양 기술을 들여와 군대를 육성했다면? 1871년 신미양요때는 이미 늦은게
적국 일본은 1854년에 개항 했고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로 거듭났기 때문이지요?
조선이 망한 해를 1910년이나 1905년 이라지만 저는 1894년 동학농민군 봉기때 라고 보는데
정부군이 오합지졸인 농민군에 패해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한 사실이 그렇고 또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가 4천명 일본군 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해 걸어서 서울로
들어와서 경복궁을 포위할때 까지 이에 맞서 저지한 조선군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 입니다?
이후 1871년에는 미국 함대에 의해 강화도가 침범 당하니 미군 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 로 진격하니 어재연의 조선군 600명은 열심히 싸웠으나
성은 함락되고..... 600명 중에서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 에 부상자 20명을
포함해 다수가 미군의 포로 가 되었는데도.... 미군은 전사자 3명에 부상자 10명 이라!
1875년 포 2문을 장착한 일본 운양호 단 한척에 초지진이 파괴되고 22명 육전대 를
영종진 에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 을 내고
도주하는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 에 불과했으니.... 그럼
조선군은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과 전쟁때 제일 잘 싸웠고 이후 몰락했나 봅니다?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 일본 3차례 침략 을 당한게 전부가 아니고 1894년 청일전쟁 을 거쳐
1904년 러일전쟁의 전쟁터 가 되는데.... 프랑스와 미국등 신문 기자들이 조선을 찾아
많은 사진을 남겼으니... 조선이 쇠락한 사정은 연암의 소설 허생전 에서 짐작할수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 의 청나라 기행문 '열하일기 (熱河日記)' 에 '허생전(許生傳)' 이 나오는데
글만 죽도록 읽던 딸깍발이 선비 허생은 돈 벌어오라는 아내 성화에 한양갑부 변부자
에게 빌린 1만냥으로 제수용 과일과 갓 만들 말총을 매점 하자 얼마못가 조선 팔도에
제사를 지낼이가 없었고 갓 쓰고 망건 쓴 사람이 없었으니 5년 만에 100만냥을 벌었습니다"
"허생이 중얼대니... '나라 꼬라지 알 만하구나.' 허생이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변 부자에게 10만 냥을 주며 말하는데 "조선은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하며...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니 만냥만 있으면 총총한 그물로 훑어내듯 독점할수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 조선 에서 매점매석으로 돈벌기 쉽다는 말이니 그리고 덧붙이길 '이는 백성
을 해치는 길 이다. 후세 공무원(司者)이 이 방법을 쓴다면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다'
박지원은 1793년에 '열하일기' 를 썼으니, 허생전 배경은 18세기 말 인데 정조 암살
미수사건은 1777 년이니 돈값은 여전히 좋았으나 세상은 허생의 경고를 듣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는 1911년 사학자 김택영이 연암집 속집을 출판 할 때 까지 세상은 허생전
자체를 알지 못했으니 과격한 주장이 담긴 열하일기는 필사본으로 소수
독자층 에게만 읽혔는데 종군 기자 로버트 던 이 돈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첫째 이유이니..... '조선인은 너무 가난해서 비싼 서양 상품을 살 수도 없습니다.'"
"무기, 총, 가구, 포도주와 술 등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독한 술로 한국 민중을
타락시킬 개연성이 없다.'(윌리엄 길모어, '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 1894) 농업 생산력은 급증했지만 제조업이
성장하지 못했으며 관리들은 부족한 재화를 독점하거나 수탈로 해결 했습니다."
"삼정(三政· 전정, 군정, 환곡)은 문란 했고 국부(國富) 편중과 독점은 심화 됐으니 그
이유는 당백전(當百錢) 인데, 1865년 흥선대원군은 조선 왕실 권위회복 을 위해
경복궁 재건 공사 에 돌입했는데.... 임진왜란 때 도주행각을 벌인 선조에게
분노한 백성들이 불지른 이래..... 경복궁은 300년 가까이 폐허 로 남아 있었습니다. "
"공사 현장과 목재 창고에 두번 불이 나자 대원군은 사유림에서 목재를 베어 오도록
명했고.... 마을 서낭당에서 석재를 반출 했으며 한양 성문 출입에 세금 을
물렸으니 공사는 물론 고종 시대 근대식 군대 창설에도 많은 돈이 투입 됐습니다."
"재정이 파탄 나자 1866년 11월 새로운 화폐를 찍었으니 당백전 인데 그해 11월부터
6개월 동안 발행한 당백전은 1600만냥으로 액면가는 당시 화폐 상평통보의
100배 였으니 상평통보는 민가 금고 속에 숨었고 당백전은 유통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 관리 최익현이 상소했으니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가혹한 세금을 없애고 당백전을
혁파 하시라."(1868년 고종실록 5년 10월 10일) 국고는 비었는데 능력도
안되면서 억지로 경복궁 공사를 벌이면서 벼슬을 팔았으니 매관매직 이라! 나쁜
돈은 6개월만에 중단됐으며 체제는 붕괴되고 있었으니 결국 망국의 길 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떨치고 걸어서 바다 가 잘 보이는 언덕에 방향표시판 그림 이 보이니
아마도 여기서 어느 방향은 무슨 도시로 시선 이 이어진다는 그런 뜻인
것 같은데.... 그럼 여기 어느 한 선을 따라가면 영국 남부 해안 이 나오지 싶습니다?
그러고는 모퉁이를 돌아가니 튼튼한 축대 위로 멋진 건물 이 보이는데 저런데서
사시사철 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가지 안개 때문에 제습기는 필수로 갖춰야 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채 같은 길을 걸으면서 바다 건너 생말로시 를 바라보다가
조금전에 보았던 대포 가 떠오르는데.... 임용한 씨는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라는 칼럼에서 “기사를 대신한 평민 보병” 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어깨를 맞대고 기다랗게 3열 횡대로 정렬한 보병이 북소리에 맞춰 전진 한다.
간간이 포탄이 작렬 하지만, 병사들은 발로 땅을 두드리며
앞으로 굳건하게 전진 한다. 17세기 전열 보병 전성기의 전투 장면 이다."
"언덕 위에서 말을 타고 이 용감한 병사들의 행진을 지켜보는 장군의 심정은 뿌듯
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플레이트 메일 (판금 갑옷)
을 입은 기사 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뿌듯한 감동 대신 공포와 분노
를 느끼고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누가 농민들이 저렇게 싸우게 만들었어?'"
루이 14세 시절의 유럽의 전투에서는 보병들이 저렇게 대열을 유지한채 적의 대포
와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전진 하는데..... 미국의
남북 전쟁 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오며 나폴레옹 전쟁 에서도 한결같이 이어집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에 보면 모스크바 전방에서 운명을 건 보로지노
전투 가 벌어지는데.... 주인공 안드레이의 기마부대 는 산 너머에에서 말에
내린채 앉아서 대기하는데, 적군의 포탄이 떨어져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죽어 가다가 공격 명령 이 내려서 말에 올라 탈 때는 이미 절반은 죽었습니다?
"중세의 기사는 꽤 값비싼 존재였다. 기사 한명이 무장 을 갖추는 데 필요한 비용은 소
50마리 가격 을 상회했다. 그러니 작은 영지 하나에서 기사 한 명 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농민들에게 장창 한 자루씩만 쥐여주고 잘만 조련하면 값비싼
기사를 가볍게 말에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고대 전쟁에서 증명된 사실이었다."
"기사들이 정말로 잊어버렸던 것인지, 가슴속에 두려움을 품고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은 평민 보병이 기사를 말에서 두들겨 떨어뜨리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다시 17세기로 돌아오면 포탄을 뚫고 전진하는 전열 보병 을 보면서 새로운 두려움을
느끼는 장군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참모였던 앙투안앙리 조미니 는
저 대포가 더 발전하면 보병 대형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대포의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 조약' 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인공지능(AI) 을 이용한 로봇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 가 드높다.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위한 의지 는 존경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찾아오는
백발을 몽치로 막을 수 없듯이, 이미 개발된 기술이 반대한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인류가 만든 기술은 다 양면성 이 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능력은 그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합리적 지성 과 건전한 사회구조가 아닐까. 인류의 기술이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게 커진 만큼, 인류의 지성 도 자격을갖추려는 노력이 더 시급한 과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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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명(天命)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모르면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없으며,
말(言)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
입조심,말조심(口不言人之過)
건강과행운이 함께하시기를 빌며 ....
💃💃💃
이제.... 완연한 봄 기운을 느낍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