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하느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그리고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통해서 이 세상이 시작된 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신비롭고 장엄하게 선포하는 거 같다. 지금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고 부르는데, 그 새 인류는 호모 크리스트쿠수(Homo Christikus) 정도 될 거다. 이 새로운 종족은 다름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서 살해당하신 예수님, 하느님을 죽도록 사랑하시고 또 앞뒤 가리지 않고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신 분, 그분 옆구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어진 새로운 인류, 새로운 종(種)이다. 이 종은 마지막 인류이고 영원히 남는다.
또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라고 증언한다. 이에 대한 직역은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 정도 된다. 농경문화에 속하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어색한 표현이지만, 유목민들이었고 구약성경이 그들의 역사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살이 되고 천막을 쳤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을 거다. 그들은 천막에서 살았고, 하느님도 그들을 따라다니며 다윗 왕이 궁궐을 지을 때까지도 천막에서 사셨다. 또 양이나 염소를 매일 만지고, 도축해서 그것으로 생활했으니 하느님이 살이 되셨다는 표현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도전이 되었을 거다. 이름도 부르면 안 되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사람, 살이 되셨다니 말이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을 말한다.(1요한 2,18) 이어지는 내용을 보니 그들은 한때는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1요한 2,19) 그들은 요즘 말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었던 이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목숨까지 내어놓게 되니 정말이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온전히 살아낼 수 없는 삶이다. 그러니 떨어져 나간 사람들,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을 탓하거나 비난할 게 아니다. 나도 이렇게 힘드니 말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세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또 되어가기, 완성되어 가기 시작한 거다. 그 밤에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되물었던 거처럼 다 큰 사람이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는 성령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중이다. 부모 자식 관계처럼 하느님과 그렇게, 아니 그보다 더 가까워진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의무이고 계명이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그분을 따르고 계명을 지킨다. 고백성사 귀찮으니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아무리 바빠도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일주일 한 번 정도는,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는 내서 하느님을 뵙고 기쁘시게 해드린다. 영성체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을 자기 안으로 모셔 그분과 하나 됨이다. 부부가 몸을 섞는 거보다 더 직접적이고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가깝고 친밀할 수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그리고 내 안에 사신다.
예수님,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 계명을 지키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주님을 살갑게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으로 기도하면 어머니처럼 하느님과 가까워진다고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