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대결로 전 세계 야구팬의 이목을 집중시킨 ALCS 7차전 보스턴 레드삭스 대 뉴욕 양키스의 대결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을 무색케 할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상 최고의 명승부전으로 펼쳐졌다.
게다가, 야구팬들로부터 스타워즈로 불릴 정도로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던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의 선발 맞대결. 현역 최고의 투수 2인이 펼치는 진검승부로 월드시리즈 이상의 관심을 끌었다.
◎ 홈런 두방, '세기의 로켓'을 격추시키다.
시즌 초반 깔끔한 출발을 보인 쪽은 '밤비노 저주'의 희생양, 보스턴 레드삭스. 보스턴은 2회초 트롯 닉슨의 투런 홈런을 포함 3점을 선취, 초반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보스턴의 파상 공세는 4회에도 이어져 케빈 밀러가 클레멘스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터트려 '뉴욕발 로켓' 클레멘스를 격추시켰다.
올 시즌 종료 후 은퇴 선언을 한 클레멘스였기에 당시 강판은 그의 20년간의 야구인생 최후의 선발등판이 될 운명의 순간이 될 수 도 있었다. 클레멘스는 3이닝 동안 6피안타(2홈런 포함), 4실점의 몰매를 맞으며 쓸쓸하게 마운드를 내려갔다.
하지만 11회말에 터진 애런 분의 끝내기 한방으로 클레멘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게 됐다. '세기의 투수' 클레멘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를 님들의 기억의 창고속에 가지런히 입력시키는 건 어떨까 싶다.
◎ God Bless 'Yankees'?
어떤 경기든지 경기의 큰 흐름을 되돌려놓는 모멘텀은 존재한다. 최고의 명승부로 불리는 ALCS 7차전의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계기는 소가죽의 야구공이 아니었다.
바로 7회말 양키스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가수가 부른 'God Bless America'였다.
6회말까지 제이슨 지암비의 솔로 홈런 한개만을 허용하면서 호투를 거듭하고 있던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 필자는 이 순간 마르티네스의 어깨가 식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 게 사실이다.
투수는 어깨에 있던 땀이 식게 되면 근육이 긴장되어 정상적인 파워와 섬세한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양키스의 공격 시작 직전에 'God Bless America'를 부른 게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돌려놓고 말았다. 당시 7회말 시작 전 마르티네스가 연습 투구를 하던 당시, 그의 표정에는 뭔가 찜찜한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화면상에 자주 잡혔다.
결국 그 테너가수가 부른 'God Bless America'는 'God Bless Yankees'였음이 11회말 터진 애런 분의 끝내기 솔로 홈런 한방으로 확인되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God Bless America'를 제창한 이 야구 외적(外的) 이벤트를 리틀 감독의 투수교체 지연과 함께 보스턴의 가장 큰 패인으로 꼽고 싶다.
◎ 배리텍의 인사이드 웍 실수
필자의 예상대로 7회말 대변화의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르티네스는 이전 타석에서 오늘 경기에서 첫 실점인 솔로 홈런을 친 제이슨 지암비와 다시 승부를 벌인다. 그 전 타석에서 아웃코스 직구에 중월 솔로홈런을 허용한 마르티네스.
이번 타석에서는 아웃코스는 가능한 한 피해가는 게 상책이었다. 배리텍의 초구 리드는 지암비의 몸쪽 깊숙한 코너로 요구, 지암비는 대책못하고 스윙도 해보지 못했다. 지암비의 스윙 메카니즘(Swing Mechanism) 상, 파워 포지션은 몸쪽보다는 아웃코너쪽에 있다는 점에서 배리텍의 리드는 상당히 바람직했다.
하지만, 배리텍의 이후 리드가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지암비를 상대로 한 결정구는 몸쪽 직구나 몸쪽으로 오다 아래로 떨어지는 유인구 승부를 벌여야 했음에도 배리텍은 승부구로 아웃코너 직구를 요구하다가 이전 타석과 동일한 중월 연타석 솔로포를 다시 허용했다. 배리텍의 인사이드 웍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암비의 홈런으로 양키스는 꺼져가던 승부의 불씨를 희미하게나마 되살린 것.
◎ '데이빗 vs 데이빗'
8회초 조 토레 양키스 감독은 선두타자가 좌타자인 '데이빗' 오티스가 등장하자 제프 넬슨을 내리고 '데이빗' 웰스를 등판시켰다. 웰스는 올 포스트 시즌에서 2승 무패 방어율 1.28을 기록할 정도로 최고의 컨디션을 보였다.
하지만, 초구로 오티스의 몸쪽으로 슬라이더를 던진다는 게 실투로 한가운데로 몰렸고 오티스는 노렸다는 듯 날카롭게 배트를 돌렸다. 우월 솔로홈런이었다. 스코어가 5-2로 벌어졌고 양키스의 추격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냉랭한 분위기가 양키스타디움에 엄습했다.
◎ 브롱스 폭격기, '10월 그리고 8회말' 다시 미치다.
'제국'은 아무나 건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전까지 지암비의 연타석 포를 제외하고는 마르티네스에게 끌려가던 양키스의 브롱스 폭격편대. '10월만 되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브롱스 폭격편대는 오티스의 솔로포가 터진 후인 '8회말', 오히려 더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재가동했다.
양키스 타선은 8회말 공격 1사 후 지터의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로 공격의 물꼬를 튼 뒤, 윌리엄스의 중전 적시타로 1점을 따라붙었다. 경기 스코어는 3-5. 8회말 1사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직까지도 보스턴의 승부에는 별 영향이 없는 점수였다.
하지만, 다음 타석의 '고질라' 마쓰이가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우익 선상을 타고 흐르는 2루타(관중의 손에 맞아서 볼 데드 상황)로 1사 2,3루의 위기에 몰렸다. 타석에는 호르헤 포사다. 포사다의 타구는 밤비노의 저주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타구를 날린다.
마르티네스의 몸쪽 직구에 타이밍이 늦어 빚맞은 플라이성 타구. 하지만 플라이성 타구는 중견수 쟈니 데이먼과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 그리고 토드 워커(2루수)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절묘한 삼각지점에 떨어진다. 2타점 적시타가 터진 것이다. 스코어는 5-5. 승부는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후 고의 사구와 볼넷으로 2사 만루의 기회에서 알폰소 소리아노가 친 중전 안타성 타구를 보스턴 2루수 토드 워커가 호수비로 건져 내면서 승부는 연장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 '확률은 단지 확률일 뿐?'
절묘한 'God Bless Yankees'와 더불어 이날 승부를 결정짓는 보스턴의 또 다른 실수는 바로 투수교체 시기를 놓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8회말 윌리엄스의 중전 적시타로 3-5로 양키스가 추격해 오고 있는 상황.
보스턴의 그래디 리틀감독은 지터-윌리엄스에게 연속 안타(모두 배트 중심에 정확하게 맞은 타구)를 허용한 상황에서, 타임을 걸고 마르티네스에게로 다가간다.
이 때 이미 보스턴의 좌우 셋업맨 앨런 앰브리와 마이크 팀린은 불펜에서 대기중인 상황이었다. 다음 타석에서는 이날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2루타를 쳐냈던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 페넌트레이스에서 마쓰이는 마르티네스의 '밥' 그 자체.
10타수 무안타에 삼진만 3개. 반면, 좌완 셋업맨 앨런 앰브리를 상대로 한 마쓰이의 페넌트 레이스 상대 전적은 5타수 2안타 타율 4할. 좌-좌 대결임에도 불구,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리틀 감독은 '확률'과 '에이스' 마르티네스를 믿고 그냥 마운드에서 내려간다.
이후 마쓰이에게 우익선상을 타고 흐르는 2루타가 터지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양키스의 페이스로 넘어가고 말았다. 만약 마쓰이 타석에서 페넌트 레이스 상대 전적(확률)보다는 당일 2루타를 쳐냈던 마쓰이의 컨디션을 더 유념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을까. 경기를 복기해보면 리틀 감독이 마쓰이 타석에서 마르티네스를 믿고 간 게 가장 뼈아픈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클로저는 아니더라도 지터나 소리아노등 우타자용 원포인트 릴리프로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는 김병현을 ALCS 엔트리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불펜진 운용의 폭을 좁혀 놓았다는 부분이 가장 중요한 ALCS 7차전에서 리틀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 'The curse is still alive'
경기 초반만 하더라도 잠잠하던 양키 스타디움에 운집한 뉴욕 양키스팬들은 경기 종반 무렵 양키스가 대추격전을 펼치기 시작하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등번호 3번이 찍힌 베이스 루스의 유니폼을 손에 쥐고 흔들며 루스의 저주가 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양키스팬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되는 컷의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쓰이의 우익선상 2루타가 터지자 마자 'The curse is still alive'(밤비노의 저주는 아직 살아있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랜카드를 든 양키스팬들의 모습도 출현, 밤비노의 저주가 재현되는 듯한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메라맨도 양키 스타디움 구석에 위치한 조지 허먼 루스(베이브 루스의 본명)의 동판 석상을 자주 비췄다.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강판(降板)'당할 당시 루스의 '동판(銅板)'은 마르티네스를 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 재현된 보스턴의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
필자는 'B 레드삭스 vs N 양키스', 그 총성없는 전쟁'이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보스턴의 포스트 시즌 징크스는 '밤비노의 저주(Bambino's Curse)'의 단독 효과가 아니라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와의 시너지 효과임을 주장한 적이 있다.
결국 이번에도 지긋지긋한 '레드 컴플렉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 있던 보스턴의 발목을 다시 한번 잡고 늘어졌다.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란 1918년 보스턴의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4번 진출한 월드시리즈의 맞 상대팀 중 세번이 바로 레드(Red) 계열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신시내티 레즈였다는 것.
특히 1975년 보스턴에게 시리즈 전적 3-4의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주범은 신시내티 레즈의 '빅 레드 머신(Big Red Machine)'.
2003시즌 ALCS 7차전에서 다시 한번 보스턴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장본인은 바로 '빅 레드 머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던 애런 분. (분은 8회말 루벤 시에라의 대주자로 나와서 연장 11회말 극적인 결승 홈런을 날려 기쁨은 두배)
분은 올 시즌 중반 논-웨이버 트레이드(Non-Waiver Trade) 마감 기한이던 8월 1일 스타인브레너가 신시내티로부터 극적으로 영입에 성공한 케이스. 아무리 사악한 구단주니 게걸스런 영감탱이니 욕을 곱배기로 얻어먹는 스타인브레너 양키스 구단주지만 뭔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5차원적인 능력, '감(感)'을 가진 노인네임에는 틀림없다. 이 부분이 냉철한 이성으로 승부하는 엡스타인과 차별화되는 부분이 아닐까.
반면, 레드 컴플렉스를 막아보고자 영입했던 보스턴의 천재단장 테오 엡스타인이 영입했던 신시내티 레즈의 '클로저' 스캇 윌리엄슨은 가장 중요한 7차전 5-5 동점상황에서 등판하지도 못했다. 만약 '밤비노의 저주'와 '레드 컴플렉스'를 막고자 영입한 윌리엄슨과 레드 컴플렉스를 재현시킬려고 영입한 분이 맞대결을 펼쳤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맞긴다.
지난 스토브리그 때 시작 종을 울린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와 엡스타인 단장의 혈전은 1라운드(FA 영입 경쟁)와 2라운드(논-웨이버 트레이드 경쟁)를 거쳐, '진검승부'인 3라운드인 ALCS. 최후의 격전인 ALCS 7차전 연장 11회말 분의 끝내기 홈런, 카운터 펀치 한방에 스타인브레너와 엡스타인의 진검승부는 완전히 종료되고 말았다.
단 한 가지. 양키스가 이기든 보스턴이 지든 누가 어떻게 되느냐에 상관없이 가슴 한 구석에 휑하니 허전해져 오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우리의 'BK' 김병현 선수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등번호 '51'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애리조나 시절 49번 + 보스턴의 51을 더해 완성된 숫자 '100'을 만들겠다고 트레이드 당시 각오를 밝혔었다. 하지만, 'BK' 김병현 선수의 2003시즌은 미완성(未完成) 교향곡으로 남고 말았다.
첫댓글 투수 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