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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강화해협 '염하(鹽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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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업 위기극복
해양대국 힘 모우자.'
강화해협 염하(鹽河)는
세계적인 관광자원이지만
그 진가가 갯벌에 묻혀 있다.
안타깝게도.,현재, 남북 대치상황.
언젠가는 빛을 발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울릉도가 동해 밤바다를
휘황찬란하게 밝혀 놓았듯
강화도가 '강화해협' 밤바다를
관광지 개발로 밝혀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핵무기 위협보다 강력한
'평화통일 지름길' 등불이 되리라.
울릉도
강화도 외포리항 앞바다
'외포리항~석모도' 가는 길
강화도 외포리.,삼별초 유적지
삼별초가 강화도 외포리에서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다거나
이곳을 근거지로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등 기록은 없다.
그런데도 이곳에 이런 비석이 세워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도 외포리.,'삼별초 호국 항몽 유허비'
.............삼별초 호국 항몽 유허비.......................
“이 터전은 강화도 삼별초군이 1270년 6월 2일
몽고에 대항하여 내 나라를 지키고자 궐기한 근거지이다.
원나라의 볼모가 된 고려의 원종 임금이 환국할 새 문인 종신들마저
강화도를 버리고 개성으로 건너가니 용사들로 조직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삼별초군은 강화섬 여기를 발판 삼고 단호히 몽고군에 결사항전
정황 따라 전라도 진도로 제주도까지 싸우다가 끝내 아름다운 꽃으로 흩어졌다.
이곳은 이렇듯 몽고의 지배를 반대하던 고려 무신의
전통 정신을 끝까지 떨쳐 들어낸 근원지인지라 온 군민의
뜻을 모아 여기에 유허비를 세운다.” - 유허비 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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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지(江華 禪源寺址)
..........강화 선원사지(江華 禪源寺址)................
사적 제259호. 선원사는 고려시대 몽골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려 고종 32)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자 창건했던 사찰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 격을 갖었던 사찰.
고려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 목판을 조각, 봉안.
이때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봉안.
1398년(조선 태조 7)한양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순천 송광사와 2대 선찰(禪刹)이었으나
1398년(조선 태조 7) 이후에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선원사지 터는 잊혀져.,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발견하여, 몇 개의
주춧돌,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 등을 확인하였다.
이후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 절터라
학술적· 역사적인 가치와 지역 연원에 근거하여,
1977년 강화선원사지 지정. 정확한 위치 논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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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마니산.,고려궁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
규모는 작으나 궁궐. 관아 명칭을 개경과 같고 뒷산은 송악.
고종 19년에 몽골군에 대항해 강화로 옮긴.,도읍터 궁도.
고려궁지는 원종 11년 환도할 떄까지 39년 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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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의 산실.,강화도.
강화도 섬 전체가 '지붕이 없는 역사 박물관'
'역사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 동서고금 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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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檀君紀元) 또는 단기(檀紀)는 한민족 역사.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 기준으로 하는 상징적인 기년.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기원전 2333년이 단기 1년이다.
서기 2017년은
단기 4350년이다
서력 기원 + 2333년.
단기는 전설에 따른 것으로
전 근대 한민족의 조상들이
중국과 대등하다는.,자긍심.
오늘날에도 한민족의 상징적·
신화적인 기년으로 인정된다.
지구 상에서 '간만의 차'가
가장 극심한.,강화해협 염하.
'단기 기원' 음력(陰曆) 진원지.
강화도는 역사의 현장이자 관광 명소이다.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부근리 지석묘, 역사적인 유물들이 곳곳에 분포.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매년 10월 3일에 단군제.
이 밖에 삼랑성·전등사·보문사 등 유적이 유명.
.......................강화도.........................
우리나라 4번째 큰섬으로 강화군 주도(主島).
면적은 305.75㎢이고 해안선 길이는 106.5㎞
경기만 북쪽의 한강 하구에 있으며, 동쪽의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와 접해있다.
강화(江華) 지명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등장.
이전에는 해구(海口), 혈구(穴口) 등으로 불리다가
강화현으로 편제하였는데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 뜻말 지명이., 강화(江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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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중심' 강화읍은 고려 전기에 강화현에 속.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1377년(우왕 3)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부치(府治)가 자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화군 소속된 이래 1994년까지 경기도 강화군에 속했다.
1995년에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속함에 따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속.
'강화해협' 염화(鹽河)
..........강화해협(江華海峽).........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이를 염하(鹽河)라 부른다.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 차가 커서 물살이 빠르다.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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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조와 만조에 따라 달라지는
해수면 높이의 차이.,"간만의 차"
조차(潮差), 간만의 차(tidal range)
썰물이 빠져나가 해변 해수면이 가장 낮아진 상태.,"간조"
밀물이 가장 높은 해면까지 꽉 차게 들어온 상태를.,"만조"
'간조와 만조 차이'를 "간만의 차" "조수 간만의 차"라 한다.
간조와 만조는 지구와 달, 태양
그 사이의 인력에 의해 발생한다.
하루 2회씩 일어나는 반일주조
하루 1회씩 일어나는 일주조.
이는 달과 태양의 위치 외에도 지구의 자전,
각 해안선 모양, 위도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체로 해수면이 가장 낮은 간조에서
높은 지점으로 올라가는데 6시간 소요.
다시 약 6시간 동안 서서히 빠져 나간다.
간조 때 드러나는 해저지형을 "갯벌(간석지)"
우리나라 서해안은 간만의 차가 평균 5m 정도.
특히, 강화해협 간만의 차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강화해협.,염하 ^
.................조강(祖江)...................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한강 하류 끝
'한강 물줄기'의 이름이며.,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앞에.,'조강나루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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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임진강이 만나
강화해협과 조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제비꼬리 처럼
생겼다 하여 정자 '연미정(燕尾亭)'
..............'연미정(燕尾亭).......................
이곳은 강화십경 하나로 손꼽히는.,절경지대.
연미정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해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철 50일간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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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
(黃衡)에게 정자를 하사하였던 곳이며,
현재도 '황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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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민간인통제구역 이북에 속하여 있기에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현재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관람.
연미조범(燕尾漕帆)
'한강 & 임진강'이
합해지는 곳.,조강.
조선시대 물화를 실은 배들이
개성과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
물길을 재며 올라오던 곳.,조강.
'조강나루터'가 '조강포'.
이로 인해 조강은 조선시대
통진현을 먹여 살렸다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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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1 김포문화재단은 회의실에서
'김포시의 옛 포구(浦口) 종합학술조사'
용역에 대한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밝혔다.
11일 재단에 따르면 이번 조사는 김포 옛 포구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한강하구 관광자원 등과
연계시켜 김포의 대표 역사문화관광콘텐츠로 개발하기.
재단은 2015년 12월 말부터 추진됐는데 이날 연구기관인
(재)한울문화재연구원은 고지도, 근대지도 및 '일제지적원도'
등의 비교와 고문헌, 주민면담 등을 통해 김포 주요 포구 위치를
추정하고 포구 일대의 마을 규모 등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조강포.,학술 조사.........................
김포의 포구는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받은 세곡을
한양수송 조운체계 상., 한강으로 올라가기 위한 길목.
많은 조운선이 한강을 거슬러 오를 물때를 기다리던 곳.
김포 일대가 현재 모습으로 간척되기 이전에는
조강포 내륙 쪽으로도 수많은 물길이 존재했다.
'한국수산지'(1908), '조선지지자료'(1919) 기록을 보면
총30여개에 달하는 포구와 나루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수산지'(1908)에는 각 포구의 호수, 인구수, 선박수 등.
20C 초, 김포의 3포.,'강령포, 조강포, 마근포'
조강포는 고려시대 서해 뱃길로부터 개경(開京).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요 거점.
조선중기 조강포는 갑곶의 '갑곶원(甲串院)'과 함께
'조강원(祖江院)' 관영숙박시설이 있던.,번성한 포구.
조선후기에는 포구에 대한 수세권이 중앙에서 궁방(宮房)·
아문(衙門) 같은 기구로 넘어가는 양상이 조강포에서도 확인.
최종보고회에서 한울문화재연구원은 "규장각 관련도서를 통해
1848년 조강포가 육상궁(毓祥宮:'영조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에
부속돼 매년 백미(白米) 50석(石), 소금(鹽) 50석(石)을 상납했고
조강 선주(船主)들은 용동궁(龍洞宮:명종 맏아들 순회 세자 궁)
에 세금을 상납했던 사실을 확인했다"고 문화재단은 밝혔다.
2016.04.11 '최해왕 김포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이번 연구용역을 통해 김포가 해안과 강안을 따라
수많은 나루와 포구가 형성됐던 수운교통의 중심지,
물의 도시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주요 포구들의
위치와 명칭, 규모, 기능 등을 정확히 밝혀 포구의
원형에 한발 짝 가까이 다가가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주민 구술증언과
포구 관련 역사문화자원 내용 등을 보완할 예정"이라며
"포구를 비롯한 한강하구 역사문화자원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내외에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우리나라 대표 수로 도시로서
김포 이미지정립과 함께 지역 브랜드 가치 향상을 위해 주력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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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에서 바라본.,'강화해협 들머리' 염하
조선시대 경기만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관문.
초지진은 '간만의 차'가 가장 극심한 곳.,방어요새.
..............갑곶돈대(면적 3,475㎡)...........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강화 갑곶돈> 사적 제 306호(1984.8.13 지정)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돈대는 작은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
조선시대 갑곶돈대는 대포 8문 배치된 포대이며.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는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널 수가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 ~ 원종 11년(1270)'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속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 9월 병인양요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돈대로 상륙하여
그해인 1866년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 옛터에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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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 임진강 한강' 합류지점.
....예성강(187.4㎞, 면적 3,913.3㎢)...
황해북도 수안군 언진산에서 발원하여
황해남도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사이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북한에서 15번째 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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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은 고려에서 중국의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워 예절 있게 맞아들이고
다시 바래다 주었던 강이라 하여.,예성이라는 이름.
고려 시대 송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을 때의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禮成江曲)」도 있었다.
.................임진강(유역면적 8,1118㎢, 길이 254㎞)............
함경남도 덕원군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해북도 판문군과
경기도 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로 흘러드는 강.
북한에서 9번째 넓은 유역 면적을 갖고 있으며, 한강의 제1지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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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분단 이전까지 고랑포까지 배가 다녔고
소형 선박은 안협(安峽)까지 운항할 수 있었다.
연평균 강수량이 1,483㎜로서 강수량이 많은 지대.
최근에는 북한에서 식량부족으로 밭을 만들고
땔감용 삼림벌채가 늘어 토양 유실량이 많아졌다.
...................한탄강.....................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상원리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철원군, 경기도 포천시, 연천군을 지나
임진강에 합류하는.,하천(길이95㎞, 면적641㎢).
‘궁예가 왕건에 쫓겨 도망치다 이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고 해서 한탄강 설.
6·25 전쟁 때 피난가다가 한탄강을 만나
건너지 못해 한탄했다고 해서 한탄강 구전.
문헌상 유래를 찾아보면 한탄강 옛 지명은
대탄(大灘)으로 ‘큰 여울’이라는 뜻을 가진다.
“양쪽 언덕에 모두 섬돌 같은 석벽(石壁)이 있어
체천[섬돌이 겹쳐 있는 하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탄강 하류 주민들은 ‘한여울[큰여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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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은 지방 1급 하천으로, 강원도 평강의 발원지부터
연천의 임진강 합수점까지의 총 유역 연장이 약 140㎞이고
남한 지역만 약 80㎞이며 그중에서도 포천 유역 길이가 40㎞.
남한에서 제일 길며 총 유역면적 2,085㎢, 하천 폭은 90~200m.
포천 한탄강은 주상절리 협곡이 길게 늘어져있고
침식에 따른 하식 동굴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
2011년 3월 ‘포천 한탄강 8경’을 지정하였다.
......................포천 한탄강 8경.............................
제1경 한탄강 대교천 현무암 협곡[천연기념물 제436호],
제2경 샘소,
제3경 화적연[명승 제93호],
제4경 멍우리 주상 절리대[명승 제94호],
제5경 교동 가마소,
제6경 비둘기낭 폭포[천연기념물 제537호],
제7경 구라이골,
제8경 아우라지 베개 용암[천연기념물 제542호]
.................................................................
.........................강화도 고인돌.........................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강화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 고려산 기슭에 120여 기.
표고 280m 높은 곳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이 특징.
강화 고인돌은 탁자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화순·고창과 달리 여러 지역에 흩어져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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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빙하기
빙하기
빙하기 한반도 주변 지형도
지구온난화
북극.,빙하
알래스카.,빙하.
남극.,유빙.
강화도 고려산 기슭.,탁자식 고인돌.
지붕 없는.,자연사 박물관.,강화도
........................강화 개천 대축제..........................
'BC 2000 ~ BC1500' 년경 만주와 한반도에 청동기 보급.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잉여생산물 발생으로 계급이 나뉘고,
청동기 문화가 더욱 발전하면서 강력한 군장이 등장하였다.
군장은 주변의 세력을 통합해 나갔고,
우리나라 최초국가 고조선이 세워졌다.
조선 초에 지어진 '고려역사서' <고려사>
"참성단에서 단군이 제사를 지냈다."고 언급하고 있다.
참성단은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데,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이곳에서 '강화 개천 대축제' 제천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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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단 개천대제.
개천절 첨성단.
......참성단(塹星壇 : 사적 제136호).....
경기도 강화군 마니산 산정에 있는 제단.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마니산제천단.
'자연석 기초 위에 네모로 쌓은 제단' 참성단.
아래 둥근 부분의 지름은 4.5m.
상단 네모의 1변 길이는 1.98m.
제단의 동서에 돌층계가 있으며
참성단 제단 높이는 약 5.1m이다.
.............................................
....................마니산(摩尼山 : 469.4m)................
원래 이름은 두악으로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부른다.
'마리'란 머리를 뜻하는 고어인데 전 민족의 머리로 상징.
'민족의 영산' 마니산이 있는 강화도는 뭍과 떨어져 있던 섬.
가릉포와 선두포에 둑을 쌓은 후부터 육지화되었다.
단군이 강림한 장소로 유명한., 참성단(사적 제136호).
전국체육대회 성화가 채화되며, 개천절 제전이 올려진다.
옛날 방어목적 진보·장곶보를 비롯한 유적이 많다.
일대의 산지들은 오랫동안 침식을 받은 구릉성 산지.
북쪽 사면 외에는 급경사로 기반암은 화강암·결정편암.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산정 부근은 급경사.
서해안 섬과 김포평야 등이 한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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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이 두레밥상처럼 펼쳐진 동막해변과
민머루해변 일몰은 풍광이 그림 같이 아름답다.
조개, 낙지를 잡으며 갯벌 체험까지 할 수 있다.
철마다 장어요리 밴댕이회·무침,
꽃게탕 맛기행도 빼놓을 수 없다.
가끔은 7㎏ 민어가 잡히기도 한다.
동막해변 부근에는 ‘강화도 시인’ 함민복 씨가 산다.
우연히 마니산에 놀러왔다가 폐가에 눌러앉은지 20년.
월세 10만원짜리 방에서 바다와 갯벌의 생명을 노래한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을 떼어
출판사로 보낸 ‘시한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 두말인데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함복만 시인.
고려시대 최고 시인의 자취도 남아 있다.
길상면 길직리에 잠든 .,고려 옛시인 이규보.
몽고군을 피해 강화로 피난왔던
그는 평생 8000수의 시를 남겼다.
그중에서 2200수가 지금도 전한다.
석모대교가 개통된 뒤로 강화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본섬~석모도' 뱃길은 3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우깡을 받아먹으며 줄지어 날아오던 갈매기의 추억도 옛일.
주말마다 문화관광해설사 동행하는
‘테마투어’ 버스운행(강화도~석모도).
................석모도.................
강화도 서쪽에 인접한 ‘교동도’는
큰오동나무 자생지라는 뜻말의 섬.
강화도 북서쪽 창우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었지만 2014년
교동대교 개통에 따라 찾는 사람이 많다.
교동도를 구경하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 농어촌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서해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위치.,석모도.
한강 관문 역할 등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한강하구 장악을 위한 요충지.
'고려~조선'시대
개성과 한양은 도읍.
경제적·군사적 요충지.
남북분단 상황에서 민통선 북쪽.
과거에 비해 그 의미가 많이 상실.
교동도는 역사적 유적들이 많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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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
연산군이 유배 와서 머물렀던 연산군 적거지,
화개산성, 조선시대 교동부의 석성인 교동읍성,
남산포 일대에 있었던 삼군수군통어령지와 계류석,
중국 사신들이 교동도 앞을 지나면서
뱃길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지낸 사신당
화개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치열한 격전지 관미성'일 것으로 추정.
교동도 유물 유적들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편.
한강· 예성강· 임진강 하구에 위치한 교동도.
이들 하천에 의해 운반된 퇴적물이 쌓여서 생성.
갯벌, 사주 등이 발달되어 다양한 해양생물 산란지.
교동도는 읍내리 화개산 중심으로 본섬 ,
난정리 수정산을 중심으로 또 한 개의 섬,
지석리 율두산을 중심으로., 또 한 개의 섬,
이렇게 3 섬이
간척 공사로 인해
하나의 섬이 되었다.
간척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강화에 유입된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척공사.
강화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간척공사가 있었을듯 추정된다.
교동도 중앙에 있는 대룡시장은
1960년대 시골 같은 전통시장으로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
한국전쟁 때 교동도에서 빤히 보이는
북한의 연백 지방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임시 거처로 지은 집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다.
6.25가 끝나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향 가까운 교동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 못간 실향민을 생각하면 가슴 뭉클해진다.
교동도 암석은 선캄브리아대 결정편암류와
중생대에 이를 관입한 광물입자가 큰 화강암.
거정질 화강암은 남산포 부근에서 흔히 보인다.
교동읍성 남문 홍예문 성벽을 이루고 있는
붉은 암석들도 남산포 일대와 동일한 암석.
교동읍성 성벽의 암석은 강화도 마니산 암석.
교동향교와 화개사 갈림길에는
비석 40여 개를 모아 놓은 비석군.
대부분, 역대 교동부사들의 선정비.
수리시설이 발달되지 않았던 교동도 간척지
논 가장자리에 물이 풍부한 홍수 때 물을 저장.
가물 때나 모내기와 같이 물이 필요할 때 용두레로
물을 퍼서 사용했던 소규모 물 저장고.,‘물꽝(물광)’.
물꽝은 여름에는 헤엄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봄가을에는 물고기를 잡아 천엽을 즐기던 옛 놀이터.
현재 교동도에서는 큰저수지와 관계수리시설 발달로
예전에 많았던 물꽝 대부분 사라지고 한 두개쯤 남았다.
교동도에는 조선시대 한증막이 남아 있는데,
돌로 쌓아 만든 속이 빈 무덤과 같은 모양새.
내부에서 나무를 태워 돌을 뜨겁게 달군 후에
재를 꺼내고 들어가서 땀을 내도록 하는 방식.
한증막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설치돼 있는데,
이는 땀낸 후 계곡물에 땀씻기를 하기 위한 것.
1970/80년대 교동도 주민들은 한증막을 직접 사용.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돌담으로 이뤄진 화개산성과 조선시대 봉화대터.
청동기시대의 암각화를 관찰할 수 있고
남쪽으로는 석모도가, 남서쪽으로는 주문도·
볼음도·서검도 등이, 북쪽으로 북한 연백평야.
교동도 남동쪽 해안가 옛 교동교회 부근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훈맹정음)를 완성시킨
박두성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 이곳에 들러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돌이켜 보는 것도 의미가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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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일주도로는 총연장 19km
아스팔트,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다.
본섬1, 부속섬10(유인도3, 무인도7)
면적 : 45.638k㎡(부속섬 포함 면적)
석모도는 강화도 서쪽에 길게 붙어있는 작은 섬으로
산과 바다와 갯마을과 섬이 조화를 이룬 풍광 좋은 곳.
서울에서 승용차로 90분이면 강화도 서쪽끝 외포리 포구.
맞은편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까지는
1.5km 바닷길이며 페리호 수시로 왕복.
뱃전으로 날아드는 갈매기떼가 장관이다.
석모도에는 해명산, 상봉산, 상주산.
3개 산이 있어, 삼산면 지명이 생겼다.
상봉산과 해명산 사이에 보문사가 위치.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관음보살의 터전.
보문사는 전등사, 정수사와 함께 강화 3대 고찰.
신라 선덕여왕 4년(635) 금강산에서 온
회정대사가 창건했으며 새벽 동틀 무렵에
파도소리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 보살상은
예로부터 '강화 8경'에 드는 명승으로 꼽혔다.
석포리와 보문사를 잇는(8km) 섬내버스는
배 시각에 맞춰 다녀 승용차가 없더라도 무방.
보문사까지는 섬내버스로 15~20분 정도 걸린다.
석모도에는 보문사 말고도
가볼만한 곳이 여러 군데.
석포리항에서 보문사 방향으로 5km 가면 왼쪽으로
어류정항 표지판이 보이고 이쪽으로 가면 염전,
해수욕장, 갯벌, 포구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석모도에서 하나뿐인 민머루해수욕장은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갯벌탐사에 좋다.
물이 빠지면 약 1km 정도의 갯벌의 나타난다.
갯벌의 감촉이 부드럽고, 조개, 게 등
갯벌에 서식하는 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장구너머포구.....................
민모루 해수욕장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포구.
멍석 위에 새우 밴댕이 말리는 냄새가 가득하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장구처럼 보인다 하여 장구너머.
숭어, 망둥어 낚시터로 각광.
어선이 드나드는 작은 포구지만 통나무로
그럴듯하게 지은 횟집, 찻집이 몇 군데 있다.
돌과 굴 껍데기가 많아 신발 장화를 신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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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정항..............
장구너머보다 훨씬 큰 포구인데
어선 이름을 딴 포장마차 형 횟집들.
직접 잡은 횟감을 팔기 때문에 값이 싸다.
출어기 개장, 금어기(7월15일 ~8월15일) 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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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아라뱃길 계획 & 난공사 구간v
김포., 양화구간 공사현장 & 완공 후.
'인천 송도~ 김포 한강' 25분 소요거리.
2017.3.20 뉴스
^ 강화해협(염하)
^ 강화해협(염하)
강화해협 염하
강화해협 손돌목.
강화도 동막해수욕장
강화도 동막해수욕장.
강화도 앞바다., 유빙.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집채만한 유빙이
강화도 앞바다로 떠내려 오면 외포항 좁은수로는
혹한기 석모도와 볼음도, 서검도 뱃길마저 막아 놓는다.
유빙은 바닷물과 만나면서 짠물에 서서히 녹아 작아지지만
혹한기에는 눈덩이처럼 더 커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기 때문.
썰물 때에는 급류를 타고 흐르는 집채만한 유빙들이 위협적이다.
..............인천앞바다 유빙(流氷) 주의보.................
인천 앞바다에 한강 하구 바닷물이 결빙되면서 생겨난
얼음덩어리가 떠다니고 있어 소형선박 운항에 주의 요구.
한강과 임진강 하구 유빙은 작게는 0.5m, 크게는 10m 폭.
얼음덩어리가 경기 김포와 인천 강화도 사이
해협을 따라 인천항 인근까지 떠내려 오고 있다.
인천해경은 철재에 비해 강도가 약한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FRP 재질의 소형 어선의 경우 날카로운 유빙 모서리와 충돌하면
선체 손상, 침몰 사고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며 어선들의 주의를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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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로 바다에 얼음덩어리가 떠다녀 운항에 차질을 빚은
인천 강화도 여객선들이 포근해진 날씨 덕분에 정상 운항.
인천해양경찰서와 강화도 일대 여객선 업체에 따르면
유빙으로 인해 운항중단되거나 운항간격을 늘려야 했던
강화도, 서검도, 주문도, 석모도 사이 여객선과 도선 운항.
이들 항로는 한강과 임진강에서 떠내려온 얼음 조각들이
인천 앞바다로 유입되는 바람에 선박운항 여객수송에 차질.
피해가 심해지자 해경이 매일 1~2차례 헬기를 동원해 해상순찰.
경인아라뱃길 인천터미널 갑문주변 & '강화도~김포'
초지대교 주변에., 약간의 유빙이 형성돼 있을 뿐이다.
강화도 주변은 매년 1월 중순에 유빙 피해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1월 초 한파가 시작
한강과 임진강이 얼어 붙으면서
중순부터., 강 하구와 서해가 맞닿는
강화도 앞바다로 유빙이 유입되곤 했다.
강화도 외포리 포구
'외포리~ 석모도' 선착장.
석모수로 유빙.
^ 석모수로 유빙.
오오츠크해
일본 '북해도'
오호츠크해 유빙을
가르는 오로라 선상에서.
유빙 다이빙.
강화도 유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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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왜 강화도 고려 피난도성을
수십년 동안이나 정복하지 못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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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 있어
무려 28 여년이 되었는데도
몽골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는데,
고려 태자가 왔으니….”
1259년(고종 46년), 몽골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세조(쿠빌라이)에게 고한다.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
쿠빌라이도 반색했다.
1231년 첫 침공 이후 28년이나
두드렸지만 결코 항복하지 않은 나라.
그런 지독한 나라의 태자(원종)가 화의를 청하러 왔다니….
“80국 중 고려처럼 禮로 대하는 나라는 없다” - 쿠빌라이 -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이던 몽골제국이 고려를
치지 못한게 아니라 치지 않았을 뿐.,과연 그럴까?
최근 출간된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나?>
고려의 대몽항쟁을 다시 되새겨 되돌아 본다.
몽골인의 ‘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물에 손을 담그는 것을 엄금하며
물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몽골 유목민들에게 물은 경외의 대상.
"1259년 쿠빌라이는 장강을 건너려던
몽골군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일일이
부적을 붙이게 했다."고 할 만큼.,경외의 대상.
수전(水戰)을 펼친 것도 아니고,
그저 도강(渡江)하는 것 뿐인데
부적까지 붙일 정도였다니.
고려 조정이 천도한
'천혜요새' 강화도 지형은
몽골군조차 두려움에 떨게 했다.
좁은 해협 & 유빙,
조류속도 초속 3~4m.
조석 간만의 차., 9m이상,
.............<대동지지>.......................
‘강화조’는 “해협 물밑 가운데가 오목하여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고
돌부리가 깊은 낭떠러지 같아
파도가 굽이친다”
여기에 수분함유량이 높은 뻘은
몽골군에게 헤어나올 수 없는 늪.
겨울철 강화해협 유빙도 골칫거리.
또 하나의 문제는 몽골군이
1년 내내 전쟁할 수 없다는 것.
몽골인들은 봄·여름에 최소한의 목축활동
등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전쟁이 장기화 된다면 1년의 삶이 허사.
고려 조정의 이중삼중 전쟁준비 또한 주효했다.
천혜요새 강화도에 '내성· 중성· 외성' 세겹 축성.
산성전은 고조선-고구려 전통을 잇는 강점이었다.
1231~1232년 고려는 귀주성과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고려의 무기는 역시 노련한 외교술.
1232년 몽골이 고려의
강화천도를 질책하자
고종은 이렇게 눙친다.
“유민이 흩어지면 어찌 상국을 섬기겠습니까.
남은 백성이라도 수습해 섬으로 들어가 있어야
변변치 않은 공물이라도 바칠 수 있으니까.” -고려사
고려는 화의에 합의한(1259년) 후에도
이핑계 저핑계 11년 후에야., 개경 환도했다.
화가 난 쿠빌라이는
재침을 고려했지만,
대신들이 입을 모았다(1269년).
“승리할 수는 있지만
재침이 최선은 아닙니다."
"저들이 가만히 지키기만 하면
무슨 계책으로 고려를 취하겠나이까?
100만 군대라도 금세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석모수로 유빙.
석모수로 유빙
갯벌과 유빙.
2012.2.4. 인천앞바다 유빙.
동막해수욕장 유빙.
강화해협 유빙.
손돌목
한강 하구 & 강화해협.
강화해협.,썰물.
강화해협(염하 : 鹽河)
강화군., 간척 현황
.............................강화도....................................
우리나라에서는 5번째, 인천광역시에서는 가장 큰 섬이다.
경기만 내 한강 하구에 위치한 섬이며 강화군의 중심 섬이다.
주변에 약 15개의 섬들이 흩어져 있고 최고봉 마니산을 비롯하여,
400m 내외의 산이 많으나 험준하지는 않으며 저평한 충적지가 발달.
남쪽 강화만으로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하며, 비가 많이 내린다.
난대성식물인 탕나무·동백나무 등이 자생한다.
.............................................................
강화읍을 중심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으며,
1970년 강화대교 건설로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역사 유물·유적이 많아 안보·사적관광지로
특히 전등사와 마니산 일대, 초지진·광성보 등
방어와 관련된 유적들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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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삼량성)
.................강화 삼량성(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130호. 둘레 약 1㎞. 245,997㎡ 축성연대 미상.
단군의 3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 한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성벽은 거친 할석으로 축조되어 있다.
1259년(고종 46)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고종은 왕업을 연장하기 위해 성안에 가궐을 지었다.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1660년(현종 1) 삼랑성 안에 새 사고를 짓고 옮겨놓았다.
이를 정족산사고라 한다.
1739년(영조 15) 중수하면서
남문에 건립한 문루가.,종해루.
1764년 다시금 성을 중수했다.
1866년(고종 3) 양헌수 장군 승전지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친 병인양요 승첩지.
정족산성 성안에는 양헌수의 승전비가 있다.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종해루를 세웠다.
.................................................................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 산성.
고려∼조선시대 수도 개경과 한양 외곽방어 중요한 관방시설.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 치(雉)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위에 벽돌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 모습이다.
성 안에는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傳燈寺).
절 주변에 1259년(고종 46) 지었다고 하는 고려가궐(高麗假闕)터.
1264년(원종 5) 불사(佛事)가 설행되어 원종이 행차하였다고 전한다.
전등사
그뒤 1660년(현종 1)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사고가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는데,
이 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도 함께 건립.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한성백제의 관문.,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文殊山城)..........................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사적 제139호. 둘레 약 2,400m, 면적 약 208㎢. 김포시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의 험준한 산줄기에서 해안지대까지 연결.
강화의 갑곶진과 마주보면서 강화도 입구를 지키던 산성.
1694년(숙종 20)에 쌓고, 1812년(순조 12)에 대규모로 중수.
산성 안에 '문수사' 절이 있어, 문수산성 이름이 유래되었다.
성벽은 다듬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고,
그 위에 성가퀴[女墻:낮은 담]를 둘렀다.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3 문루와 3개 암문.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했던 문.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침입했던 격전지.
이때 전투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이 남았다가 151년 만에 복원.
...................................................................................
문수산성 장대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면적 25.7㎡ 규모로 복원된 것.
문수산성 장대는 문수산의 동쪽 최정상(376.1m)에 위치.
서해, 강화, 파주, 서울, 김포, 인천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해로 입구의 전초적 방어기지'였다.
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 남문 밖.,산성마을
김포 평화누리길 1구간.
강화도.,강화산성
강화산성 & 북장대
강화해협(염하)
겨울 염하(鹽河)
......................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강화해협(江華海峽)은 염화(鹽河)라고도 한다.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차가 커서 물살이 빠르다.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
초지진.,'가을 진미' 전어
동막해수욕장 야영장.
1871년 신미양요 사진.
당시 미국 아시아함대
종군기자 펠리스 비토로
강화 덕진진
....덕진진(德津鎭 ; 사적 제 226호).....
고려시대부터 강화해협 12진보 중 하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진(鎭)
병자호란 뒤 강화도 보호하기 위해 만든 12진보
그중에서 가장 강화해협의 요충지에 있는 진이다.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는 강화해협 가장 강력한 포대.
.....................................................................
덕진진., 반월형 돈대. 포대
병인양요(1866)때는 양현수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으며
신미양요(1871)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
이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에 의해 강화도는 점령당했다.
신미양요 덕진진 남장포대
1976년 무너진 성곽과 돈대. 포대 등을 복원하고 대포도 설치.
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하고 적의 동태를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을 돈대라 한다,
덕진진에 가면 남장포대가 있는데
강화해협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염하 해상에서 적에 노출되지 않은
반월형 천연 요새를 확인할 수 있다.
남장포대
...............
강화나들길.
.................
광성보
신미양요 격전지.,광성보 전투
강화나들길.,광성보.
강화도 정족산길
강화나들길 7코스
강화나들길
강화도 나들길 11 코스 - 석모도 바람길
강화도 고려산
강화도 장하리 낙조마을
강화나들길 2코스., 더러미 장어마을
더리미
포구
분오마을
2018년 행정자치부 공모사업에 어촌체험 및 탐조를
테마로 한 화도면 사기리 분오마을 선정 3년간 25억원을
지원받게 됐다고 인천 강화군(군수 이상복)은 6월 13일 밝혔다.
2018년도 올해의 관광도시 개최를 앞둔 강화군은
이번 공모사업을 통해 기존 역사‧문화 관광과 더불어
생태관광을 강화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는다는 방침.
강화군은 분오마을 분오선착장이 탐조 특화 마을로 최적인 이유를
넓은 갯벌과 분오저수지, 저어새 번식지인 각시바위, 선두리 석축 등
철새 서식과 휴식에 필요한 안정적 공간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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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은 풍부한 바다어족자원과 국내 유일의 대형 하구 갯벌에
칠게, 도요물떼새, 두루미, 저어새 생물종이 서식하는 생태 지역.
계절별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탐조관광의 최적지.
분오마을은 강화군 남단갯벌 80%(48㎢)인 농어촌.
마니산 중심으로 서해 바다와 드넓은 갯벌이 있고,
동막해수욕장, 분오돈대, 각시암, 함허동천, 정수사,
마니산 등 다양한 주요 관광지가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공모사업을 통해 인천공항 환승객을 유혹할
탐조투어 및 생태관광 네트워크, 철새 테마파크 등
사계절 탐조관광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탐조 마을이
강화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할 것" - 강화군 관계자.
8코스 동검도
호국돈대길
겨울 염하
구 강화대교
카돌릭 갑곤돈대 순교지
조선시대 목판화
호국돈대길~강화해협
김포 문수산성
염하 철책길(14km(4시간)
총 191km 길이에서 12코스.
김포 문수산성
1871년 범선
덧 말.
그리스는 '국가 부도 위기상황' 상태지만
'산토리니 섬' 관광지가 있기에 희망이 있다.
강화 , 염하(鹽河) 롤 모델.,'산토리니' 섬 해역'
첫댓글 선경님의 해박한 역사에 대한 고찰이 많은 감흥을 내마음에 가득하네요...
시간나는대로 읽고 또 읽어보려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안이한 삶을 살지않았나 자책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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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밖힌 가시 같았던 궁금증.
그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자료 수집.
글로 정리하니, 일단 속이 후련하네요.
과분한 덕담! ~
덧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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