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과 과보(果報)
부처님께서 사왓티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빠세나디 왕이 문안드리고 여쭈었다.
“보시하려는 사람은 어디에 보시해야 하나이까?”
“대왕이 좋아하는 곳에 보시하시오.”
“어디에 보시해야 큰 공덕을 얻나이까?”
“보시는 지혜로우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사람에게 보시해야 하나니,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반듯하되 다섯을 버리고 여섯을 성취하며,
하나를 보호하고 넷을 항복 받았다면, 그런 사람에게 보시하시오.
그러면 가장 많은 복을 얻을 것이오.”
“다섯을 버리고 여섯을 성취하며, 하나를 보호하고 넷을 항복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수행자로서 탐욕을 버리고, 분노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마음이 들뜨는 일이 없고,
법에 의심하지 않고, 확고부동한 사람을 다섯을 버렸다고 말하오.
눈으로 사물을 보고 본 것에 매달리지 않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눈을 보호하듯이
귀, 코, 혀, 몸, 뜻도 이와-같이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을 여섯을 성취했다고 말하오.
마음을 항상 현전(現前)하는 것에 묶어 두고 분별하지 않고 직관(直觀)하는 걸 하나를 보호한다고 말하오.
육신의 유혹[身魔]을 항복 받고, 탐욕의 유혹[欲魔]을 항복 받으며, 죽음의 공포[死魔]를 이기고,
하늘의 유혹[天魔]을 항복 받으면, 넷을 항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오.
대왕이여, 삿된 소견[邪見]은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견해[邊見]와 어울리는 것이니,
그런 사람에게 보시하면 공덕이 없을 것이오.”
“세존이시여, 외도들은 몸의 행동만 생각하고 입의 업과 마음의 업은 별로 말하지 않나이다.
세 가지 업 가운데 어느 업이 더 중요하나이까?”
“행동으로 지은 업[身業]과 말로 지은 업[口業]을 받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소.
다만 마음속의 뜻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오.
외도들은 어리석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을 말하지만 사실은 마음으로 짓는 업이 더 중요하오.”
“세존이시여, 어떠한 이유로 마음으로 짓는 업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나이까?”
“대개 사람들의 소행은 먼저 뜻으로 생각하고 나서 입으로 나오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오.
혀는 뼈가 없듯이 변덕스러우며 자기 편한 대로 말하기도 하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어 마음속의 생각을 입과 행동으로 나타내나니
마음속에 악함을 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수레의 뒷바퀴가 앞바퀴를 따르듯이 그 과보(果報) 따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어 마음속에 선한 생각을 품으면 그 사람의 행동도 착해지리라.
선행에 좋은 과보(果報)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몸뚱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라.
[증일아함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