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리 / 공광규
내 비의 역사는 고기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어느 해 장마에 나는 고기리 기도원 계곡에서 빗소리가 도닥도닥 내리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빈 하늘에서 물푸레나무 잎으로 도! 하고 내리면, 물푸레나무 잎에서 생강나무 잎으로 닥! 하고 내리던, 다시 생강나무 잎에서 한 여자의 얼굴로 도! 하고 내리면, 한 여자의 얼굴을 만지던 빗방울이 닥! 하고 관음의 손인 듯 마리아의 입술인 듯 나를 도닥거리던
고기리 이후로 빗방울은 유리창에 도닥도닥 부딪힌다 우산 위에도 도닥도닥 쏟아지고 빈 어깨 위에도 도닥도닥 내린다 고기리 이후 내 비의 역사는 새로 씌여졌다
시작메모 한두 해 전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맥심문학회 강좌에 갔다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비 오는 날 좋아하는 분? 수십 명 중 거의가 손을 들었다. 나는 손든 사람은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역사 서술은 크고 작은 사건을 기준으로 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사의 어느 곡절에서부터 빗소리 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지독한 불륜>.<소주병>.<말똥 한 덩이>. 저서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등 이 있다. 신라문학대상.윤동주상을 수상했다. 현재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 위원이며 계간 <불교문예> 편집주간.
-『문학사상』(2011년 8월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