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 김동환의 물길찾아- 서해안 시대의 금강 발원지 뜬봉샘에서 한모금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라는 봉황의 전설과
재앙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봉화의 전설도
뜬봉샘을 오르기 위한 마을초입에 ‘수분공소’
금강(錦江)은 한강,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으로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뒷산인 신무산(해발 897m)의 해발 780m에 위치한 곳에 뜬봉샘이 있다. 뜬봉샘은 조선시대 설화에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전국의 명산을 순례하다가 산신의 부름을 받고 신무산에서 백일 기도를 올렸는데 백일째 되던 날 골짜기 작은 샘에서 봉황새가 날아 올랐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는 계시였고 그 우물에서 봉황이 떠올라 뜬봉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백제문화의 고장에서 조선 건국의 꿈을 꾼다니...)
또 다른 설은 신무산에서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산에 군데군데 뜸을 뜨듯이 봉화를 올려 ‘뜬봉샘’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철종, 고종 연간에 만든 동여도를 보면 뜬봉샘 일대가 금강이 시작되는 금강지원(錦江之原)이라고 적혀 있다.
뜬봉샘은 금남호남정맥길 등산로가 연결되며 백두대간 마실길 탐방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뜬봉샘 생태공원은 장수군이 지난 2012년 환경부로부터 생태공원 생물서식지 복원사업을 통해 정비한 곳이다.(2012년에는 훼손된 생태습지복원 사업으로 환경부가 경북 문경의 ‘버리기미재’,경북 김천의 ‘추풍령’,경남 구례의 ‘성삼재’,전북 장수의 ‘사치재’,경남 함양의 ‘매치재’,충북진천의 ‘신채원’,강원 원주의 국도 19호선,경남 창녕의 ‘우포늪’,경남 밀양의 ‘사장평습지’,전북 고창의 ‘운곡습지’,경북 구미의 ‘금오산도립공원’,전남 순천의 ‘순천 내륙습지’등과 함께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지금은 문화공원으로 지정되어 금강사랑 물체험관과 물의광장, 생태연못, 미로원, 물레방아, 생태탐방로 등을 갖추고 있지만 관리가 허술하여 제 멋을 풍기지 못하고 있다.
금강주변의 동,식물로는 까치수염,범의귀,죽단화,기린초,물봉선,네발나비,감돌고기,쉬리,대농갱이,어름치,가시납지리등이 서식하고 있다.
뜬봉샘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사람 한 명이 지나 갈만한 비좁은 수분리 마을 골목을 따라 오르거나 생태공원 주차장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수분리마을 주변으로 금강의 지천인 대량천이 흐른다)
마을회관을 내려다 보는 곳에는 2005년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장수천주교회 수분공소가 있다.
장수는 1850년대경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토마스 신부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시기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이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로 교우촌이 형성됐으며 수분리 북쪽 골짜기인 막골과 남쪽 골짜기인 운학동에는 많은 교우들이 피신해 살았다.
공소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로 1913년에 지어져 1921년 전면 개축했으며 전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한옥 양식으로 기둥과 벽, 마룻바닥, 제대 등이 원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전형적인 바실리카식(중세교회 건축의 원형) 내부 공간이면서 외형은 1920년대 한옥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공소 앞마당에는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이, 뒤뜰에는 대형 예수성심상이 나그네를 따스하게 마지한다.
공소 내부의 마룻바닥과 기둥과 벽, 제대까지 초기 공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해성사를 하던 고해소와 사제가 옷을 갈아입던 제의방까지 성당 고유의 공간이 잘 남아있으며 지금도 한 달에 한번은 미사가 집전되는 현역 공소다. 필자가 뜬봉샘을 찾았던 일요일에도 장수성당에서 오신 신부님과 수녀님이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도착하였으며 공소 마당에서는 신부님을 기다리는 신도들의 모습이 ‘병인박해’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400km를 흐르는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정북방향으로 흘러 ‘반역의 강’으로도 불려
금강은 군산만으로 흘러가는데 보청천,미호천,초강,갑천등 크고작은 20여개의 지류가 합류된다.
뜬봉샘에서 출발한 금강 물줄기는 장수읍 용머리마을에서 섬진강의 발원지인 진안 팔공산물과 만나며 서쪽은 섬진강,동쪽은 금강으로 나뉘게 된다.
금강(錦江)은 굽이치며 흐르는 물결이 비단결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반역의 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금강이 다른 하천과 달리 충북 청주 부근에 이를 때까지 거의 정북방향으로 역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차령 이남과 금강 주변은 산형과 지세가 거슬리게 달리고 있으니 인심 또한 그럴 것이다, 저 아래쪽 사람들은 나라를 변란케 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주의하도록 하라’고 후백제의 완경한 저항 지역이었던 금강 유역의 사람들을 경계하기도 했다.
‘택리지’에는 금강에 대해 상류지역을 적등강(赤登江),공주 부근을 웅진강, 아래쪽을 백마강(白馬江/부여읍 정동리 앞 범바위에서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 약 16km 구간),강경강(江景江), 그리고 그 아래쪽을 진강(鎭江)으로 적혀 있다.
1990년에는 금강 하구둑이 완공되어 농공용수와 홍수조절 기능을 맡고 있다.(길이 1841m,방조제 1127m, 배수갑문 714m)
역사적으로 금강유역은 구석기문화,청동기,백제,고려,조선문화로 분류된다.
선사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남한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공주군 장기면 석장리 구석기유적(1964년 조사발굴)으로 약 2만5천년 전까지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청동기 시대는 구릉지대에 널리 분포된 무문토기가 발견되고 있으며 초촌면 송국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웅진시대의 백제유적으로는 송산리 고분군, 부여시대의 백제문화는 능산리 고분군,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은 계룡산 갑사의 당간지주(보물 제 256호)가 있다.
조선시대의 유적으로는 논산군 노성면의 노성 노강서원, 둔암서원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쌀을 가져가는 해상운반로로 활용된 금강은 뜬봉샘을 출발하여 군산만까지 401km를 지금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이상기후로 과연 20개의 지천은 온존하게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근심이 든다,
뜬봉샘에서 마신 물맛은 차가워서인지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하지만 수질성적서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장수군에 연락했더니 약수터로 관리하는 곳이 아니어서 정기적인 수질분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채수병을 가지고 가서 수질분석을 해야 했는데 현재로서는 안심하고 마실수 있는 물인지 아닌지는 의문이다. 반드시 다시 찾아와 채수를 하여 분석을 하기로 했다.
하긴 2018년 3차 남북정상회담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70여 명이 백두산을 올랐지만 그저 만세만 부르고 생수병에 담긴 삼다수 물(한라산)과 천지물을 합수한 것이 고작이다. 수 십여명의 수행자중 환경이나 보건 전문인이 있었다면 천지물을 채수하여 돌아왔을 터인데 결국 백두산천지물에 대한 수질분석자료가 중국측 자료는 있으나 국내에서 분석한 자료는 아직도 없는 실정이다.(환경경영신문 2018년 10월4일자 기사화)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환경경영학박사,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