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바우(鶴巖) 이야기 학암 손진담
한적한 농촌 시골 마을 앞, 맑은 시냇물이 사시사철 흘러가는 계곡에는 시루떡 모양의 바위 절벽이 펼쳐져 있다. 한 마리 거대한 청학이 비상하는 형상을 보이는 산 밑에는 여러 개의 하식 동굴이 있고, 주상절리 바위틈에 자라난 소나무 가지 위로 흰 두루미와 백로들이 날아다녔다. 그래서인지 ‘학바우’, ‘굴바우’란 단어를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다.
1948년 4월 2일(음)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그러니까 해방 전후 유년기에 우리 어머니는 무척 힘드셨다. 셋째 아들까지는 모유로 다 들 건강하게 키웠는데, 세계대전 말기에 태어난 넷째 경우, 산후조리가 어려웠는지 동냥젖에 의지하였다.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 미음(죽)을 만들어 먹였으니 건강이 양호할 리 없었다. 게다가 병치레가 어떻게나 잦았는지 약국도 없는 시골에, 급하면 그저 물 떠놓고 빌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별로 용하지도 않았던 동네 점쟁이한테 가서 궁금증을 물어볼 정도였겠지요. 그날도 불덩어리가 된 아기를 데리고 몸부림치던 어머니가 찾아간 곳은 앞덤의 학바우 동굴이었다. 불상 하나 들어갈 만한 아담한 굴에 어린 자식을 올려놓고 비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니. 점쟁이 할머니가 산신(지층 신)에게 이 아이를 한번 팔아 보라고 했다니 일종의 토템 신앙이었지요. ‘천지신명이시여, 산신님이시여, 이 아이를 구해만 주신다면 어떤 일도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매년 이곳에 와서 한 상 잘 차려놓고 정성껏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빌었단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비실비실하던 아이가 어느덧 생기가 돌면서 밥도 잘 먹고 총기도 괜찮아졌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고등학교 시절 대구에서 하숙 생활하던 나는 일 학년 후학기가 시작되던 어느 날, 몹쓸 열병에 걸려 장기간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휴양한 적이 있었다. 당분간 음식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말도 외면한 채 추석날 기름진 고기를 실컷 먹다가 그만 재발하였다. 가끔 열이 40도 이상 오르내리는 장티프스는 어린 몸에 감당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부모님의 극진한 정성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가고 바깥출입이 가능해지자, 나는 앞산 시냇가로 가서 심신을 달래곤 했다. 굴속에서 도인처럼 명상에 젖어도 보았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의 연관성, 하늘과 땅과 사람 간의 의미도 골똘히 생각하며 인생무상도 느껴보았다. 영양보충을 위해 읍내 장터에 나온 꿩고기(기름기 없음)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심한 열병을 치른 후 온몸이 청소되었는지 잔병이 사라지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키가 일 년에 10cm 이상 자란 적도 있다.
고3 시절에는 대학진로 문제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학창시절 장래 꿈이 ‘권력이냐 돈이냐, 아니면 명예’를 두고 친구 간에 갑론을박도 있었다. 그 당시는 우상이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뉴 프런티어 정책’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라. 비록 가는 길은 힘들지만 돌아보면 보람찬 것이다.’ 마침 그 당시 비교적 낯선 과목인 지학(지구과학)을 가르치시던 담임선생께서 “지질과학이 앞으로 유망하다. 미답의 길을 가라” 하시면서 권유하였다. 어릴 때 고향 앞 덤 지층 신에게 팔려간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 3명이 의기투합하여 원서를 같이 제출했다. 지질학자가 된 후에 아호가 필요하면 학암(鶴巖 또는 學岩)이라고 하고, 별명은 ‘학바우’라고 미리 정해 두었다.
지질학도가 되면서 상대가 대부분 돌이고 바위였다. 작업복에 등산화, 지도와 나침판, 망치를 들고 무리를 해가며 야외 노두(露頭)를 찾아다녔다. 교과서를 통하여 지질학적 원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문이 불여 일견’이라, 직접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풍화되지 않은 암석의 속살을 봐야 하기에 해머가 필수장비였다. 그래서 ‘백견(百見)이 불여(不如) 일타(一打)’란 격언이 태어났다. 누군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는데 지질학도(geologist)는 그 반대다. 암석 속에 모든 지구사의 흔적이 있고, 황금을 위시한 광물자원이 들어있다. 암석 노두와 대화를 나누러 반평생을 돌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는 물론 외국의 지질명소도 부지런히 답사하였다. 내가 아직도 애지중지하는 자료는 지난날에 기록한 수십 권의 야외 지질 조사 수첩과 사진으로, 우리 집 책장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연구원 시절, 경상계 자원 조사 연구 수행 중 백악기 지층과 화석을 찾아 고향 마을을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수행한 운전기사와 같이 학바우 굴 앞에 앉아 지난 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와야 하는데 청바지 작업복을 걸치셨네요.’라고 연상의 최 기사가 운을 떼었다. 그래도 이곳 지층 신의 도움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며, 영국산 랜드로버에 운전사까지 대동한 학바우가 심오한 한반도 땅의 역사를 나랏돈으로 연구할 수 있다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굴 바위와 무관하지 않았으리. 만약 그 바위가 화성암이나 변성암이었다면 세부 전공이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국내 암석학회 뒤풀이 행사 때 재미 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죽다가 살아난 학바우가 부활한 지 70주년이 되었다. 그리운 어머니도 그 옛날 점쟁이 할머니도 돌아가신 고향의 앞산 아래, 그 동굴은 지금도 변함없이 잘 있겠지. 청학산 바위 절벽의 굽어진 소나무 위를 지금도 백학이 둥지를 트는지 궁금하다. 점쟁이 말을 무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전에 어머님은 그때 약속한 산신제를 해마다 음력 사월 초이틀 새벽에 지내셨고, 동네 아낙들도 그런 효험을 믿고 기도하러 간다는 얘기를 오래전에 고향 친지에게서 들은 바 있다. 다가오는 봄날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님 산소도 돌아보고, 특별히 바위굴에 가서 산신제를 지내야겠다. <유세차 무술년 4월 계사 삭 초이틀 무신, 학바우 부활 70주년을 맞이하여, 지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술과 고기, 과일을 올리오니 우리 가족들을 부디 잘 보살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