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연주회를 마치고 협연자 지안왕과 인사를 나누는 정명훈 감독. 서울시향 제공)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정명훈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 이제는 겨울스포츠가 된 느낌입니다.
아니, 이번해에는 좀 더 심각해서 재계약이 무산될 수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치르는 올림픽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인지 더 가열차게 전개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좁게는 한 클래식 음악단체 이야기지만 이는 이 나라에서
예술을 어찌 바라보는지, 문화생활 혹은 여가생활의 단면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도돌이표요, 학습효과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아 한마디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생각을
담아두고 있느라 답답증을 앓는 것보다 뭐라고 주절거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글을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박현정 대표의 인권유린에서 시작된 이 건은 어느덧 박현정이란 이름은 사라지고 직원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뒤로 젖혀진 채 ‘천인공노할 정명훈의 전횡’으로 발전해버린 듯합니다.
이 ‘정명훈 논란’ 한편에서는 지루하고 유치찬란한 ‘급에 관한 논쟁’ 대신 정명훈 감독이 그런 대우를 받을 급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우리 수준에 그런 급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가당키나 하냐고 질문하는 새로운 올림픽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서울시향의 음악적 역량과 예산의 크기를 비교하며 우리가 ‘정명훈급’의 지휘자를
갖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거나 분에 넘치는 사치라는 것이죠.
이러한 논리는 사실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 퍼져 있는데, 특히나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은 성장논리와 분배논리가
대립하는 지점에서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성장논리가 이겼습니다. 지금은 성장을 위해 희생할 때이지 분배의 과실을
나눌 때가 아니라고요. 이 나라는 반세기 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복지를 위해 쓸 돈이 없는 가난한 나라지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명훈 감독과 서울시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말의 성찬 속에서는
‘평생 공연장 한번 가본 적 없는 서민들의 박탈감’ 같은 표현들이 단골로 등장합니다.
서민들의 박탈감으로 치자면 올해 장원준 선수가 두산으로 이적하며 기록한 80억대의 보장액이나 배우 김수현이
중국의 한 예능프로그램의 1회 출연료로 받았다는 10억대의 금액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텐데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비판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는 단체’, 그리고 전체 국민들 중
클래식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같은 세금과 규모의 논리입니다. 민간에서 스포츠선수나 연예인이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 것은 그들의 재능과 실력에 대해 시장이 치르는 대가이기에 세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역시 민간분야에서 책정된 고액의 광고모델료에 대한 비판은 설 자리가
없어지지요. 이러한 모델료가 제품가격에 전가되어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분석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요. 야구선수의 연봉이든 연예인의 방송 출연료이든 CF모델의 개런티이든 이 비용은
야구관중이건 TV시청자건 제품의 소비자건 누군가 부담해야 하는 건 다르지 않은데 말입니다.
예술로 돌아가봅시다. 평생 공연장 한번 가본 적 없는 서민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지방정부시대에 웅장한 공연장들은
그토록 늘어나고 있는 걸까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공연예술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공연시설, 쉽게
말해 극장의 수는 944개, 이 가운데 772개가 2000년대 이후 건립된 것입니다. 이쯤되면 지방정부들이 서민들의 박탈감을
가중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치죠.
2000년대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극장의 수가 늘어난 것과 비교해 극장을 채울 버젓한 공연프로그램들은 극장 수의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번듯하게 지어진 극장들의 많은 숫자가 무대와 객석을 겨우 갖춰놓았을 뿐
분장실이나 출연자 대기실이 없는 등 공연장이 어떤 곳인가 하는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곳도 많습니다.
극장들이 자체적인 좋은 공연프로그램을 개발하기보다 다른 극장에서 공연한 작품을 사오기 바쁜 공연쇼핑에 더
주력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극장들은 뒤늦게 자체제작 프로그램들에 공을 들이거나 상주단체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가동하며 극장을 예술을
생산하고 발신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난 대작을 사다 올리는 것을 극장장의
업적으로 삼던 분위기에서 탈피해 극장의 문턱을 낮추고 지역민들의 일상에 예술을 심는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극장이라는 하드웨어보다 예술콘텐츠의 중요성에 눈을 떠가고 있는 것이죠.
월간지에서 1년여 공공극장을 찾아다니며 극장운영을 책임진 예술경영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은 한목소리로
시민들, 혹은 지역민들의 ‘예술향수권’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 예술적 토양이 척박하고
부족한 예산으로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지방공연장에서도 흥행을 생각해 관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공연이
아니라 관객의 예술체험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좋은 공연을 올리는 것이 일순위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공연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들의 한가한 취미생활이 아니라 시민의, 국민의 권리이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공공극장의 의무라는
거지요.
정명훈 감독을 둘러싼 논란, 그에게 지불하는 연봉이 과연 정당한지, 그가 그 연봉만큼의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같은
소모적인 논의는 뒤로 하고, 왜 우리 실정에 맞지도 않는 높은 ‘급’의 예술가를 데려와 시민의 혈세를 지출하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봅시다. 이미 오래전에 답이 나와 있는 이 문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서울시향이라는 예술단체가
생산하는 공연콘텐츠의 질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평생 음악회 문전에도 가본 적 없는 서민들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공연콘텐츠의 질이 높아지면 무엇하나, 하는 문제제기는 시대착오적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썼듯이 국민들은, 시민들은 수준 높은 공연예술 콘텐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국가나 공공에서는
수준 높은 공연예술 콘텐츠를 국민들과 시민들에게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단으로 독립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시민의 세금이 예산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서울시향 같은 공공단체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며 과격하게
말한다면 더 좋은 공연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단체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정명훈 감독 부임 전후의 서울시향은 완전히 다른 단체이며 그가 시향에 부임해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말씀하셨으니 그 부분에 대해 저까지 거들지는 않겠습니다. 정명훈이라는 개인에게 그렇게 높은 비용을 치르며
시향의 수준을 높일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럴 가치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시향은 그런 비용을 치러서라도 수준을
높여 들을 만한 연주를 시민들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는 단체라는 것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정명훈 감독 이전에 서울시향은 그보다 훨씬 저비용의 지휘자를 수장으로 두었음에도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단체였습니다.
초대권을 아무리 남발해도 객석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서울시향이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초대권을
남발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과거 서울시향의 연주가 공짜로도 듣고 싶지 않았던 음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예술콘텐츠도 상품이기에 당연히 가격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술콘텐츠는 배고플 때 일단 허기나 면하려 먹는
음식과는 다릅니다. 배가 고프면 맛을 떠나 일단 음식을 섭취해야 하지만 예술은 그와 달리 고관여상품입니다.
단지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내용을 따져보지도 않고 구입하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죠. 서울시향의 연주는 지난
10년 동안 초대권을 손에 쥐어줘도 듣고 싶지 않은 음악에서 몇 달 전에 티켓을 예매해놓고 기다려서 듣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서울시향의 연주를 들으러 가는 서울시민은 전체 서울시민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비용은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지출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용자의 규모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이 사회에 필요하지도 않는데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요.
대표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그렇고 공공도서관이나 박물관, 스포츠시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와 넥센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고척돔만 해도, 이 나라 정도의 야구시장 규모에서 시민의 혈세로 돔구장을 짓고
운영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더 나아가서는 대학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지도 않은 기초학문을 개설해놓을
이유도 없을 테고요.
정명훈이 그만둔다고 서울시향이 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왜 정명훈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인가,
서울시향에만, 혹은 클래식에만 그렇게 투자할 필요가 있는가 등등, 정명훈이란 이름을 둘러싸고 무수히 많은 담론들이
생산되고 있고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그 담론들 모두가 곱씹어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명훈이라는 이름이 이슈의 본질을 가린다면 그로 인해 파생된 담론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윤단우 (hersight)
글쓰는 윤단우입니다. 「사랑을 읽다」를 썼고, 무용전문지 「몸」의 기자로도
활동 중입니다. 읽을 만한 글, 흥미로운 공연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