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 미사에서 시복을 선언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를 위한 기념일입니다.
잠시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의 순교에 관한 증언을 읽어보렵니다.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은 그해 5월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바오로)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외종 사촌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유교식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당대 사회에 폐륜으로 받아들여졌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에 나아가 자수함으로써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한 사건이다. 참수 당하기 전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없습니다.” 특히 윤지충은 “만약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진산성지홈페이지 자료)
오랫동안 다른 순교자들처럼 이분들도 유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는 유항검이 수습해서 바우배기에 묻었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유항검이 치명한 후 신자들 사이에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무덤의 위치를 잊게 되었는데, 전주교구는 2021년 3월 이곳을 정비하다가 유해를 발견했고 같은 해 9월 1일, 발견된 유해가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3명의 유해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유해 발견이 한국 교회사, 더 나아가 세계 가톨릭 교회사에 기록될 큰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9,23) 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제자의 요건 중에서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어떤 협상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위해 자기 생각이나 계획이나 욕심 등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지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의 길이고 자기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삶의 방식, 예수님의 여정인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 또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무릇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 제자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12, 24.2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순교자들은 예수님처럼, 또 다른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려 했으며, 밀알과 같은 삶을 살려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함께 희망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의 표지였으며,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윤지충(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죽기까지,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증언하고 증거한 그 동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사랑이며, 그 사랑의 표현이 순교였던 것입니다. 또한 순교로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섬겼으며, 그 섬김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임을 믿고 희망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순교자들은 그래서 ”영원한 생명“(12, 25)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하듯,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오늘날 한국천주교회가 열매 풍성한 교회로 성장, 성숙했음을 믿습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의 인물은 바로 90세의 순교자 엘아자르입니다. 그는 평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거짓되고 가식적인 삶을 살기보다 자신의 나이에 맞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왔었기에 ‘법에 어긋난 이교 제사’를 거부함은 물론 자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젊은이가 더 살아보려 늙은 나의 가장된 행동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진다면,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6,25)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늙어가는 저에게 큰 감동을 주고 도전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다음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증언입니다.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나 자신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6,27) 엘아자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자들 역시 동일한 생각과 마음으로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의 순교로써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실행한 사랑의 순교보다 더 큰 은혜와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 또한 자랑스런 순교자의 후손들로 순교의 얼과 정신으로 우리네 삶에 적합한 순교 영성를 실천하도록 합시다.
순교자란 의미는 근본적으로 <증거자> 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바로 순교자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증거자입니다. 다만 순교 선열들과 우리와의 근본적인 차이, 곧 우리의 증거는 피 흘림이 없는 백색 순교라는 점입니다. 아직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한순간 생명을 바친 순교의 영광을 받을 수 없겠지만, 일상을 살면서 삶을 통해서 믿음을 증거 하는 삶 또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자고요. 우리의 믿음 약함을 인정하면서 오늘에 맞는, 지금 주어진 각자의 삶의 자리에 맞는 순교를 해 나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시험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으리라. 알렐루야” (복음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