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후 유럽 1945~2005 1권] 3,4장
3장. 유럽의 부흥
- 히틀러가 패배한 이후 급격한 변화를 가로막은 주된 장애물은 반동주의자나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주된 장애물은 대부분 전쟁에서 벗어나 런던에서 귀국을 준비했던 합법적인 망명 정부였다. 망명 정부들은 본국의 저항 조직들을 동맹자가 아니라 골치거리로 여겼다. 전시 저항단체들도 마찬가지로 망명정부에 대한 의혹을 갖고 있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귀환정부는 5년간 떠나 있었던 까닭에 나치 점령기에 국민이 겪는 고초와 국내 사회 분위기를 변화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귀환 정부들은 드골이 생각한 <질서 있는 이행>을 고집. 동유럽에서 전후 정부 형태의 결정은 소련이 했고 서유럽에서 저항운동 단체는 예외없이 무기를 반납하고 조직을 해산. 이와 같은 제도적 현상 회복에 대한 저항은 놀라울 정도로 적음
- 서유럽에 의회제도가 회복되는 것에 찬성했던 소련의 전략은 저항 운동의 해산을 크게 촉진했다. 전후에 <레시스탕스 당>을 세우려던 계획은 어디서나 실패했다. 그래서 종전 직후 대다수 유럽인들을 통치한 것은 1930년대의 인민전선과 유사한 좌파와 중도좌파 정치가들의 동맹이었다. 그러나 저항투사나 정치가나 한가지 점에서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전후 유럽의 정치적 종교였던 <계획>이었다
- 두 대전 사이의 재앙, 1929년의 주식시장 붕괴에 뒤이은 대공황, 실업으로 인한 낭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독재의 유혹을 안겨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부정과 비효율, 거만한 통치 엘리트와 무능한 정치권의 뻔뻔스러운 무관심, 이 모든 것은 사회를 보다 좋게 계획적으로 조직하는데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처럼 보였다.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그 매력을 회복하려면 민주주의 체제는 계획되어야만 했다. 소련의 계획 경제는 표면상 자본주의 유럽의 상처를 피했고 나치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일련의 상세한 5개년 계획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견해가 있음.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완전한 오해.
- 1945년 극적인 선거결과로 처칠의 보수당에 패배를 안긴 영국 노동당 지도자 클레먼트 애틀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계획해서 훌륭하게 건설한 도시와 공원, 운동장, 집, 학교, 공장, 상점> 광산과 철도, 운송, 공익사업 시설 등에 대한 국유화와 의료 서비스의 제공은 1945년 이후 노동당 강령의 핵심. 정부지출이나 종사자 숫자로 측정할 때 대부분 서유럽 국가에서 공공부문은 급속하게 성장. 1946년 프랑스 전체 산업 생산 능력의 5분의 1이 국가 소유. 체코의 경우 전체 제조업 산출량의 약 75% 국유화
- 전후 유럽 대륙에서 계획의 주된 목적은 공공 투자. 경제 회복의 댓가로 부득이 <내핍>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 정치적 귀결은 1947년 프랑스는 이탈리아처럼 파업과 폭력 시위, 공산당과 공산주의 노조에 대한 지지의 꾸준한 증가로 위기를 맞음. 전후의 회복전략이 성공하려면 경기 침체와 불황, 보호 무역주의 그리고 특히 실업으로 되돌아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했다. 현대 유럽의 복지국가가 탄생한 배경에도 동일한 동기가 숨어 있었다.
- 1948년 이후 동유럽 공산당 정권들은 보편적인 복지제도에 일반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으며 진정한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가장 야심적인 노력을 기울인 나라는 영국. 이러한 상황은 어느 정도 1945년 7월 선거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영국 노동당의 독특한 위치를 반영함. 전후에 이루어진 영국 사회 입법의 토대는 윌리엄 비버리지 경이 전쟁중엔 작성한 보고서. 비버리지 보고서는 1939년 이전 영국 사회의 불공평에 대한 고발장이었던 동시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철저한 개혁을 위한 정책지표가 됨. 비버리지의 전후 복지에 관한 네 가지 가정은 그 전부가 다음 세대동안 영국의 정책으로 흡수됨. 공공의료 서비스, 적절한 국민연금, 가족수당, 완전 고용.
- 프랑스가 사회복지에 들인 비용은 1938년 국내총생산의 5%에서 1949년 8.2%로 64% 증가. 서유럽의 복지국가는 정치적인 분열을 야기하지 않았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취지는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느낀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수혜를 입은 자들은 전문직과 상인들로 구성된 중간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은 이전에는 대체로 직장과 관련된 보건급여나 실업급여, 퇴직급여의 수혜대상자가 아니었다. 유럽의 복지국가는 사회계급을 분열시켜 상호간 적대하게 만들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긴밀하게 결합시켰고 따라서 복지국가의 보존과 방어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다.
-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럽의 가장 절박한 딜레마로 보였던 농업 개혁. 농촌 주민이 여전히 압도적이었던 유럽에서 대다수 농민은 부채를 떠안고 가난하게 살았다. 가장 큰 요인은 부재지주와 농산물 가격 하락. 개혁의 목적은 농지 재분배와 효율적인 생산 기회 제공. 루마니아-100만 헥타르의 토지를 빼앗아 60만명 농민에게 배분. 헝가리-국토 3분의1에 해당하는 토지 몰수. 1944년에서 47년 사이에 모든 동유럽 국가에서는 새로운 정권의 은혜로 토지를 얻은 대규모 소농계급이 창출. 그러나 몇 년뒤 공산당 정권의 집단 농장 추진 과정에서 재산을 빼앗김. 그동안 폴란드, 동프로이센,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지주와 부농계급 전체가 완전히 소멸
- 주요 제도적 개혁에 대해 임시 의회나 제헌 의회는 대체로 좌파에 치우쳤다. 서유럽 공산당들이 처음에 사용했던 정치적 수단은 사회주의 정당과 연합하는 것이었다. 1945년에서 48년 사이의 선거에서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의 사민당은 38%에서 41%까지 득표함. 그렇지만 영국과 북유럽 국가들을 제외하면 공산당과 사회당의 <옛 좌파>는 결코 단독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서유럽에서 결정권을 쥔 것은 언제나 정치권에 새로이 출현한 기독교 민주당이었고 대체로 그들이 지배했다. 기독교 민주당은 여성표의 주된 수혜자. 사회당과 공산당의 어법은 가장 순화된 형태로도 폭동의 논조를 쉽게 버리지 못했던 반면 저명한 기독교 민주당원들은 언제나 화해와 안정을 강조함.
- 기독교 민주당은 계급에 근거한 호소를 삼가는 대신 사회적 도덕적 개혁을 강조. 특히 가족의 중요성을 역설. 종전 직후의 기독교 민주당 당원들은 좌파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주적으로 간주했으며 현대국가가 비사회주의적인 형태의 자선적 개입에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쎴다. 그결과 이탈리아와 서독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이 향후 오랫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정권을 거의 독점했다. 기독교 민주당 지도자들은 처칠처럼 구세대의 인물들. 그러나 서유럽을 재건한 노인들은 연속성을 대표함. 대다수 사람들이 염원했던 것은 확실히 사회적 진보와 회복이었지만 이는 안정되고 익숙한 정치형태에 대한 확신과 결합되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정치화와 과격화라는 효과를 가져왔다면 뒤이은 제2차 세계대전은 반대의 결과, 즉 정상 상태를 바라는 동경을 낳았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정치적 안정과 사회개혁의 전망은 무엇보다 그 대륙의 경제회복에 달려 있었다. 런던 350만채 주택 파괴, 바르샤바 전제 주택의 90% 파괴. 독일 주택의 40%, 영국 30%, 프랑스 20% 사라짐. 피해가 두드러진 두번째 영역은 운송. 사람과 건물은 큰 손실 입었던 반면 공장과 물품은 상대적으로 보존되었고 그래서 1945년 이후 핵심 경제 부문은 의외로 신속하게 복구됨. 기계공업은 전쟁중에 번창. 아일랜드와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 스웨덴은 모두 분쟁 중에 중립 유지. 중립국들은 데부분 간접적으로 독일의 전쟁 수행에 깊이 연루. 예를 들어 스웨덴은 역사적으로 독일에 석탄에 의존하고 독일에 철광석을 수출. 스웨덴의 중립은 러시아의 야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랫동안 독일로 기움.
- 당대의 관찰자들이 보기에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독일의 회복 능력. 히틀러가 사망한 날 사용 가능한 독일 철도는 10%. 그러나 1년 후인 1946년 6월 기찻길의 93% 복구되고 800개의 교량이 다시 건설. 전시 독일이 가장 많이 투자했던 산업들(광학, 화학, 기관차 제조, 운송 수단, 비철 금속)은 1950년대의 호황의 토대가 되는 산업들.
- 1947년 봄 유럽은 벼랑끝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생계 위기와 경제적 고난은 유럽의 절망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그 결과 공산주의의 호소력이 커지고 무정부 상태로 추락할 위험성도 높아짐. 1947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은 90만7천명.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원은 225만명으로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보다 더 많았음.
-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의 유럽 부흥 계획 즉 마셜 플랜은 1947년 6월 하버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공개. 그때까지 미국의 원조는 재건이나 장기적인 투자가 아니라 필수적인 식량, 서비스, 보수에 투입. 마셜의 제안은 미국의 원조 수용 여부와 어디에 쓸것인지 결정은 유럽인에게 맡김. 자금의 관리에 있어서 미국인 고문과 전문가들이 역할. 원조는 수년간에 이루어지며 재난기금이라기 보다는 복구와 성장을 위한 전략적인 계획. 1952년 먀셜 원조 종결까지 미국이 지출한 액수는 약 130억달러.(2004년 기준으로 약 1천억 달러). 미국 의회는 마셜 원조가 소련의 팽창을 가로막는 경제적 장벽이라고 믿음. 원조는 서유럽에 국한되었고 둘로 쪼개진 유럽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이정표가 됨
- 마셜 원조는 단순히 현금을 지원하는 대신 물자의 무료 공급을 제안. 원조를 받는 유럽 국가들이 각각 4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따라 매년 필요한 양을 요구하면 그만큼의 물자를 전달하는 방식. 정부와 재계, 노동조합은 서로 협력하여 생산 속도와 그 속도를 촉진시킬 조건들을 계획해야 했다. 특히 원조 계획은 두 대전 사이에 경제를 그토록 방해했던 과소 생산, 공멸하는 보호 무역주의, 무역 붕괴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했다. 또한 마셜 플랜은 유럽을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주요 교역 상대국을 되찾아줌으로써 미국에 이득을 가져다주게 된다.
- 유럽과 유럽인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는가? 30년에 걸친 잔학한 유럽 내 갈등으로 대륙의 운명은 변방의 거대한 두 나라, 미국과 소련에 넘겨졌는가? 소련은 그러한 가능성을 기꺼이 기다렸다. 1947년 4월 중앙정보국 보고서 <미국의 안전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서유럽 경제의 붕괴 가능성과 그에 뒤이은 공산당의 권력 장악이다>
- 유럽 부흥 계획은 얼마나 성공했는가? 서유럽은 정확히 마셜 플랜 시기(1948~1951)에 뚜렷하게 회복. 1947년에서 1951년 사이에 서유럽 국민 총생산의 총합은 30% 증가. 단기적으론 달러 신용의 공급이 기여. 실질적인 혜택은 심리적. 마셜 플랜은 실제로 유럽인들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줬다고 말할수 있음. 만일 마셜 플랜이 유럽의 <미국화>의 청사진으로 제시되었다면 이중 어느것도 가능치 않았을 것
4장. 불가능한 해결
- 처칠이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주하며 <비율 협정>에 서명-영국과 소련은 전후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를 50대 50의 원칙으로 통제하기로 합의. 루마니아는 90% 불가리아는 75% 소련의 통제를 받으며 반면 그리스는 90% 영국의 통제. 남동부 유럽에서 전쟁은 1944년 말에 소련군이 발칸반도의 북부를, 1945년 5월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소련군은 헝가리와 폴란드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대부분을 해방하고 재점령함.
- 미국은 독일의 공격 덕분에 처음으로 유럽 내에서 강대국이 됨.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전시에 두배로 증가했으며 1945년 봄 미국은 전 세계 제조업 생산 능력의 절반, 식량 공급의 대부분, 국제 재정 적립금의 거의 전부을 책임짐. 미국은 1200만명을 무장시켜 독일과 그 동맹국들과 싸우게 했으며 일본이 항복할 무렵 미국의 함대는 전 세계의 모든 함대를 합한 것보다 컸음. (미국이 통제하는) 독일을 사실상 전 산업 사회 상태로 되돌려 놓아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미국의 독일 문제 처리에서 균형이 <평화>쪽으로 점점 더 기울었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미소 관계의 전망이 어두웠기 때문.
- 두 대전 사이의 경제적 붕괴는 특히 미국인들에게는 유럽 그리고 세계 위기의 근원으로 보였다. 통화가 태환되지 않고 국가들이 무역 확대에서 서로 이익을 얻지 못하면 1931년 9월의 나쁜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케인즈의 주장에 따르면 금본위제보다는 약간 덜 엄격하고 변동환율제도보다 더 믿을만하고 서로를 더 잘 유지하는 것으로, 국내경제의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하는 일종의 국제은행이 그 제도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기관이 고정환율을 유지하는 동시에 외환거래를 장려 촉진해야 한다. 이것이 브레턴우즈 합의의 본질이다. 미국 돈으로 국제통화기금이 설립되었다. 국제무역기구의 창설이 제안되었고 이 제안은 1947년 관세무역일반협정GATT로 실현.(나중에 세계무역기구WTO로 바뀜)
- 런던의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의 목적은 독일의 패배였다. 그러므로 만일 동유럽에 소련 종주권이 확립되는 것이 독일의 패배를 얻는 대가라면 어쩔수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영국은 유럽 문제를 여전히 세력 균형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영국 외무부의 윌리엄 스트랭 <독일이 서유럽을 지배하는 것보다 러시아가 동유럽을 지배하는게 더 낫다> 영국의 진정한 두려움은 독일까지도 소련이 그 세력권에 포함하여 대륙 전체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데 있었다. 그런 일을 방지하려면 1944년 가을 영국 참모본부가 추정했듯이 독일을 분활하여 그 서쪽지역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 영국은 미국이 그들의 대륙으로 후퇴하기를 원한다고 의심했던만큼 자신들도 섬으로 물러나고 서유럽의 안전은 전통적인 수호자인 프랑스에 맡겼을 것이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프랑스는 중부 유럽에서 대한 독일의 야심뿐만 아니라 소련의 위협에 맞설 대항마가 될수 있었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강대국을 떠나 강국조차 아니었고 훗날 드골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어도 결코 강국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함.
- 소련군은 독일의 침략을 받은 후 첫 여섯달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소련군은 병력 400만명, 항공기 8천대, 전차 1만7천대를 잃음) 1945년에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을 지닐 정도로 회복됨. 1946년 내내 헝가리와 루마니아 두곳에만 약 160만명의 소련군이 주둔. 스탈린은 분명히 소련의 핵무기 보유를 원함. 그래서 소련은 독일의 동부지역과 특히 우라늄 광상이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제하겠다는 주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 소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 제도를 고집한 것은 새로운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 전후 소련의 동독 점령을 연구한 역사가 노먼 네어마크 <소련을 움직인 것은 사전에 수립한 계획이나 이데올로기적 명령이 아니라 점령 지구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결론이 우리가 스탈린의 일반적인 방식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하며 동유럽 밖의 사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독일 경제를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소련이 그 점령지구 밖으로 재화와 용역, 금융자산을 이전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소련 당국은 처음부터 다른 점령국들의 동의가 있든 없든 주저없이 독일의 공장과 설비를 해체하여 이전했다. 미국과 영국의 군사정부가 점령한 독일 지역에서는 민간 제도와 정치제도를 복구하여 독일인들에게 국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맡겼다.
- 1948년 2월 영국, 프랑스, 미국 세 나라는 런던에 모여 마셜 플랜을 서독까지 확대하고 서독 국가의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기로 합의. 소련은 서방 강국들이 베를린에 주둔하여 동독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라 주장하며 정식으로 항의. 유럽의 진정한 냉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과 유럽이 분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스탈린의 실수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스탈린은 통합된 독일이 중부 유럽의 허약한 중립국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중부 유럽에서 스탈린은 비타협적인 완고함과 대결 전술로 유리한 상황을 망쳐 버렸다. 독일이 붕괴하도록 내버려 두기를 원했다면 이는 중대한 오산이었다. 유럽의 냉전은 소련 독재자의 인성과 그가 통치하던 체제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