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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라고 할 수 있는
허 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의 서두의 내용을 번역한 글이다.
도문대작이란(屠; 죽이다, 門; 문, 大; 크다, 嚼; 씹다)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쩍쩍 다신다'라는 뜻이다.
[우리 집은 비록 보잘것없고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사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예물로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어릴 때는 진귀한 음식을 갖추어 먹을 수 있었다.
또 자라서는 부잣집의 사위가 되었기에, 땅이나 바다에서 나는 온갖 음식을 다 맛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병화를 피해 북방으로 피난 갔다가, 강릉의 외가로 돌아와,
그 지역의 특별하고 기이한 음식을 두루 맛보기도 하였다.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 뒤로는 남북으로 벼슬을 옮겨 다니며, 입 안에 이런저런 음식을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음식이라면, 고기라면 먹지 못할 것이 없었고, 나물이라면 씹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요, 특히 먹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 관계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옛날의 성현들이 먹고 마시는 일을 천하게 여겼던 것은, 먹는 것을 탐해 이익을 좇는 일을 경계한 것이지,
어찌 먹는 일을 그만두고 음식에 관한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이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여덟 가지 진귀한 음식을 어찌하여 ≪예기≫에 기록하였으며,
무엇 때문에 맹자가 생선과 곰발바닥 요리를 구분하여 말했겠는가.
내 일찍이 나는 하씨의 ≪식경≫과 순공의 ≪식단≫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천하의 맛을 다 보아, 풍성하고 사치하기가 그지없었다.
책에 실린 음식 종류가 일만 가지나 헤아릴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름만 아름답게 붙여 현란하게 꾸몄을 뿐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외진 곳에 있지만. 큰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높은 산이 솟아 있어 물산이 또한 풍부하다.
만일 하씨와 위씨의 방식으로,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음식을 구별한다면, 아마도 역시 일만 가지는 될 것이다.
내가 죄를 짓고 바닷가로 유배 갔을 때는, 쌀겨조차도 올라오지 못했다.
밥상 위에 반찬이라곤 썩은 뱀장어나, 비릿한 생선이나, 쇠비름이나 미나리뿐이었다.
그나마 하루에 겨우 한 끼를 먹다 보니, 저녁이 되면 배가 고팠다.
그때마다 예전에 산과 바다의 진귀한 음식을 먹다가, 싫증 나서 내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입안에 침이 흐르곤 하였다.
다시 먹어보고 싶었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서왕모의 복숭아처럼 아득히 멀리 있으니,
내가 동방삭이 아니고서야 어찌 훔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종류별로 음식을 나열해 기록하고, 때때로 보면서 고기 한 점으로 여기려 하였다.
쓰기를 마치고 제목을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시며’라고 붙였다.
이는 세상에서 벼슬이나 명성을 날리는 자들이 먹는 것에 너무 사치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려 함이다.
또 부귀영화가 영원할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경계하려 함이다.
신해년(1611) 4월 21일, 성성(惺惺) 거사가 쓰다.]
< 출처: 신영산, 국어선생으로 살기 >
도문대작(屠門大嚼)은
1권 1책으로 1611년(광해군 3년) 허균이 귀양지인 전라북도 함열(咸悅)에서
기존의 초고와 기억을 토대로 엮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 26권 중 제26권이다.
음식의 종류별로 병이류(餠餌類) 11종, 과실류 30종, 비주류(飛走類) 6종, 해수족류(海水族類) 40종,
소채류 25종, 미분류 5종 등 총 117종의 식품에 대한 분류와 명칭, 특산지, 재배 기원, 생산 시기, 가공법,
모양, 맛 등의 내용을 몇 가지씩 기록하고 있다.
비록
본문이 아닌 서두이긴 하나
가만히 읽다 보면
허균의 개인 일기를 옆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아 친근스럽고
'하늘나라에 있는 서왕모의 복숭아처럼'이라는 지점에서는
허 균은 외교관으로 중국을 오가며 1600년,
그때 벌써 에덴동산의 복숭아를 얘기하듯이
역사적으로 정조대왕시절에나 나오기 시작하는
천주학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품평서라고 할 수 있는
도문대작(屠門大嚼)의 저작(著作)은
모반 혐의로 국문을 당하기 전
외손자인 이필진(李必進)에게 보내져 보존되었다고 한다.
첫댓글 맞습니다.
그래서 먹을때는 눈치 보지 말고 먹아야 하는 것이지요.
맛있는 음식이 조금씩 접시에서 사라질 때 눈치게임 하지 말고 덥썩 내 뱃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