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수치를 양산하고 있는가?
허만
현 정부는 명예 또는 실용성보다 수치를 더 선호하는 듯 한 일련의 정치결정(decision-making)하는 것 같다. 왜 그러할까? 최근 일련의 정치적 행위를 볼 때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하다.
한 예로서 청와대에 근무했던 고위 공직자들의 공직 자세는 윤리 도덕을 떡 주무르듯 짓밟아버렸다. 조국의 공문서 위조 행위, 최강욱의 공문서 위조 방조 행위, 그리고 전 청와대 대변인의 부동산 투기 등은 윤리 도덕을 짓밟음으로써 우리에게 수치를 안겨 준 전형적 사례들이다. 청와대의 중간급 관리들이 2018 지방 선거에 대한 노골적 개입을 함으로써 지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 불법 개입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문재인 대통력의 취임식 연설을 스스로 짓밝는 행위다. 지금 대통령과 집권당에 부매랑이 되고 있다. 천안함 폭침사건 10주기 기념행사에서 한 유가족노파가 폭침 주동자가 복한이냐는 질문에 " 정부 공식 입장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얼마무리는 답을 함으로써 유가족 전체에 또 다시 분노를 사게 했다.
다음은 한 개인의 일탈 행위로서 또 다른 수치의 모습을 보였다. 조주빈이 성착취물을 제작하여 불법으로 돈을 모은 것이다. 그 행위를 하면서도 고위 인사들을 사칭하기도 하고, 그의 은사의 딸 살해 협박도 하는 등 희대의 엽기적 행위를 했다. 법율계는 과거부터 이러한 행위에 대한 ‘솜방망이적 형벌’을 내렸다는데에 자기반성의 목소를 내고 있다. 미국에서 이러한 엽기적 행위가 일어났다면 수백 년간의 감옥 살리 처벌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진압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방역 과정에서 국민을 비롯한 우리의 의료진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자기희생적 자세로 진압하는 성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노브래스 오브리즈(nobless oblige)가 우리 사회에서 부족하다는 목소 소리가 나왔지만 그와는 다르다. 자기 헌신적 봉사의 표본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정치인들, 특히 대통령을 비롯한 소수의 고위 관리들은 안이한 대처 방안을 내놓고 있다.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라고 한 대통령, 바이러스 유입을 중국인보다 한국인에 책임이 더 있다는 듯 한 발언을 한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교포들의 입국을 적극 지원해야 하지만, 외국인들의 전면적 입국 저지에 초기에 임했어야 할 외교부 장관의 안이한 자세 등 이 모든 행위는 명예와 실용성은 왜면한 우리의 수치를 보인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는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의 바이러스 하향곡선을 보이자, 시진핑은 바이러스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조사해야 한다는 외교적 공세를 벌서부터 취하고 있지 않는가? 이 공세에 이어 최근 미 국무장관 폼페이오 그리고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양제츠는 전화 통화로 코로나 바이러스 발원지에 대해 열띤 공방을 전개했다. 양재츠는 “중국의 방역 노력을 부단히 헐뜯고 욕하며 중국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를 계속해 중국 인민의 강렬한 분노를 사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이와는 반대로 시진핑은 82개국에 의료품과 의료진을 파견해 협력함으로써 국제정치에서 중국의 위상을 다시 세워 중국의 명예와 실용성을 과시하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동시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중국 발원지란 오명을 희석시키는 의도를 엿 볼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는 중국식 소프트 파워 외교를 지금부터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 이스라엘, 모리셔스와 같은 나라는 초동 단계에서 엄격한 입국 제한 조치를 단행하여 최저 수준의 바이로스 확산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온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극소수의 감염자외 이들 국가는 안전 지대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정부에 대해 처음부터 이러한 수준의 출입국 관리를 요청했다.
다음으로 한국의 정당의 급조 현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총선을 불과 한 달 남겨 둔 채 정당이 급조돼 의원 후보를 내는 것은 말 그대로 정당정치의 後進性(미성숙 단계)을 들어냄으로서 또 다른 차원 수치를 양산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주요 정당들의 역사가 대체로 100년에서 300년이 된다. 안정된 뿌리를 내리고, 그 기반에서 정치 노선 (정치적 특색)에 따라 유권자들에게 표를 호소하는 민주적 정치 문화를 키웠다. 우리의 정당 정치 문화는 이와는 너무나 떨어지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여야는 비례위성정당을 꾸며서 의원을 꿔주는 엽기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쓰레기 정당’, ‘후안무치한 정치’, ‘꼼수정치’라면서 서로 헐뜯고 있다. 오직 의원 수 하 나 더 늘리려는 정치 공작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번 총선은 ‘친 조국 선거’ 대 ‘반 조국 선거’라는 괴이한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우리 정치 문화의 수치를 말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정당의 출현은 협치(연합정치)를 가능케 하는 정치의 다원성을 만드는 좋은 계기를 제공할 것이라는 樂觀論을 펼 것으로 보지만, 이는 한국 정당정치의 본질을 호도하려 의도에 지니지 않는다. 牽强附會에 지나지 않다.
본래 정치의 뜻은 동양에서는 政은 正(政者正也)으로 표현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정치를 最高善我의 실현을 의미한다. 현대에 와서는 정치는 公共善( 더 큰 가치의 추구)의 추구라고 더 자주 표현된다. 이러한 뜻에서 볼 때 현대 우리 정치인들이 하는 비례위성정당을 급조해 후보를 내는 것은 완전히 일탈된 행위로서 정치 문화의 수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 따애서 이러한 정당 문화가 지속하는 한 政治發展을 기대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