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 서일장군의 무장투쟁현장을 답사하며 독립운동사는 힘있는자들에 의해 변조되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나는 원래 민족문화를 연구하면서 원.방.각을 검색하다가 처음 백포 서일 장군을 만났고 후에 삼일신교와 구변도설을 서일장군이 투쟁현장에서 기록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1911년 게연수선생이 편집한 환단고기를 홍범도, 오동진장군이 출연하여 30권을 발간하였다는 사실을 접하고 백두산 뒤에 천부경을 세운 나철선생의 대종교를 다시 알아보았습니다.
백포 서일 종사는 함경북도 경원 태생으로 경술 국치후에 대종교 총본사가 화룡현으로 이동하자 동만주 왕창현에서 대종교에 입교한 분입니다. 서일 종사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직접 항일무장투쟁에 나섰으며 후에 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되고 후에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리 독립투쟁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를 김좌진 장군이 지휘했다는것을 모르는 이는 없어도 백포(白圃) 서일이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재였음을 아는 이는 별로없습니다.
1919. 3.18거사가 일어나고 봉오동. 청산리투쟁에서 대패한 일본이 대대적으로 독립군토벌을한 경신참변을 피해 러시아 국경 밀산현 담벽진으로 주력부대를 이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 취임. 이때 김좌진부대는 가지않고 민간인 약탈. 자유시로 간 이청천 오관선 안무 부대가 러시아군에의해 해산 되기도 하였습니다. 서일은 정세를 관망하며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여 병력을 기르려 했으나 마적의 습격으로 근거지를 파괴당하고 부하들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그는 1921년 8월 1921년 8월 27일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고 대종교 3종사가 화룡현에 뭍였습니다 .
그길을 더듬어 아직은 다 말 할수없는 숙제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혹 기회있으면 나눔의 시간도 갖고십습니다. 뜬돌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