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죠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하아신스의 죽음] 1752-1753 G.B.Tiepolo [The Death of Hyacinth] 캔버스에 유화 ㅣ 287×235cm ㅣ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마드리드
서양미술사에서 동성애는 반복적으로 다루어진 주제의 하나였다. 대표적으로 동성애는 히아신스(Hyacinthus/Hyacinth)와 가니메데(Ganymede)라는 두 아름다운 젊은이를 그린 그림과 관련이 있다. 많은 화가들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기초하여 아폴로와 히아신스의 일화를 그림으로 남겼다. 위의 티에폴로 작품도 마찬가지다. 아폴로의 사랑을 받는 미청년 히야신스는 창백한 모습으로 대지에 죽어 누워있으며, 아폴로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에 충격받은 모습으로 비탄과 애도에 잠겨 있다. 주검 주변에는 히야신스의 죽음으로부터 피어난 미청년을 상징하는 히아신스 꽃이 보인다.
아폴로의 연인 - 미소년 히아신스의 죽음

티에폴로는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화가이면서도 주제를 다루는 스케일, 방식에 있어 바로크적 특징인 장려함을 유지했다. 그는 신화적 캐릭터들을 현세적으로 번안해 귀족적 고결함의 특성을 입혔고 현실 인물에는 영원한 신화적 위엄을 부여했다. 티에폴로의 고전적 특성은 미청년 히야신스의 조각적인 몸의 처리에서 두드러진다. 관객은 탄식하는 아폴로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부신 육체에 우선적으로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폴로는 손을 들어 보이며 비탄과 놀라움의 몸짓을 하고 있는데, 그의 손 뒤편에는 팔이 부러진 모습의 조각상이 있다. 마치 악마처럼 염소같은 뿔이 나있는 이 조각상은 니콜라 푸생의 [판의 승리](1636)에 나오는 사티로스 판의 조각 혹은 ‘프리아포스 제의’를 나타낸 옛 판화에 나오는 팔다리가 절단된 프리아포스 조각상과 그 형태가 유사하다. | |
조각상의 정체가 판이든 프리아포스든 이 도상은 디오니소스 제례의 무절제한 충동, 상실된 대상에 대한 시원적인 애도를 나타낸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대상을 영원한 상실로 데려가기 마련이다. 또한 푸생의 그림 [판의 승리]에서 처럼 통상 디오니소스 제례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사티로스 판이라든지 프리아포스 조각상은 남근(팔루스, phallus) 자체로 간주되기도 했을 정도로 생식, 다산과 관련이 있다. 티에폴로의 그림에서 팔이 잘린 이 조각상은 비극적 사건을 바라보는 증인 역할을 한다. 동시에 화면 왼편의 사람들과 함께 건축요소의 일부로 사건을 둘러싸면서, 애도하는 아폴로와 히아신스의 죽음을 감싸안고 있다. 따라서 조각상은 사건에 대한 애도적 의미를 암시하며 아폴로의 동성애적 욕망이 중단되어 버렸다는 점을 나타낸다. 한 줄기 불어온 바람, 그 바람에 의해 방향이 뒤바뀐 원반에 의한 예기치 못한 죽음. 우연적 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터무니없이 죽음을 당한 히아신스의 주검은 태양처럼 무한한 사랑의 방사이자 합리적 이성을 상징하는 아폴로가 가진 욕망의 한계점을 의미한다. 아폴로의 욕망이 끝나버린 그 지점에 눈부신 미청년의 주검이 놓여있는 것이다. 마치 아폴로의 사랑이 슬픈 모습으로 현현한 것처럼 부패하지 않는 영원한 예술의 모습을 하고 말이다.
아폴로가 던진 원반에 맞아 숨진 히아신스

신화 속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리스 신화에서 미청년 히아신스는 스파르타의 왕 디오메데스와 아미클라스 혹은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에서는 마케도니아왕 피에로스와 클리오의 왕자로 등장하는 잘 생긴 젊은이다. 그는 태양신 아폴로와 원반 던지기를 하며 놀았고 토론을 벌이며 계곡과 언덕을 거닐곤 했다. 어느 날 아폴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원반을 던졌고 히아신스는 원반을 잡으러 달려 나갔다. 그러나 바람이 원반의 방향을 바꿔버렸고, 히아신스는 연인이 던진 원반에 맞아 땅 위에 쓰러져 죽는다. 아폴로는 친구의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를 꽃으로 변형시켰으며 너무나 슬픈 나머지 히아신스의 꽃잎 하나하나에 그리스어로 ‘아아 Alas’하는 탄식을 새겼다고 한다. 유사하지만 조금 차이가 있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는 살인의 범인을 명시하고 있다. 아폴로와 마찬가지로 히아신스를 사랑하게 된 서풍 제피로스(Zephyros)가 질투 때문에 원반의 방향을 일부러 바꾸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야기를 다룬 그림 속에서 히아신스는 언제나 잠들어 있는 듯 대지에 누워있는 미청년으로 묘사된다(미청년의 잠든 모습이라는 점 때문에 다음에 다시 다루겠지만 오로라와 엔디미온, 리날도와 아르미다와의 유사성도 암시된다). 티에폴로의 그림 속에서 놀란 모습으로 탄식하는 아폴로는 그의 상징물인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그림 속 사이프러스는 옛 서양에서 주로 무덤가에 심던 나무로 [햄릿] 중 ‘오필리아 죽음 장면’에서 언급되는 버드나무, 방부제격인 허브 로즈마리와 함께 죽음과 애도를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히아신스의 머리맡에 위치한 날개 달린 아기는 큐피드이며 큐피드는 아폴로와 히아신스라는 두 인물을 원으로 에워싸듯 감정적으로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림 전경의 라켓과 볼은 원반 던지기를 묘사한 신화의 내용을 화가가 자신의 시대에 유행한 스포츠로 새롭게 번역한 재미난 요소이다. 화가는 고대의 원반 던지기 대신 18세기에 유행했던 테니스를 등장시킨 것이다.
제우스의 술 시중을 드는 미청년 가니메데

히아신스와 함께 또다른 유명한 미청년인 가니메데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호메로스에 따르면 올림푸스의 신들은 트로이 왕자 가니메데를 연회 동안 술 시중을 들게하기 위해 올림푸스로 납치했다. 다른 버전의 신화에서는 어떻게 제우스가 이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 독수리로 하여금 그를 납치해오는지 언급하고 있다. 때문에 가니메데는 주로 독수리에 낚여 하늘로 오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가니메데는 술 따르는 시종이기에 고대에 술병으로도 쓰이던 그릇 암포라(amphora)를 들고 등장하기도 한다. 이 도상은 종교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의 중세 기독교적 번안인 [도덕화한 오비디우스 Ovid moralisée]라는 책에서는 가니메데를 복음사가 요한으로, 독수리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르네상스 인문학자들은 이 신화를 신에 의해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려지는 인간 정신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인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불완전한 사물의 상태에서 벗어나 완벽한 빛 상태인 ‘일자(一者)로의 회귀’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 |
루벤스 [가니메데의 납치] 1611~1612 캔버스에 유화, 203x203cm, 슈바르쩬베르르 궁전, 비엔나 |
렘브란트 [가니메데의 납치] 1635 캔버스에 유화, 171x130cm, 드레스덴 고미술관 |
그런데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가니메데는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었나? 일반적으로 가니메데는 신들에 의해 납치당해 술 시중을 들만큼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앳된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미청년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그린 가니메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쨍쨍하게 울어대는 보자기에 싸인 무력한 아기일 뿐이다.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의 움켜쥔 포즈도 어정쩡하다. 아기가 하늘에서 훌렁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렘브란트의 가니메데는 섹슈얼한 미청년의 의미보다는 모성애적 측은지심을 발동하게 만든다. 그 의미 역시 그리스 신화 자체에서보다는 [변신 이야기]의 기독교적 번안인 [도덕화된 오디비우스]에서 온 것이다. 이는 고대의 동성애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독수리에 의해 납치당한 가니메데는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영혼의 포획을 의미한다. 그렇게 본다면 가니메데가 울부짖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변형된 사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정으로 믿는 자는 엄마 잃은 아기처럼 그리스도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사랑과 영혼의 고양
서양미술사에서 동성애적 표상은 소수자의 정체성 문제에 관한 동성애 그 자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가니메데 신화의 기독교적 독해처럼, 동성애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도덕적, 감정적 요소를 지키면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묘사되었다. 즉, 동성간의 ‘우애에 가까운 사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정념이 강할 때에는 불가피하게 사랑의 충돌 내지는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성애가 정상으로 간주되는 현대와는 달리 고대 시대의 사랑은 보통 동성애적 사랑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과 [알키비아데스]에서 추남 소크라테스가 이름 높은 미남자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거절하는 장면에서 암시되듯이, 고대에 동성애적 사랑은 흔히 육체적 관계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에는 고대 사회에서 연장자이며 경험이 많은 남성이 젊은 연인을 사랑하고 돌보아준 사례가 기술되어 있다. 현명한 연장자는 스승으로서 ‘에라스테스 erastes’라 불리웠고 사랑받는 젊은 연인 ‘에로메노스 eromenos’와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에로스는 ‘절대미’에 이르는 영혼의 고양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러한 고대의 동성애 전통은 당시 널리 퍼져있던 여성 혐오증에서 유래했다. 당시에 여성은 노예와 마찬가지로 시민이 아니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남성의 동등한 상대로 간주되지 않았다.
| |
그러나 기독교 중세에 들어서며 동성애적 관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철저히 부정된다.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자는 부모, 가족을 버리라고 말하듯이 절도를 넘어서는 어떠한 형태의 애착도 금기시되었다. 기독교의 보편적 사랑이란 어디까지나 나와 유사하며, 같거나 비슷한 정체성을 지닌 ‘이웃’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특히 게이나 레즈비언과 같은 소수자는 유대인이나 이슬람 교도와 같은 타자적 이방인, 이교도 처럼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는 위험요소로 간주되었고 공공연히 추방이나 린치를 당해도 용인될 정도로 사회적 증오와 적대감의 투사 대상이었다. 이 같은 실정은 동성 결혼이 용인된 극소수 국가를 제외하고 현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학우애, 전우애 - 약한 강도의 동성애적 사랑

현대사회에서 높아지고 있는 동성애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소수자 문제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이분법적인 성 구분 너머로 관계의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은 학우애나 전우애와 같은 약한 강도의 동성애적 사랑이다. “나는 내 친구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거기엔 대개 어떤 ‘몸의 느낌’이 있다. 발레리나의 신체와 춤을 따로 분리할 수 없듯이, 친구를 사랑한다는 말 속엔 몸적인 느낌이 깃들어 있지만 그 느낌이 항상 육체 관계로 표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치 따로 연주되던 가락이 화음을 이루며 조화를 이루듯, 영혼의 전율과 떨림이 자연스럽게 정신적 진동으로 얽혀들어 간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어떤 형태의 사물일지라도 그 나름의 정신적 진동을 지니며 교감할진대 하물며 막역한 지우 사이야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감정, 정동(情動)도 어떤 몸적 정동(affection)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의 교차는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야 비로소 보인다. | |
사물에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가는 것은 그 형체를 분별하지 못하게 만든다. 적절한 거리 안에서만 대상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분별할 수 있다. 약한 강도의 동성애적 감정이란 올바로 보기 위해 선을 긋고 거리두기를 하는 자세와 같다. 즉, 현대에 빈번히 나타나는 동성애적 표상은 사회적 소수자나 고대의 관습 같은 규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리와 절도를 두려고 하는 금지선의 표식에 가깝다.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강렬한 사랑, 동아시아 전통 속 문인들 간의 우정, 전사들의 조국애와 죽음도 불사하는 우정, 인류애처럼 상식적인 통념을 넘어서는 지극히 강렬한 사랑 등이 모두 그에 속한다. 이런 종류의 이끌림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 존재하는 지극히 순수하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무엇이라 할 만하다.
이같은 동성간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라파엘로의 그림 [성모자와 세례 요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아기 예수와 아기 요한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 그림에서 마리아는 가난한 히브리 처녀가 아니라 당대 르네상스 시대의 참한 귀부인으로 세속화, 현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예수와 요한은 둘 다 아직 어린아이들로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존재다. 그들은 성처녀이자 어머니인 마리아의 보호 아래 순결하고 무구하게 만나고 있다.
예수와 요한의 표상처럼 매력적인 동성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face-to-face) 맞대면한 이 그림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혹은 가상적인 이상화된 동성 관계를 나타낸 것일 수 있다. 이들이 자라났을 때 요한은 죽음을 불사하는 예수의 사도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양미술 속에서 이상화된 형태이건 아니건 간에 동성간의 관계를 그린 그림은 게이,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적절한 거리를 둔 매혹 혹은 아가페로 변해가는 필로스적 우애와 충실을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지 물리적인 육체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정신은 성악가의 정신에 노래가, 무희의 몸에 춤이 잠재되어 있듯이,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육체 안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가 있다.
| |
|
|
히아신스와 가니메데를 다룬 그림에서 보이는 동성애적 사랑은 물론 육체적, 감정적 동요를 수반한다. 그러나 육체로만 한정되지 않는 관계, 죽음을 넘는 영혼 자체, 영혼의 진동으로 맺어진 동성적 관계의 표상으로 보인다. 또한 가니메데와 히아신스 주제의 그림은 모두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필연적 죽음으로 끝나는 슬픈 사랑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 강렬한 사랑, 동성애적 우애는 때때로 인간적 한계 너머의 삶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 |
관련링크 : 가니데메를 다룬 작품 히아신스를 다룬 작품
- 글 최정은 / 미술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및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책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 있다.
-
발행일 2010.09.01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