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날

[성병조]

                                                   기분 좋은 날

                                                                                                                                                             성병조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시원시원하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간단한 해결책 제시에 감동마저 여울져 왔다. 실타래처럼 일이 꼬여 비용과 시간이 꽤 소요될 것으로 우려되던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공무원의 친절이 이만큼만 된다면 어렵사리 바치는 세금을 그 누가 아깝다 이르랴.

회사소유 차량의 등록증을 분실하여 재발급받기 위해 직원을 구청 민원실에 보내게 되었다. 무더운 날씨에 두 번 걸음이라도 할까 봐 담당 공무원을 전화 연결하여 필요 서류를 꼼꼼히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도착해서는 일이 엇길로 나가고 있었다. 담당자를 바꿔 자초지종을 따졌더니 잘못 일러준 과오를 인정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자신의 불찰로 인해 야기된 일이라면 응당 다음 일이 제대로 풀릴 수 있도록 챙겨줘야 마땅한 게 아닌가. 여기서 내 모른다고 팽개친다는 건 어느 모로 봐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의 직장 생활도 어언 삼십여 년, 오랜 기간 대기업에 몸담아 닦은 경영수업 덕분에 회사 일이나 관공서 업무 면에 있어서는 스스로 프로임을 자부할 때가 많다. 보통 한 두 마디만 건네 봐도 공무원의 의식 수준을 어느 정도 가름할 수 있다. 민원인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애쓰는 봉사 자세의 공복이 있는가 하면 하루하루를 무사 안일하게 보내려는 복지부동 형의 공무원도 종종 만난다. 해결의 길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뒤로 미룬다거나 이런저런 구실을 갖다 대면서 미적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공무에 좀 밝다고 자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처럼 골탕을 먹이는데 힘없는 서민들이 당하는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몇 년 전의 일이다. 상거래 질서를 경쟁적으로 어지럽히는 업체 대표들을 불러 간곡히 협조 요청했지만 듣기는커녕 어찌나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든지 그중 몇 개 업소를 시범 케이스로 처벌한 적이 있다. 1차 서면경고, 2차 내용증명을 보내 시정을 엄히 촉구한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 하는 수 없어 구청 공무원과 경찰 조사를 거쳐 마지막으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제 임무를 다하지 않고 문서 전달내용을 은폐 내지 지연시키는 것을 정확하게 적발하여 처벌을 받게 하였다. 인간적으로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힘없는 서민들에게 안겨주었을지도 모르는 숱한 고통을 생각하여 징계위원회에까지 회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당 공무원은 자동차의 원적이 경남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회사 직원이 직접 경남에까지 가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믿기 어려운 말만을 되풀이한다.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며 재차 확인을 요구해도 대답은 한결같다. 별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아 우선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창녕군에 전화를 걸었다. 민원실 담당 여직원의 대답은 너무도 명쾌하였다. 대단한 일도 아닌 듯 알아듣기 쉽게 친절히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깊은 안도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인근 관공서를 방문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했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조차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서로의 신분만 확실하다면 관계서류를 창녕군으로 바로 우송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아 다시 제안했더니 두 말 않고 나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이게 바로 공복이 취할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이리저리 휘두르는 공무원의 술수에 고통받는 백성이 아니라 모처럼 주인으로서 제대로 대접받는 듯해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고마운 마음에 곧바로 그녀를 칭송하는 글을 창녕군청 게시판에 올렸더니 조회하는 사람이 꼬리를 물었다. 정작 주인공이라 할 담당자의 반응이 궁금하였는데 며칠 후 새로 발급한 자동차 등록증과 함께 예쁜 색깔의 편지가 동봉되어왔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결코 칭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공무원 생활 중 최고로 기쁜 날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것도 깨달았습니다.

저의 조그마한 성의가 모든 민원인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며칠 후 아내와 함께 내 고향 창녕군을 찾았다. 그녀가 언급한 친정과 시댁이 있는 곳을 가보고 싶은 충동이 그곳으로 향하도록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그 공무원의 향기에 흠뻑 젖어버린 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여름 장마로 무성해진 시골집 마당의 잡초나 뽑고 호박을 가꿀 요량으로 나선 길이 중도에서 그녀에게로 이끌리고 만 것이다. 시댁이 있다는 고암을 지나고 창녕읍 내를 경유하여 그녀가 태어나 자랐다는 계성에 이르자 화왕산 뒷자락에 위치한 관룡사 이정표가 나왔다. 계곡을 끼고 찻길을 달리면서도 어딘가 있을 법한 그녀의 마을에 대한 궁금증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십여 년 만의 관룡사행, 아니 한때의 친절에 매료되어 나선 나들이가 온통 한 여성 공무원에게로 집중되는 것은 어인 일인가. 친절이 귀한 시대에 모처럼 만난 친절이 이토록 큰 감동으로 다가올 줄이야... 관룡사를 굽어보며 천년을 한결같이 앉아있는 화왕산 끝자락 용선대(龍船臺) 부처의 자비처럼 말 없는 세상의 선행들이 온 누리에 잔잔하게 물결치기를 빌어본다.

[정임표]

공직에 앉아 끝발이나 부리려는 썩어 빠진 정신에 일갈을 가하는 시민의 기개를 널리 확산 시킴과 동시에 와 친절하고 능동적인 행정처리를 하는 창녕군 민원실 여직원의 아름다운 공복의 자세를 널리 알리는 일을 통해서 밝고 희망이 넘치는 민주시민 사회를 이루어 내려는 작가님의 정신과 사상이 높이 드러나는 멋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에 저도 창녕군에 가서 살고 싶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