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와 사성제
[출처] (사)대한불교 원융종 - http://wonyung.org/bbs/board.php?bo_table=wy_bul01&wr_id=71
(1) 사성제의 내용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노,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상,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둘째번 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 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四諦)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ac)와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同上經>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正思惟)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정념(正念, 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音譯語)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緣起)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장 십이 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正見)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 - 正念)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가모니
(2) 사과
사제 팔정도는 행하는 사람의 인격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관
첫째의 예류(srota-apanna)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身見,戒取,疑)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중아함 권 1. 水喩經>
둘째의 일래(一來, sakrd-agamin)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진,치(三毒心)의 셋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不還, an-agamin)은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身見,戒取,疑,貪,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
8. 해탈과 열반
(1) 열반의 의미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vimoksa, vimukti)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nirvana)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우리는 앞에서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십업설과 사제설을 살펴보았다. 먼저 십업설에서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계라면 십악업이 단절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십악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세 가지 의업(意業) 즉 탐욕(貪欲, 욕심),진에(성냄),치암(痴暗, 어리석음)의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다.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십업설에서의 궁극의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사제설에서도 팔정도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사과설(四果說)의 각 단계에서 단절되는 결박의 번뇌를 보면, 예류에서는 삼결(三結. 有身,戒取,疑)이 끊어지고, 일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진,치가 박약해지며, 불환에서는 삼결과 탐,진(五下分結)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탐,진은 물론 치까지도 끊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열반은 그러한 탐, 진, 치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치암(痴暗)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잡아함 권 18>
따라서 열반이란 개념은 십업설과 사제설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술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두루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열반이란 개념이 갖는 본래의 뜻은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 사용된 예를 보면 열반은 대부분이 사제설과 결합되어 있으며<잡아함 권 2>사제설이 지향하는 바는 무명의 망념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온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잡아함 권 15>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지고 있다. 혜해탈(prajna-vimukti)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질 때(俱分解脫)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이다. 그 곳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은 없다. "유위(有爲)에는 생주이멸이 있지만 무위(無爲)에는 생주이멸이 없다. 이것을 모든 행(行)이 적멸(寂滅)한 열반이라고 한다."<잡아함 권 12>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도 이런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오든 행은 무상하니 그것은 생멸의 법이다. 생멸을 멸해 버리면 적멸은 즐거움이 된다."<잡아함 권 22>
불교에 있어서 열반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설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을 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2) 열반의 바른 이해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적 인상은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탐, 진, 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교에서는 열렬한 구도를 위해서 재가(在家)보다는 출가(出家)를 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는 염세 종교라든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道)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과연 열반의 참다운 뜻을 이해한 것일까.
선과 악은 성질이 상반하므로 한 인간의 행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악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선은 있을 수 없고, 선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악이 있을 수가 없다. 선과 악의 이러한 상반성
그런데 불교의 열반은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악한 의업이 멸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 곳에는 무탐,무에,정견(無痴)의 세가지 선한 의업이 곧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의 언어적 표현은 비록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열반의 적극적 의미에 관한 이러한 해명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선과 악의 중간 상태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상태가 있을 수가 있으니, 열반은 바로 그러한 비활동적 중간 상태가 아니겠느냐고.
이런 견해도 불교의 십업설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러냐면 십업설에서는 선악의 중간 상태를 시설함이 없이 선악을 완전히 상호 대립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에서 십선업을 따로 시설함이 없이 십악업의 반대 개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가 있다. 즉 십선업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무탐(無貪), 무에, 정견(正見, 無痴)의 열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권 15> 따라서 십악업의 멸(滅)은 곧 십선업의 발생을 의미한다.
열반의 이러한 적극적 의미를 우리는 사제 팔정도에서는 더욱 뚜렷이 할 수가 있다. 팔정도가 완성된 아라한의 경계에서는 탐,진,치의 일체 번뇌가 영진(永盡)한다고 한다. 이것 또한 무탐, 무에, 정견의 발생을 의미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사제의 집제와 멸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각각 해당되는데 십이연기의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무명은 명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따라서 무명의 멸진은 곧 명(明)의 발생으로 전환하며, 우주적인 대아(大我)의 눈부신 활동이 거기에 전개될 것이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낭요(朗燿)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내가 사성제에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을 함에, 눈이 생하고 지(智)가 생하고 명(明)이 생하고 각(覺)이 생하였다."<잡아함 권 15> 열반의 적극적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또 인간의 사후에야 실현되는 경계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경전에도 석가모니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圓寂)이라고 한다.
반열반은 완전(pari-)한 열반이란 뜻이다. 사과(四果)를 얻은 사람의 죽음에도 그런 용어가 사용된 예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이라는 말이 이차적으로 전용된 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십업설에서 선업은 선취(善趣)에 악업은 악취(惡趣)에 수생(受生)한다고 설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생사에 결박하는 근본 무명을 단절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러한 사람에게 재생이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내생은 다했고 범행(梵行)은 섰으며 할 바는 하였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자증(自證)의 선언(記別)이 경전에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반열반은 바로 이러한 도인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열반이 죽음을 가리킬 경우는 이차적 전용에 의한 것이지 그 본래의 뜻은 아니다. 열반의 참다운 뜻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사로 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한은 현법(現法)에서 해탈한다고 설해져 있으며,
석가모니께서는 또 다음과 같은 교설을 베풀고 계신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함이란 어떤 것인가. 늙음,병듦,죽음을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잡아함 권 15>
모든 악이 멸하면 일체는 선이 되고 모든 사(邪)가 파(破)하면 일체는 정(正)이 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던 일체는 곧바로 상(常),락(樂),아(我)의 일체로 전환한다.
열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개, 생명의 약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http://www.etemple.net/srv/include/body.asp?pid=doctdt05 |
餘裕롭고 幸福한
나날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