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 2년(1033), 송 명도 2년ㆍ거란 중희 2년
○ 평장사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에 관방(關防)을 새로 설치하게 하여, 서해 가의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盈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만들었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천리장성 축조)
덕종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은 이름이 왕흠(王欽)이고 자가 원량(元良)이며, 현종의 장자로 모친은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현종 7년 병진년(1016) 5월 을사일에 태어나 같은 왕 11년에 연경군(延慶君)으로 책봉되었고 13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 거란으로부터 고려국공(高麗國公)으로 책봉되었다.
22년 5월 신미일에 현종이 죽자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한 후 익실(翼室 : 정전 옆 채)에서 조석으로 슬피 울었다.
갑술일에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장례 절차[成服]를 시작했다.
3년 9월 계묘일.
왕이 병석에 눕게 되자,
“짐의 병이 차도가 없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의 사랑하는 동생인 평양군(平壤君) 왕형(王亨)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는 유언을 내렸다. 이어 연영전(延英殿)에서 죽자 선덕전(宣德殿)에 빈소를 차렸다.
재위 기간은 3년이며 나이는 19세였다.
왕은 나면서부터 숙성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벽돌을 밟기만 하면 깨어지니 사람들은 그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호를 경강(敬康),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했으며 북쪽 교외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했다.
문종 10년(1056)에는 시호에 선효(宣孝)를, 인종 18년(1140)에는 강명(剛明)을, 고종 40년(1253)에는 광장(光莊)을 덧붙였다.
이제현의 논평
“충렬왕 때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가 지어 바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덕종께서 어찌해 네 해만 사셨던가? 봉황새도 날아와 상서를 보였건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니 그런 기사는 보이지 않고 다만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봉황새가 위봉문(威鳳門)2)에 날아와 춤을 추는데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따라와 조잘대는 바람에 봉황새가 날아가 버렸다. 백성들이 까마귀를 미워한 나머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활을 들고 쏘아대니 덕종이 재위했던 한 시대에는 개경에 까마귀를 볼 수 없었다.’
봉황새는 날짐승의 우두머리인데 한낱 까마귀 떼에게 쫓겨 갔다면 어찌 봉황새라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제왕운기』의 기록은 근거가 없는 듯하다.
덕종은 부친상을 치르면서 아들로서의 효도를 다했고 정치면에서는 부왕의 유습을 바꾸지 않았다. 또 부왕을 섬겼던 서눌(徐訥)·왕가도(王可道)·최충(崔冲)·황주량(黃周亮)과 같은 이들을 임용하니 조정에는 왕을 속이거나 잘못을 덮는 일이 없었고 백성들은 제각기 편안한 생활을 누렸다.
비록 봉황새가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호를 덕(德)이라 한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