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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근처를 지나가다 살펴보니 충효각(忠孝閣)이 낙후되어 조립식 판넬 건물로 볼품없이 언덕에 세워진 걸 보았습니다. 예전 충효각(충효려와 같은 말)은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2017년에 찍어 두었던 사진자료를 참고하고 예성춘추에 있는 내용을 옮겼습니다. 충효각 현판에 적힌 내용과 예성춘추 내용을 일일이 대조하였습니다.
예성춘추는 살펴보면 오자(誤字)가 많아서 수정하였고 현판에 새겨진 한자 일부도 고쳤습니다. 그리 무례(無禮)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건물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신 평택 임씨 종친분들의 명단(名單)을 옮겼습니다. 건물이 세워진게 사십년(43年)도 더 전의 일이니 이 분들 태반은 돌아가셨을 겁니다. 공사(工事)에 참여한 분들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런 부분은 지금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檀紀로 적힌 년도는 이해를 돕기 위해 西紀를 같이 표시했습니다.
건물이 세워진 건 1983년이고 현판에 새겨진 《정려중건기》記文은 1904년에 쓴 거로 되어 있고 조각도로 새겼습니다. 이 현판은 많이 낡았는데 액자만 바꾸어 갈아 끼운 것 같습니다. 벽에 걸었는지 못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예성춘추는 1959년 출판되었으니 이 《정려중건기》를 참고하였다고 봅니다. 끝부분까지 내용이 일치합니다. 건축내역과 기금을 낸 종친분들을 적은 《중수기》현판을 보면 단기 사삼일육(1983년, 癸亥)으로 적혀 있습니다.
예성춘추 p428~p430
林亨業 (忠孝閭)
字는 繼榮이라 하는데 折衝將軍 贈領中樞府事 林篁
의 第三子요、忠愍公 林慶業의 兄이다。 出生하면서 性品이 誠孝하여 忠養侍疾하니 世上에 稱誦(頌)이 藉藉하였다。 仁祖朝 丙子年(檀紀 三九六九年, 1636년)에 그의 兄 承業이 孟山守令으로 있었는데 胡亂으로 兵士를 거느리고 赴戰하니 公이 母親을 모시고 衙中을 지키는데 病患이 急激하니 손가락을 짤러 피를내여 입에 넣어서 蘇生케 하였으나 丁丑(1637년) 正月에 及其也 돌아가시게되어 日夜哀痛하여 맞이않는데 敵兵 百餘騎가 來襲하니 吏民이 모다 달아나버리고 亨業이 홀로 靈柩를 끼여안고 哀哭하며 피눈물이 비내리듯하니 敵兵이 참아 犯하지 못하고 나무를 깍아『 孝人不可害』 라고 五字를 써서 大門에 달고가니 그 뒤에 이르는 者들도 侵犯하지 아니하였으므로 先塋下에 葬禮를 지내고 侍墓三年 동안을 變치않고 한결같이 지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늙도록 家廟參拜를 날마다 廢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忠愍公이 大明大義의 奮發로 淸虜의 노염을 일으키여 壬午年(檀紀 三九七五年, 1642년)에 全家族이 瀋陽으로 잡혀갔는데 淸陰 金尙憲先生도 和親反對의 理由로 亦是 瀋陽에 拘禁되어 있었다。亨業은 金淸陰先生에게 우리는 皇明의 陪臣인데 其 恩惠가 罔極하거든 어찌 더러운 淸에게 무릅을 굽힐것이냐고 하니 金淸陰先生이 亨業의 손목을 잡고 그대는 참으로 義士라고 歎服하시고 내 그대와 同死하기로 誓約한다고 하였다。淸虜들이 무릅을 꿀고 빌기를 請하나 不肯하니 칼을 빼여들고 죽인다고 威脅한즉 내 배를 갈러서 내 마음을 보아라 어찌 너의들에게 屈服할 줄 아느냐고 呼令하는것이 凜凜하여 敢히 害하지 못하니 보는 사람들이 其 壯觀에 놀래지 않을 수 없었으며 敵도 그 義를 讚揚하여 害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때에 昭顯世子께서 瀋陽에서 從官諸人과 이 光景을 보시고 貞翼李浣大將이 其 事實을 記錄하였으며 尙書閔鎭厚가 忠愍公行狀記를 作成하는데도 이것이 記載되어 있는 것이다。
亨業이 도라와 甲申變(1644년, 明이 망한 것을 말함)을 當하니 慟哭自廢하고 杜門養病하다가 享年 七十六歲로 丙午(檀紀 三九九九年,1666년) 八月 十一日에 卒하였다。
正宗八年(檀紀 四一一七年, 1784년)에 命旌으로 達川에 忠孝閭를 세웠드니 年久歲深으로 傾圮하니 憲宗九年(檀紀 四一七六年,1843년) 癸卯에 丹月에다 公의 弟인 嗣業의 八世孫 穆鉉과 公의 九世孫 淳星의 功力으로 重建하였는데 其 旌閭文과 重建記는 다음과 같다。
<원문>
旌閭文
大明忠臣朝鮮孝子贈中直大夫司憲府持平平澤林亨業之門 崇禎紀元後 三甲辰 十一月 日 命旌閭
忠孝持平林公旌閭重建記
大明忠臣朝鮮孝子贈中直大夫司憲府持平平澤林亨業之門 昔在甲辰(1784년) 我 正廟朝 命旌而立于達川者也 歲久傾圮 以癸卯(광무 7년, 1903년)夏重建 于丹月 實公之弟宣傳公諱嗣業之八世孫 穆鉉 與其公之九世孫 淳星經紀孱功之力也 聖朝褒崇以彰之者既至矣 而後裔追理以圖其不朽者亦不容已也 嗚呼 公可謂遭遇 聖明而亦可謂余有後也 公諱亨業字繼榮折衝將軍 贈領中樞府事 諱篁之第三子也 皇明總兵 本朝節度使忠愍公諱慶業之兄也 公生有誠孝忠養侍疾世以黔婁稱當 崇禎丙子(1636년)公之兄諱承業宰孟山領兵赴戰公奉母夫人獨在衙中夫人病劇公斫指灌血獲甦者再 丁丑(1637년) 正月竟遭艱日夜號痛虜騎百餘突至搶掠 吏民鳥鼠散 公獨抱柩哀哭血淚雨下虜不忍犯遂斫木大書孝人不可害五字揚于門楣而去虜後至者皆不入既而歸葬先壠廬墓啜粥三年如一日
喪闋日拜家廟至老不廢忠愍公嘗奮 大明大義觸虜虜怒壬午(1642년)拘致其全家于瀋陽公亦在其中金淸陰先生嘗斥南漢和事亦被拘在瀋公泣謂淸陰曰 吾輩皇明陪臣也 又荷再造罔極之恩今豈可屈膝於醜虜乎
淸陰先生執手歎曰 子誠義士也 誓與同死
虜脅令公拜跪公不肯虜怒揮刃者數公大喝曰爾決吾腹視吾心其豈屈服於爾者乎 凜凜有不可犯見者莫不嘖嘖壯之虜亦義不加害時 昭顯世子在瀋館從官諸人所目見者而李貞翼公諱浣記其事閔尙書諱鎭厚作忠愍公狀亦載之公既得還繼値甲申變(1644년)慟哭自廢杜門養病以丙午(1666년) 八月十一日卒 享年七十六云 嗚呼 今日綱常墜地久尙何望其有春秋之大義乎使公之裔孫重建誠懇實能體公忠孝之心而奮激焉 則幷與其行路之過是門者觀感而興起矣 茲豈非 朝家所以勸來人者耶 公之旁裔珏鉉義鉉穆鉉令於綽楔之役亦周旋始終焉穆鉉俾茀億山人朴世和記之時
大明永曆二百五十八年 甲辰(1904년) 二月 十八日也
(記文成 穆鉉歾 揭板之役 實其弟奎鉉之功也)
(예성춘추에는 穆鉉物로 되어 있는데 穆鉉歾자가 맞다. 아래에 이 부분 사진을 실었다.)
<표점>
旌閭文
大明忠臣、朝鮮孝子、贈中直大夫、司憲府持平、平澤林亨業之門。 崇禎紀元後、三甲辰、十一月、日、命旌閭。
忠孝持平林公旌閭重建記
大明忠臣、朝鮮孝子、贈中直大夫、司憲府持平、平澤林亨業之門,昔在甲辰,我正廟朝,命旌而立于達川者也。 歲久傾圮,以癸卯夏,重建于丹月。實公之弟宣傳公諱嗣業之八世孫穆鉉,與其公之九世孫淳星,經紀孱功之力也。聖朝褒崇以彰之者既至矣,而後裔追理以圖其不朽者,亦不容已也。 嗚呼!公可謂遭遇聖明,而亦可謂余有後也。
公諱亨業,字繼榮。折衝將軍、贈領中樞府事諱篁之第三子也,皇明總兵、本朝節度使忠愍公諱慶業之兄也。 公生有誠孝,忠養侍疾,世以黔婁稱。當崇禎丙子,公之兄諱承業宰孟山,領兵赴戰。公奉母夫人,獨在衙中。夫人病劇,公斫指灌血,獲甦者再。丁丑正月,竟遭艱,日夜號痛。虜騎百餘突至搶掠,吏民鳥鼠散。公獨抱柩哀哭,血淚雨下。虜不忍犯,遂斫木大書「孝人不可害」五字,揚于門楣而去。虜後至者皆不入。既而歸葬先壠,廬墓啜粥,三年如一日。喪闋,日拜家廟,至老不廢。
忠愍公嘗奮大明大義觸虜,虜怒。壬午,拘致其全家于瀋陽,公亦在其中。金淸陰先生嘗斥南漢和事,亦被拘在瀋。公泣謂淸陰曰:「吾輩皇明陪臣也,又荷再造罔極之恩。今豈可屈膝於醜虜乎?」 淸陰先生執手歎曰:「子誠義士也,誓與同死。」 虜脅令公拜跪,公不肯。虜怒,揮刃者數。公大喝曰:「爾決吾腹,視吾心!其豈屈服於爾者乎?」凜凜有不可犯。見者莫不嘖嘖壯之,虜亦義不加害。時,昭顯世子在瀋館,從官諸人所目見者,而李貞翼公諱浣記其事,閔尙書諱鎭厚作忠愍公狀亦載之。
公既得還,繼値甲申變,慟哭自廢,杜門養病,以丙午八月十一日卒,享年七十六云。 嗚呼!今日綱常墜地久,尙何望其有春秋之大義乎?使公之裔孫重建誠懇,實能體公忠孝之心而奮激焉,則幷與其行路之過是門者,觀感而興起矣。茲豈非朝家所以勸來人者耶?
公之旁裔珏鉉、義鉉、穆鉉,令於綽楔之役,亦周旋始終焉。穆鉉俾茀億山人朴世和記之。 時,大明永曆二百五十八년 甲辰二月十八日也。
(記文成穆鉉歾, 揭板之役, 實其弟奎鉉之功也)
<번역>
정려문 (旌閭文)
명나라의 충신이자 조선의 효자인 증(贈) 중직대부 사헌부 지평 평택 임형업의 정문(旌門).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갑진년(1784년, 정조 8년) 11월 일에 정려를 명하였다.
충효지평임공정려중건기 (忠孝持平林公旌閭重建記) 명나라의 충신이자 조선의 효자인 증 중직대부 사헌부 지평 평택 임형업의 정려문은, 옛날 갑진년(1784년) 우리 정조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여 달천(達川)에 세웠던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계묘년(1903년) 여름에 단월(丹月)에 새로 지었다.(重建于丹月, 達川과 丹月은 큰 차이가 없는 지명이다. 바로 근처 충렬사에 임경업 장군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가 있다)이는 실로 공의 아우인 선전공 휘 사업(嗣業)의 8세손 목현(穆鉉)과 공의 9세손 순성(淳星)이 애쓰고 정성을 다한 미약한 공로(孱功, 보잘것없고 자잘한 공로. 여기서는 겸손의 뜻으로 쓴 말이다)의 힘 덕분이다. 조정에서 포상하고 높여서 공적을 드러낸 것은 이미 지극하였고, 후손들이 뒤를 이어 정리하여 영원히 썩지 않기를 도모하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아, 슬프도다! 공은 참으로 성명(聖明)한 임금을 만났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나에게 뒤를 이을 훌륭한 후손이 있다'고 말할 만하다.
공의 휘(諱)는 형업(亨業)이고, 자(字)는 계영(繼榮)이다. 절충장군이자 영중추부사에 증직된 휘 황(篁)의 셋째 아들이며, 명나라의 총병이자 본국의 절도사인 충민공 휘 경업(慶業)의 형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성품이 성실하고 효성스러워, 정성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고 병간호를 하니 세상 사람들이 '검루(黔婁, 중국의 대표적 효자,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에 나온다)'에 비추어 칭송했다. 숭정 병자년(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공의 형인 휘 승업(承業)이 맹산 수령으로 있으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아갔다. 공은 어머니(母夫人)를 모시고 홀로 관아에 남아 있었는데,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공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두 번이나 다시 깨어나시게 했다. 정축년(1637년) 정월에 마침내 상(喪)을 당하여 주야로 부르짖으며 슬피 울었다. 이때 오랑캐 기병 백여 명이 갑자기 들이닥쳐 노략질을 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새나 쥐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공은 홀로 널(柩)을 껴안고 슬피 통곡하니 피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오랑캐들도 차마 해치지 못하고, 마침내 나무를 깎아 큰 글씨로 ‘효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孝人不可害)’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대문 처마(門楣)에 걸어두고 떠났다. 그 뒤에 이른 오랑캐들도 모두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얼마 후 선영의 산소 아래에 장사를 지내고,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죽을 마시며 3년 동안을 하루같이 지냈다.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도 날마다 사당에 절하는 일을 늙을 때까지 폐하지 않았다.
충민공(임경업)이 일찍이 대명(大明)의 대의를 떨치다가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임오년(1642년)에 오랑캐들이 그의 온 가족을 심양으로 붙잡아 갔는데, 공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청음 김상헌 선생도 옛날 남한산성에서의 화친을 배척한 일(斥南漢和事)로 역시 심양에 구금되어 있었다. 공이 울면서 청음 선생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명나라의 배신(陪臣, 제후국의 신하)이며, 또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끝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어찌 추악한 오랑캐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청음 선생이 손을 잡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의사(義士)이오. 나와 함께 같이 죽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했다.
오랑캐들이 위협하며 공에게 무릎을 꿇고 절할 것을 명령했으나 공은 굽히지 않았다. 오랑캐들이 분노하여 칼을 여러 번 휘두르자 공이 크게 호통치기를, “너희들은 내 배를 갈라(爾決吾腹) 내 마음을 보아라! 내가 어찌 너희들에게 굴복하겠느냐?” 하니, 그 서슬이 퍼렇고 늠름하여 감히 침범할 수 없었다.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며 장(壯)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고, 오랑캐들 또한 그 의로움에 감동하여 해를 가하지 못했다. 이때 소현세자께서 심양관에 계시면서 시종 무관들과 함께 이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이정익공 휘 완(李浣, 이완 대장)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고, 민상서 휘 진후(閔鎭厚)가 지은 충민공행장기에도 이것이 기재되어 있다.
공은 살아 돌아온 뒤, 이어 갑신년의 변고(1644년, 명나라의 멸망)를 당하자 통곡하며 스스로 세상 활동을 폐하고, 문을 닫아걸고 병을 치료하다가 병오년(1666년)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6세였다.
아! 오늘날 인류의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오히려 어떻게 춘추(春秋)의 대의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공의 후손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성으로 정려를 중건하게 하여, 참으로 공의 충효 어린 마음을 체득하고 분발하게 한다면, 이 문을 지나가는 길손들까지도 보고 느껴서 감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후세 사람들을 권장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공의 방계 후손인 각현(珏鉉), 의현(義鉉), 목현(穆鉉)이 이 정려를 중건하는 역공(役工)에 참여하여(令於綽楔之役)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잘 주선(周旋)하였다. 이에 목현(穆鉉)이 불억산인(茀億山人) 박세화(朴世和)에게 부탁하여 이 글을 기록하게 한 것이다.
※이 記文을 쓴 박세화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합니다. 자료 인용이 길어 번잡합니다.
『 《박세화(1834년 ~ 1910년), 字 年吉 호 毅堂 本貫 密陽. 불억산(茀億山)은 淸風에 있는 산으로 의당 박세화가 晩年에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다. 출처: 제천문화원, 제천의 인물.》
하지만 다음 논문에는 다르게 나온다.《毅堂 朴世和의 移居와 擧義 활동, 鄭敬薰 著》논문 p19에 보면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서 문경 건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불억마을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불억마을 뒷산인 문수봉(883m)을 불억산으로 보는 것이 옳다 』 고 써있다.
우선 문수봉은 월악산 영봉(靈峰)과 가깝고 해발 1,162.2m다. 그리고 지도에 《부러기골》이 보인다. 용하계곡 위다.
그럼 일제시대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 지도》문경 도엽과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 지도》문경 도엽을 살펴보자.
1910년(명치 43년) 측도, 1913년(대정 2년) 제판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지도》문경도폭.
佛億으로 표기하고 일본어 가타카나로 푸루오쿠로 써놓았다. 불억(佛億)을 표기한 것이다.
1915년(대정 4년) 측도, 1916년(대정 5년) 제판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문경도폭.
佛億으로 표기하고 푸루키로 써놓았다. 《부러기》를 표기한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부러기》로 불렀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제천군 덕산면》
佛億里 불억이가 보인다. 月岳里 旧라고 써있다.
여기서 月岳里 旧라고 쓴 것은 청풍군 원서면 월악리에서 제천군 덕산면 월악리로 행정구역 개편하였음을 표시한 것이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문경군 신북면》
嶺峙峴名에 茀億嶺 불억이재 中坪里가 보인다. 億자는 초두머리 艹 아래 가슴 臆자가 결합된 글자다.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와 문경군 신북면 건학리 경계지역이 맞지만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가 맞다. 제천문화원, 제천의 인물에 불억산은 청풍이 아닌 제천시 德山面 월악리로 정정해야 한다. 왜 이런 혼동이 생겼을까?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을 보면 청풍군 원서면에 월악리가 보인다. 아래에 붙인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
청풍군 원서면에 월악리가 보인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제천군 덕산면 부분. 덕산면에 월악리가 보이는데 청풍군 원서면 지역이었음을 표시했다. 하지만 나머지 신현리 등등은 충주군 덕산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충주군 덕산면에서 제천군 덕산면으로 편입된 것이다.
불억(茀億)은 발음도 거칠고 특이한 지명인데 불(茀)은 풀이 우거질 불이고 億은 岳자 대신 쓴 글자라고 생각한다. 月岳山 영봉에서 멀지 않다. 그럼 수풀이 우거진 거칠고 큰산이란 뜻이다. 岳자가 惡과 음이 같으니 피한 것이다. 億은 便安하다는 뜻도 있다. 일제시대 지도에 나오는 佛億은 우리말 지명 《부러기》를 표기한 것으로 그 뜻은 앞으로 밝힐 일이고 毅堂 박세화가 불억산인(茀億山人) 으로 자호(自號)로 썼다고 봐야 한다. 』
때는 대명 영력 258년 갑진년(1904년) 2월 18일이다.
기문이 완성되었을 때 목현(穆鉉)이 세상을 떠났으니, 현판을 판각하여 게시하는 작업은 실로 그 아우인 규현(奎鉉)의 공(功)이다.(記文成穆鉉歾 揭板之役 實其弟奎鉉之功也) 아래에 사진을 붙였다.
(記文을 받으려면 집안에 내려오는 행장(行狀)을 추려서 글 잘 쓰는 선비를 수소문하고 돈을 준비해서 찾아가야 한다. 71세 박세화가 덕산면에 있었으니 충주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그 당시 쌀이 화폐 역할을 했으니 현물로 줄 수 있고 돈으로도 줄 수 있다. 하지만 쌀이 귀했던 시절이니 쌀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毅堂 朴世和는 의병활동을 한 깐깐한 선비로 알려진 인물이니 돈을 직접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돈을 마련해서 도중에 쌀을 산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의를 표시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게 예의(禮義)고 도리(道理)이지 거져 써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그 일을 穆鉉이 했고 목현이 세상을 떠나자(歾) 글을 현판에 새기는 匠人을 구해 현판을 제작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일은 동생 奎鉉이 했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인 1904년에 있었던 일이다.)
重修記
本旌閭閣은 約三十餘年前 現地로 移轉重修한 建物 및 施設이 倒壞될 程度로 頹廢되여 이를 宗孫間에 平素 重修를 所望하든 次 뜻을 모아 右記와 如히 重修施工 하였기에 이를 記錄保存하려 합니다.
記
一,施工日時: 단기 사삼일육(1983년, 癸亥)年 五月 五日
一,推進後孫: 十一代孫 炳起
一,施工業者: 瑞原建設 忠南北支社
一,基金 誠金 內譯
所在 姓名 金額(원)
大宗會 八○○,○○○
忠州市 鳳熙 一五○,○○○
서울 九路區 興權 一五○,○○○
慶北 達城 代表 後龍 一二○,○○○
忠州市 代表 昌植 一○○,○○○
天安市 代表 炳學 九○,○○○
溟州郡 代表 佑奎 九○,○○○
中原郡 代表 近龍 九○,○○○
原城郡 代表 炳翌 八○,○○○
金泉市 代表 淳太 七○,○○○
尙州郡 代表 淳仁 五○,○○○
原城郡 代表 福奎 五○,○○○
서울 冠岳區 代表 千植 五○,○○○
金陵郡 代表 淳滿 四○,○○○
陰城郡 代表 百壽 六○,○○○
安養市 代表 永植 三○,○○○
原州市 代表 南植 三○,○○○
中原郡 代表 興原 三○,○○○
天原郡 代表 石崇 三○,○○○
大田市 代表 炳善 二○,○○○
原城郡 代表 燉奎 二○,○○○
原州市 代表 炳囍 二○,○○○
堤原郡 代表 鴻植 一○,○○○
天原郡 代表 漢錫 一○,○○○
城南市 代表 炳漢 一○,○○○
淸州市 代表 秉舜 一○,○○○
寧越郡 代表 演植 五○,○○○
(계 2,260,000원)
2017년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헐고 없어졌다.
인터넷 자료.
《임형업 충효각》지금 모습이다.
위 사진들은 2017년에 찍은 것이다. 기존에 있던 충효각이 낡아서 최근래 새로 조립식 판넬 건물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