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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묵상글 ( 연중 제 6주일. - 완성하는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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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완성하는 사랑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율법의 정신과 목적도 사랑이라는 전제 아래서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사랑의 법이 아닌 다른 법일 리 없을 것이고,
주님께서도 그런 뜻에서 율법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완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일 겁니다
그런데 율법도 사랑의 법이고 정신도 사랑이긴 한데
적극적인 사랑이 아니고 최대한의 사랑이 아닙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소극적인 사랑이고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면 남에게 나쁜 짓이나 해를 끼치는 짓을 하지 말아라.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것은 해야 한다. 뭐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율법의 소극적 사랑의 예를 드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맹세하지 말라.
율법에서는 이 정도만 하지 않아도 훌륭하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을 안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런 사람 드믑니다.
그러니 이런 나쁜 짓 안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고,
이 세상 사랑으로는 이 정도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사랑을 말씀하시고 있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에 이런 소극적인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고작 불의한 짓을 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세상 사랑을 능가하는 하늘나라의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 내지 말아야 하고,
간음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음욕도 품지 말아야 하며,
거짓 맹세는 물론이고 아예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하지 말아야 할 사랑뿐 아니라 해야 할 사랑에 있어서도
이 세상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 유명한 사랑 그래서 우리도 너무나도 잘 아는
두 배 사랑과 원수 사랑인데 이것은 다음 주에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하늘나라 사랑은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하늘나라에서 살인이나 미움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살인은 물론 성내는 일도 없어야 하고,
미움은 물론 남을 깔보는 말이나 업신여기는 말도 없어야 하며,
거짓 맹세나 사기는 물론 모두 정직하고 의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관건은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가?
주님의 제자라면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 세상 사랑을 능가하는 하늘나라 사랑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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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시며 계명에 충실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을 참되게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서에서 율법이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도덕적, 종교적 법률적 명령을 뜻합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모세 오경), 율법서를 포함한 구약의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만드신 참된 목적은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을 악으로부터 보호해서 악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하느님의 선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613조에 달하는 율법이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궁극적으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사람의 이중 계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사랑의 길로 인도하는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한다는 의미는 율법을 하느님 사랑의 담겨 있는 표지로 알아듣고 그 길을 충실히 따라 걸어 참된 사랑을 지닌 인간으로 변모되어 율법의 참된 뜻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몸소 보여 주심으로써 율법의 참된 뜻을 드러나게 하고 율법을 사랑의 실천을 통해 완성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이 사랑을 궁극적으로 지향하기에 그 율법은 참된 것이고 그 율법에 담긴 사랑의 길을 따라 참되게 실천하게 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참되게 지킨다는 것은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겸손되이 사랑의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의 교부 아가톤 교부의 다음의 일화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카톤 교부는 모든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고자 전력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배를 타게 되면 제일 먼저 노를 잡았고, 손님들이 찾아오면 식탁을 차리는 일에 제일먼저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음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임종하기 전 사흘 동안 눈을 뜬 채 눈동자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료 수도자들이 “아가톤 교부님,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법정에 있소” 동료 수도자들이 “아니, 스승님께서도 두려워하신단 말입니까?”하고 묻자 “물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안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합니다.
율법을 참되게 지킨다는 것은 이처럼 바리사이처럼 자신들이 율법에 충실한 자로 자처하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들 보다 낫다고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이 교부처럼 자신이 지킨 율법이 진정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렸는지 자신이 지킨 계명들을 겸손되이 성찰하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들이 우리를 자유롭고 기쁘고 행복한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과 성찬용 잔
성 루카는 사랑으로 가득찬 주님의 배려에 대해 전후 상황을 정확히 전하고 있다.
“드디어 무교절의 첫날이 왔다. 이 날은 과월절에 쓰는 어린 양을 잡는 날이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서 우리가 먹을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어디에다 차리면 좋겠읍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지시하셨다. ‘너희가 성안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을 보고 내가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 있느냐고 묻더라고 하여라. 그러면 그 집 주인이 이층의 큰 방 하나를 보여 줄 것이다. 그 방에 자리가 다 마련되어 있을 터이니 거기에다가 준비를 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가보니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들은 거기에다 과월 절 음식을 차렸다. 만찬 시간이 되자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루카 22,7-15).
그리고는 주님을 따르는 사도들이 피로에 지치고 허기져 있었으므로 우선 지상의 양식과 음료로써 육체적인 원기를 회복하고 활기를 띤 후에야 비로소 주님께서는 오로지 그들의 관심을 새로운 계약을 맺는 영혼의 양식, 곧 당신의 거룩한 살과 보배로운 피에 집중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월절 양으로써 옛 계약을 엄숙하게 끝내셨다. 그리고 곧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약을 맺는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셨다.
최초의 세 명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다음처럼 전 하고있다.
“주님께서는 고난 받으시기 전날 밤에 빵을 들어 사례하시고 축복하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몸이니라.'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잔을 드시어 사례하시고 축복하신 후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이니라. 너희는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체가 현시되자 마자 벌써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의 손길이 거기에도 뻗치고 있었다. 이 점에 관해 그리스도께서는 몹시 슬퍼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탄식의 말씀을 하셨다(루카 22,21-22).
“그런데 나를 제 손으로 잡아 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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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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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24)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15,1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를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혜’는 <복음>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과 맺었던 십계명은 차차 613항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삶을 율법으로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고,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라 3,34-35)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고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곧 ‘사랑’이야말로,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옛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실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마태 6,22)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예”할 것은 “예”(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다.”(1요한 3,18)
그러니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응답 곧 원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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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생각이 밖으로 나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10).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페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의 형식주의가 아니라 근본정신인 사랑의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마음에 쌓아 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하였다면, 그는 선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하였다면, 선하지 못한 생각을 품은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12,35).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고,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을 가슴에 모신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할 사람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4-15).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였다면 이미 미워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이 악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창세4,1-8)를 보면,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분노와 상처 입은 자존심, 질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형제 살해’까지도 서슴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이 뿌리라면, 살인 행위는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뿌리를,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손발 이전에 마음을 단속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단속하되 단호하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 참으로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동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이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습관의 사슬은 매우 작아 잘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새 끊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 되고 맙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죄를 두 번 지으면 더는 죄처럼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행동의 뿌리인 마음을 단속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숨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를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15,17.1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나 안 보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잠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서 생명의 샘이 흘러너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14,30).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 하십시오”(필리2,5).
하늘에는 하늘의 질서가 있고, 땅에는 땅의 질서가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의 질서가, 산에는 산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구 파헤치고, 규정을 지키지 않고 항해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질서를 지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질서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말씀의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 21장3절에 보면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한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은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와 성공 여부는 주님께 얼마만큼 의존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풍요로운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부생활 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속을 본다는 것’입니다.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인 사제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큰 안쓰러움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지킬 것을 지켜야 합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합니다. 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입니다. 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 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넉넉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언제나 그것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인장 꽃이 예뼈 선인장 화분을 하나 샀어요. 순이야! 내 마음을 받아줘!
내가 내미는 화분을 보고 순이가 말했어요. 나는 가시난 마음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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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국어를 잘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듣기와 말하기입니다. 중학교에서 3년, 고등학교에서 3년을 배웠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학원’도 다녔습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어느 정도 되지만 듣기와 말하기는 미국에서 지낸지 4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말하고 듣고자하는 열의와 갈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영어를 배웠던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평가하는 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아니었습니다. 쓰기와 읽기 그리고 문법이 평가의 기준이었습니다. 교포사목을 하고, 한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아무리 미국에서 살아도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미국 성당에서 지내고, 미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을 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영어를 하려면 영어의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기준도 있습니다. ‘기도, 성경 읽기, 봉사, 친교’입니다. 봉사와 친교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이라면 기도와 성경 읽기는 영적으로 다져지는 신앙생활입니다. 봉사와 친교는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본당에는 봉사와 친교를 위한 조직과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를 위해서 ‘해설단, 독서단, 복사단, 성가대, 제대 봉사회, 헌화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신앙생활의 핵심인 미사가 거룩하게 봉헌될 수 있습니다. 친교를 위해서는 구역과 반 모임이 있습니다. 성모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 야유회도 갈 수 있고, 매주 미사 후에 음식 나눔도 할 수 있습니다.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하고, 장지에도 함께 갑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위한 조직과 단체도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성서 공부반이 있습니다. 봉사와 친교라는 꽃은 기도와 성경 읽기라는 거름이 있어야 시들지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채우는 신앙생활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코로나 쓰나미와 함께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도 힘들게 했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백신과 치료제로 이제 우리와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백신과 치료제가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강력한 예방 주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나약해진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는 주님의 보약입니다. 고백성사는 조금씩 약해진 나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정비하는 보수공사입니다.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군사가 되는 특수 훈련입니다. 병자성사는 심신이 약해진 이들을 위한 특진입니다. 혼인성사는 주님의 축복으로 보호받는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품성사는 주님을 위한 봉사자를 선별하는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신앙인들이 충실히 살아가도록 많은 예방 접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력한 ‘백신’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귀함 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와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런 삶을 택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 청년은 울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은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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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아 카메론은 35세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영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다른 학생들보다 자그마치 15살이나 많았지요. 주위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자신에게는 창조적 열망과 인생 경험이 많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다른 학생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잘 칠 때쯤이면 몇 살이나 되는지 아세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알아요. 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아도 그 나이를 먹는 건 마찬가지예요.”
하지 못하는 이유만을 찾는데 너무나 익숙한 ‘우리’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사람은 그만큼 가능성이 훨씬 많은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지레짐작으로 할 수 없다며 좌절과 절망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이유를 바라보며 희망과 의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 역시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지금 하는 것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 이런 이유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 우리와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랑 실천은 자기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주님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더 엄격한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시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이 정도는 괜찮다.’라는 안일한 생각이 주님과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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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흔히 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장이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음으로써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리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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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키엣 대주교님.
자유와 책임
자유는 책임이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때 기계가 아닌 좋고 나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한 말이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예’ 보다는 ‘아니오’를 먼저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반대로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했던 부부도 사랑이 식으면 서로에게 미움과 상처만을 주는 관계가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는 남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 부부와 부모, 형제 자매로부터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깝다고 생각하기에 너무나 쉽게 마음을 드러내고 화를 내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깝기에 더 깊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나와 가까운 사람이 마음의 상처로 고통 받고 있다면 그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준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족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보살피고 배려하고 화해하는 사랑입니다.
인생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섬이 아닙니다. 주변에는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도,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사랑 받을 수도, 사랑을 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을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책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형제와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주님,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2. 자유를 누리는 만큼 책임을 완수하고 있습니까?
3.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까? 혹시 내가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언제 마음이 아팠습니까?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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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
-지혜, 선택, 훈련-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매사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이요, 사랑과 겸손이요, 마음의 순수와 자유로움입니다. 제 집무실 커다란 게시판에는 2년전 써놨던 깨달음의 글이 지금도 붙어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의 고백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0.
그렇습니다. 공동체 생활도 정말 커다란 은총입니다. 형제들 하나하나로부터 평생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형제들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예수님 얼굴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도 수도원 25년 기념감사제가 없었다면, 또 마르코 수사님의 각별한 당부가 없었다면 이 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행복기도 역시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던 바오로 신부의 부탁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10여일 동안 순례여행을 다녀온 어느 자매님의 감사메시지도 은총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멘!
주님께 찬미 찬양드립니다!
잘 살아가겠습니다.
순례를 하며 신부님께서 강조하시던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신 말씀을 체감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은 주님의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주셨는지 눈물이 납니다!
앞으로 더욱 긍정적이고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고백인지요! 수십년을 한결같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참 사랑스런 성녀같은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의인으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바라시는바 우리 모두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여 닮은 참나의 의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줍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지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은총중의 은총이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성령의 은총인 지혜뿐입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참으로 한결같이 사랑해야 할 분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제 행복기도 서두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자유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매일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타고난 것들에 좌절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주님을, 지혜를, 사랑을, 감사를, 행복을,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삶에서 선택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어리석게도 아까운 시간 불행을 선택하여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갑니까?
참 좋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집회서가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내용이라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대로, 선택하는 대로 받으리라.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얼마나 중요한 선택인지 선택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결단이자 선택의 실행입니다. 선택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참으로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선택에 활짝 열린 좋은 날입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깊이를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 할 바 이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의인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심오한 계시입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요, 주님은 이에 대한 근원적 처방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 예수님이 권위를 지니고 확신에 넘친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살인에 앞서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하며 무시하고 멸시하는 간접적 살인의 마음부터 깨끗이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바치기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으면 지체없이 용감하게 화해하고 와서 제단에 와서 예물을 바치라 합니다. 간음에 앞서 마음의 간음인 음욕부터 일소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충격요법적 표현을 통해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죄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성적 문란이 모든 화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 눈이 죄짓게 하면 오른눈을 뽑아버리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오른손을 잘라 버리라 합니다. 말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해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엄중함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호히 죄를 끊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간음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요,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간음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불륜의 죄가 얼마나 영혼을 파괴하는지 생각한다면 간음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죄를 지었을 때 참회가 우선입니다.
맹세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무지로 인한, 제 분수를 넘은 맹세는 아예 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시니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 말하는 솔직담백한 답변뿐이니 이 이상의 것은 모두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지난 수요일 마르코 복음 말씀과 묵상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흡사 마음이 더러운 오물 가득한 쓰레기통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과연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고귀한 품위의 인간의 참으로 어둔 측면입니다.
이래서 평생 영적전쟁에 영적훈련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기 영적훈련에는 요령도 첩경의 지름길도 없습니다. 부단히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평생 훈련함으로, 쓰레기통 같은 마음을 뿌리로부터 정화하고 성화하는 길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수도자들은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여,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영적훈련으로 삼아, 하루하루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침으로 아예 우리 마음에 애당초 죄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결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찾는 영적훈련에 항구하게 하시며 당신을 닮은 참나의 의인이자 성인으로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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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옛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새롭게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저는 오늘 주님께서 들려주신 복음의 전체 내용이 이렇게 들리는 듯합니다.
행하기 전에 마음을 살피십시오. 주님의 빛이 우리 마음속에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항상 우리 마음을 살피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 되짚어보지 않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마음에서 어떤 행동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입을 통해 말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표정으로 나오기 마련이고, 눈빛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또한 손과 다리, 몸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곳이 우리 행실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출발점을 잘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노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이 행동이 되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분노의 대상이 진짜 지금 분노하고 있는 대상이 맞는지 살펴야 합니다. 혹은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살펴야 합니다.
음욕의 마음도 우리의 행실이 되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밖에 수많은 감정도 우리는 살펴주어야 합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늦은 저녁 시간 잠시 우리 마음을 살펴주세요. 오늘 어떤 마음들이 우리를 지배했는지, 그 마음 중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것은 없었는지요. 혹시 그것이 행실이 되어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요.
잠시 그리고 매일 살펴주세요. 우리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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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서 좋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탄산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톡 쏘는 것도 좋고 달지 않아서도 좋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지금 제가 좋아하는 탄산수의 장점이 싫었습니다.
맥주도 아니고 콜라나 사이다처럼 달지도 않아서 싫었습니다. ‘이걸 왜 마시지?’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시다 보니 좋아졌습니다. 청량감이 있는 것과 동시에 맥주처럼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달지 않은 것이 더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도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누구처럼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처럼 익살스럽지 않고, 누구처럼 재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때요? 그렇지 않은 것이 매력인걸요
모두가 주님께서 선물해주신 매력과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달라서 우리는 모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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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연중 제 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고 더 낮아지고
더 이상
넓어질 수 없을 때까지
넓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이상
깊어질 수 없을 때까지
깊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이상
부드러워질 수 없을 때까지
부드러워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이상
너그러워질 수 없을 때까지
너그러워지고 더 너그러워지고
더 이상
깨끗해질 수 없을 때까지
깨끗해지고 더 깨끗해지고
더 이상
착해질 수 없을 때까지
착해지고 더 착해지고
더 이상
곧아질 수 없을 때까지
곧아지고 더 곧아지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이상
그 너머가 없을 때까지
그 너머로 더 그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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