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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Ⅰ. 서론
1.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
Ⅱ. 본론
1. 독일의 상황
2. 30年 戰爭의 背景
3. 30年 戰爭의 네 段階
4. 웨스트팔리아조약(1648)
Ⅲ. 결론
Ⅰ. 서론
1.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
종교개혁(Reformation)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중세 말의 유럽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과정 속에 이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 카톨릭교회는 좋든 싫든 중세봉건사회와 밀착하였고, 따라서 봉건사회의 붕괴는 카톨릭교회의 중세적인 존립기반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면에서 본다면 봉건적인 지방분권체제가 교황의 보편적이고 초국가적인 교권지배의 기반이었으나, 이제 왕권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날이 갈수록 강대해지는 집권적 통일국가의 발전은 바로 이 기반을 무너뜨리고, 왕권은 교황권에 강력한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14세기에 발생한 '교황의 바빌론유수'나 '교회의 대분열'은 바로 이러한 도전 앞에 교황권이 대항할 힘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으며, 각국에서는 국가교회주의의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한편 봉건적인 사회구조의 변화는 보편적 조직체였던 중세교회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잠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국왕이나 몰락의 길을 걷는 봉건귀족이 다 같이 '돈의 궁핍(Geldmangel)'에 시달리면서 교회의 재산을 탐내고 로마로 유출되는 존을 가로채려고 하였으며, 장원제도의 붕괴로 농노신분과 봉건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농민들은 10분의 1세와 같은 교회 세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날로 증가하는 이단운동과 신비주의의 대두, 그리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개성의 각성은 중세 말의 정신적·지적 풍토를 크게 변화시키고, 교회의 획일적인 정신적·문화적 통제를 크게 약화시키고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종교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14세기 후반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위클리프와 그 계승자인 롤라드파, 그리고 15세기에 전반기에 보헤미아에서 발생한 후스파의 움직임은 명확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문제는 교회의 개혁이 카톨릭교회 자체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느냐, 아니면 밖에서 교황권과 교회조직 전체에 대한 도전의 형태로 발생하느냐 뿐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에서의 자발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였다. 15세기 초의 종교회의운동은 실패하였으며, 이 중대한 시기에 교황과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성직자의 타락은 당대인의 눈에 너무나 뚜렷하여 야유와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황 또한 르네상스의 물에 젖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의 충족에 여념이 없었다. 마키아벨리의 《君主論》의 모델은 한 사람으로 알려진 악랄한 권모술수의 名人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는 대표적인 르네상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조카라고 하였으나, 실제는 그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교황이 그의 아들을 조카로 행세시키는 네포티즘(nepotism)은 르네상스가 교황청의 상식이었다. 교회내부로부터의 개혁, 그것도 매우 대담한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외부로부터의 개혁, 즉 종교개혁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Ⅱ. 본론
1. 독일의 상황
신성로마제국은 서쪽을 프랑스로부터 동쪽으로 폴란드와 헝가리에까지 뻗쳐 있었다. 이는 보헤미아의 체코인 그리고 벨기에·로레느·동부 부르군디·서부 스위스 등의 프랑스어 사용지역을 포함했으나 신성로마제국은 이들을 제외한 독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어는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대한 기초라고 생각하는 유대로서의 종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못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은 종교상 거의 동등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는 안정이 이루어진 뒤에 로마 카톨릭교도들이 약 3%의 소수 인으로 떨어지고, 프랑스에서는 위그노교도들이 약 5%밖에 되지 않았으나 독일에서는 진정한 소수인 들도 없었으므로 소수인 이나 종교는 국가의 中央集權化를 위한 기초를 부여하지 못했다. 1600년 신성로마제국에는 아마 카톨릭교도보다는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3백개의 국가들 가운데 다수국가에서 국교일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개인들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합법적인 카톨릭 여러 국가에서 굉장히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보헤미아는 체코주민에 뿌리박을 대다수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도 여러 신분들이 모이면 보통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우세하였다. 신성로마제국 이외의 훨씬 동쪽은 헝가리 귀족들이 주로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었고 카르파치아산맥의 계곡에 있는 트란실바니아는 칼뱅주의의 활발한 중심지였다.
1500년에 있어서 도일은 유럽의 생활을 리드했으나 1600년에 와서는 後進性과 地方主義의 증거를 보였다. 문학은 쇠퇴하고 언어 자체는 아만 화되고 볼품없게 외었다 카톨릭교도들과 칼빈주의자들은 국제적일 협력을 인정하고 다른 국가에서 쓰여 진 서적들을 관심 깊게 읽고 루터 파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루터파 국가들 이외에 세계를 의심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고립을 체험했다. 루터 파와 카톨릭 양파의 독일대학들은 이전보다 적게 학생들을 끌었고 그들의 지적 노력을 더 호전적인 교리에 소모되었으며 제각기 자기 사상의 진실성을 과시하는데 주력하였다. 독일에서처럼 미신이 풍부한 곳은 없었다. 서유럽에 있어서 보다도 더 많은 魔女들이 불태워 죽임을 당했고,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많았으며 교양 있는 사람들은 더욱 占星術에 매혹되었다. 남부 독일과 라인란트의 상업은 쇠퇴하였다. 왜냐하면 대서양으로 무역이동과 네덜란드인들이 자기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라인강 어구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푸거가문과 같은 독일의 은행가들은 1600년 이후 거의 중요성이 없었다. 당시 자본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은 서유럽에서였다.
2. 30年 戰爭의 背景
"君主의 宗敎가 그 地方을 지배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리와 더불어 1555년의 아우그스부르크 조약은 각국에 있어서 정부는 그 신민들의 종교를 강요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어떠한 국가에서는 수도원장, 대주교 혹은 주교가 스스로 정부를 구성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재직자가 죽을 때마다 자기의 후계자를 지명하고 루터 파 혹을 카톨릭의 지역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있었다. 1593년 엑스 라 샤펠의 지배를 위해, 그리고 1600년에는 콜로뉴의 지배를 위해 소규모의 전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우그스부르크 조약에 뒤이은 수십년동안 루터 파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아 루터 파의 행정관들은 교회국가에 참여시키거나 이들을 세속화시켜 세속의 지배에 귀속케 하였다. 카톨릭교도들은 아우그스부르크 조약의 聖職任命權을 침해한 이러한 끊임없는 손실을 수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칼뱅주의는 아우그스부르크 조약 밑에서 아무런 권리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가들이 칼뱅주의 국가로 되었다. 이러한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라인강 서부의 신성로마제국의 팔라틴(팔쯔)이었다. 팔라틴은 라인강 중부를 건너서 전략적으로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자인 팔라틴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한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었다. 1608년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선제후의 역설을 듣고 자기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의 헨리 4세와 협의하였다. 1609년 독일 카톨릭 국가들의 동맹이 바바리아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도움을 기다렸다.
이와 같이 독일인은 宗敎戰爭을 예견하고 분열되거나 혹은 두 편으로 결속하였고 각 당은 상대편에 대항하여 외국에서의 원조를 간청하였다. 다른 문제들도 도한 성숙하고 있었다. 1609년 조인된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12년의 휴전은 1621년 만기에 이르렀다. 스페인 사람들은 다시 네덜란드 共和國을 파괴하려고 준비하고 있거나 혹은 적어도 쉘트강 어구를 타개하거나 네덜란드 상인을 동인도로부터 축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독립을 주장하고 하여간 인도를 떠나거나 안트위프에 있는 자기들의 세력을 철회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새로운 네덜란드·스페인 전쟁은 불가피한 듯 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또한 중부 유럽에서 합스부르크로부터 영토상의 분기점을 세울 것을 제안했는데 그 한 가닥은 스위스의 서쪽 끝이 여러 주를 통하여 직접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로 이르렀으며 다른 스위스 서쪽 끝의 여러 주를 지나서 라인강의 계곡으로 가는 것이었다. 라인강과 라인강 근처에서 칼빈주의적인 팔라틴 제후국의 소수국가를 정복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콩트를 크고 영속되는 영토의 덩어리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라인란트와 스위스에 있어서 이러한 스페인의 구상은 자연히 프랑스의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분가는 서서히 그 자체의 영도 안에 있는 프로테스탄티즘을 근절시키고 심지어 신성로마제국을 더욱 근대적이며 국민적인 국가형태로 전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독일에 있어서 강력한 권력사상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극히 불쾌한 거이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반대 때문에 다시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요한 보호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유럽의 거물로 영국 인구의 5배, 스웨덴이라든가 네덜란드 인구의 10배 이상으로 어떠한 독일의 단일국가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1600년 이후 프랑스는 결국 어느 정도 국내가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은 이러한 모든 절박으로부터 기인되어 극도로 복잡한 것이었다. 이것은 카톨릭·프로테스탄트의 문제를 놓고 싸운 獨逸의 國內戰爭이었다. 이는 또한 제국의 중앙집권을 확립하려고 분투하는 황제와 독일을 유지하려고 투쟁하는 회원국들 사이에 헌법문제를 놓고 싸운 독일의 국내전쟁이었다. 이들 두 국내전쟁은 결코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카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구가는 동시에 皇帝의 지배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도한 덴마크와 스웨덴의 국왕들과 트란실바니아의 제후가 끼여 들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 그리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일어난 국제전쟁 이었다. 밖에서 온 이 모든 손님들은 국내에서 동맹을 이루어 온 독일 영토에서 대부분의 전투를 맡았다. 이 전쟁은 장군들 중의 다수가 요행을 바라는 군인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이들은 자기의 公國들을 세우려고 꿈꾸고 자기 자신의 편의에 따라 싸우거나 또는 싸움을 거부했다.
3. 30年 戰爭의 네 段階
전투는 보헤미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사실상 보헤미아 전투(1618∼1625), 덴마크 전투(1625∼1629), 스웨덴 전투(1630∼1635), 스웨덴·프랑스 전투(1635∼1648)의 네 단계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1618년 체코의 보헤미아인들은 자기들의 프로테스탄트적 자유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여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황제인 마티아스가 보낸 밀사와 교섭했던 것인데 이 나라에서 가끔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황제의 사신을 창 밖으로 집어 던짐으로써 태도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프라그 투척사건"이후 국왕·황제는 자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냈고 이에 보헤미아 인들은 그를 추방하고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프러테스탄트 동맹체의 首長인 칼빙주의적인 팔라틴 선제후를 택했다. 이 청년은 보헤미아로 가서 프레데릭 5세의 칭호를 가졌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으로부터 보헤미아인들에게 원조를 제공했고, 네덜란드인들은 화폐를 보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궂누은 합스부르크의 배후를 괴롭혔다. 마티아스의 후계자인 페르디난드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온 화폐, 밀라노로부터 파견된 스페인의 군대, 카톨릭인 바바리아의 군대의 도움을 받고 또한 보헤미아에 있는 루터파들이 느꼈던 공포의 덕을 보아 1620년 "배산"전투에서 겨우 보헤미아인들을 압도했다. 프레데릭은 망명하여 "겨울 왕"이라고 조롱을 당하거나 동정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안에 있는 그의 조상의 영토 팔라틴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보헤미아 전쟁의 결과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났다. 첫째는 스페인 사람들이 라인란트에서 견고히 지키고 있으며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데 대하여 그들의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하여 재정복되고 혁명이 일어났다. 페르디난드는 다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귀족의 약 절반의 토지를 몰수했다. 그는 이 토지를 카톨릭 교회수단, 수도원에게 기부금으로 증여하거나 자기를 도우려고 들어와 당시 보헤미아의 새로운 토지귀족이 된 한 무리의 온갖 국적을 가진 모험가들에게 분배했다. 예수회 교도들이 밀어 닥쳤으며 법원의 수속과 집행과 더불어 선교와 학교를 통하여 보헤미아의 재 카톨릭화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반란을 일으킨 보헤미아에 가담했던 오스트리아에서도 프로테스탄티즘을 근절 당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운명은 부진하고 1621년 프로테스탄트 동맹도 해체되어 프로테스탄트 문제의 주도권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한 국가인 홀슈타인公이기도 한 덴마크 국왕이 장악했다. 그의 목적을 정치와 잘 혼합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독일에서 몇몇의 주교관구를 획득함으로써 자기의 어린 아들에게 줄 왕국을 세우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고 리슐류로부터 약속을 받아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에게 대항하여 황제 페르디난드는 또 다른 군대를 일으켰다. 즉, 발렌슈타인의 알버트(Albert)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군대를 일으키도록 위임했다. 발렌슈타인 온갖 국적을 가진 직업적 무사를 모집했는데 이들은 보수에 의해서보다는 약탈로 생활했다. 그의 군대는 황제의 군대가 아니라 그의 개인도구였고 그러므로 그는 자기 스스로의 정책에 따랐다. 그의 정책은 잘 위장되고 은폐되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의 이름은 항상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아마도 외국인들이 추방된 統一帝國과 復活된 獨逸을 꿈꾸었을 것이며 그는 자기 스스로 상당히 큰 공국을 탄생시키려는 꿈을 꾸었다. 발렌슈타인과 제국의 다른 장군들은 곧 덴마크의 국왕을 패배시키고 발틱해안에 이르러 덴마크 반도까지 침입했다.
당시 反動宗敎改革의 모든 물결은 독일에 밀려들었다. 카톨릭시즘은 가시 독일에 밀려들었다. 카톨릭시즘은 다시 팔라틴으로 스며들고 보헤미아에 밀어닥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루터파의 여러 국가들의 깊숙한 내부에까지 침투하였다. 1629년 復權勅令(Edict of Restitution)에 의하여 황제는 1552년이래 세속화된 영토를 자동적으로 카톨릭교회로 복귀시키는 선언을 하였다. 두 개의 대주교구, 12개의 주교구, 이전에 수도원과 종교단체에 속해 있던 1백 개 이상의 작은 영토들이 포함되었다. 뤼벡 주교구와 같이 발틱해의 북쪽에 있는 먼 곳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극히 나이가 많은 노인들만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의 영토로 포함되는 수가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독일에 공포가 휩쓸었다, 당시 한 세기나 되던 전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은 중단되는 듯했다.
놀랜 사람들 가운데 프랑스인과 스웨덴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리슐류는 여전히 다루기 힘든 귀족들과 위그노교도를 진압하는 도중에 있었다. 그는 아직 만족스럽게 프랑스를 단결시키지 못했고 프랑스는 싸우지 않고 동맹국을 이용하여 합스부르크의 야망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란드와의 전쟁으로부터 스웨덴 국왕을 구해내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외교관들을 보내고 그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약속했다. 이 원조는 곧 독일에 4만 명의 스웨덴 군대를 유지하는 대가로 매년 1백만 리브르로 증가시켰다. 네덜란드인들은 스웨덴에게 매달 약5만 플로린을 보조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최상급의 능력을 가진 군주로 스웨덴에 있는 모든 당파들은 화해시키고 자기의 의회와 조화 있게 일하고 또한 그럼으로써 자기가 안심하고 해외의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었다. 그는 발틱해 동족 해안에서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인과 다른 군사적 전문가들을 이용하여 그 강한 훈련, 고조된 용기와 기동성 있는 대포로 이름난 당대의 가장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 자신이 종교인인 그는 군대로 하여금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면서 전장으로 진군케 했다. 그는 이상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챔피언으로 적합하였다. 그는 1630년 독일에 상륙하여 프로테스탄트의 투사로서의 역할을 다 하였다. 리슐류는 재정적 원조를 주는 이외에 독일의 카톨릭 국가들과 협상하여 황제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하고 그렇게 하여 독일의 카톨릭교도들 사이에 불화를 퍼트리고 당시 스웨덴군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황제를 고립시켰다.
스웨덴인은 삭소니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1631년 브라이덴펠트와 1632년 뤼첸에서 볼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기서 구스타부스는 아돌푸스는 피살되었다. 그의 宰相 옥센스티에르나는 그를 이어 전쟁을 계속하였다. 스웨덴의 군대는 보헤미아에 침투하여 남쪽으로 다뉴브까지 진격했다. 스웨덴의 고위 참모들이 무엇을 목효로 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그들은 스칸디나비아와 북부독일을 포함하는 프로테스탄트 제국, 즉 남쪽의 카톨릭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는 루터파 제국을 꿈 꾸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웨덴의 혁혁한 승리는 결국 사소한 것이었다. 양측은 불화 때문에 약화되었다. 발렌슈타인은 독일에 있는 스페인의 세력을 싫어하였다. 실제로는 스웨덴인과 삭소니아인의 싸움을 중지시켜 개인적인 담판에 들어가 스스로 독립의 지위를 이룩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마침내 황제에게 망신을 당하고 자기 자신의 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암살되었다. 스웨덴·삭소니 측을 살펴보면 삭소니인들은 단독강화를 체결할 결심이었다. 그러므로 삭소니는 1635년 황제와 "프라그 평화조약"에 조인했다. 독일의 다른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이에 동의하고 스웨덴인의 원조를 철회하였다. 황제는 대체로 復權勅令을 무효화시켜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불안을 완화시켰다. 스웨덴인은 독일에서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국가들은 결속하고 있었으며 종교전쟁은 종말에 가까운 듯 했다. 그러나 사실상 1635년에 와서 30년 전쟁은 시작될 따름이었다. 프랑스도 스페인도 독일의 평화나 화해를 원하지 않았다.
리슐류는 다시 스웨덴인에 대한 보장을 새롭게 하고 부유한 네덜란드인에게 장려금까지 지불하고 프랑스군에 있는 독일인 군대를 우지하기 위하여 독일의 소공자인 삭스-바이마르의 베르나르드를 고용하고 자신이 로마교회의 추기경이면서도 마침내 공개적으로 솔직히 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에게 호의적임을 밝혔다.
그리하여 프랑스인들이나 프로테트탄트 교도들이 희망하던 성공은 최초에는 가망이 없었다 하더라도 결국 프랑스의 왕실은 라인강으로 진출했다. 그 대신 스페인 사람들은 벨기에와 프랑스-콩테의 기지로부터 프랑스로 깊숙이 진격했다. 상파뉴와 브르군디는 약탈되고 파리 자체가 탈취 당하였다. 스페인은 또한 남쪽에서도 공격하여 왔다. 프랑스인은 약탈, 살인, 방화와 가축도둑의 취미가 있었던 것인데 이로 인해 독일은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프랑스인은 곧 전세를 역전시켰다. 포르투갈과 카탈로니아가 필립 4세가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에 프랑스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브라간자 왕가의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했다. 영국, 네덜란드와 스웨덴도 민활하게 인정했다. 프랑스의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건너 카탈로니아로 밀려들어 약탈을 일삼았다. 리슐류는 카탈로니아 공화국까지도 인정했다.
독일에서의 30년 전쟁의 마지막, 즉 스웨덴·프랑스의 전투의 단계는 독일인들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독일영토에서 벌어진 國際戰爭이었다. 당시 프랑스인과 스웨덴인의 편을 든 독일의 국가들도 거의 없었다.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국민적인 분노감정이 나타나기까지 하는 듯했다.
4. 웨스트팔리아조약(1648)
평화회담은 1644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즉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두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의 국가들은 평화, 최종적인 종교적 해결, 신성 로마제국의 "改革"을 호소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국가들이 개인적으로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독일의 제후들이 열렬히 환영했고 황제는 반대했으나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웨스트팔리아에는 수 백명의 외교관들과 협상자들이 제국과 그 회원국들인 스페인·프랑스·스웨덴·네덜란드·스위스·포르투갈·베니스와 다른 수많은 이탈리아인과 교황을 대표하여 모였다. 콘스탄스종교회의 이래 그러한 유럽의 대회는 없었으며 1415년 권력 등에 대한 문제를 취급했다는 사실은 유럽이 얼마만큼 世俗化되었느가를 측정케 하여 준다. 교황의 사절들은 웨스트팔리아에서 회합에 무성의하다시피 하였고 교황도 이 조약에 결코 조인하지 않는다고 논평되었다.
군대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전쟁이 끝날 때마다 각 편이 그 조건을 제기했기 때문에 협상은 오래 끌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전혀 상대방의 강화를 거부하고 사실상 1659년까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1648년 구체화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두 조약에서 타결에 동의했다. 이는 보통 "웨스트팔리아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웨스트팔리아조약은 독일의 국가들에 대하여 그 자신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여 아우그스부르크조약의 조항을 경신할 뿐만 아니라 루터주의와 카톨릭시즘 외에 칼비니즘도 수락될 수 있는 종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1552년 이후 세속화된 교회영토에 대한 대립되는 문제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완전한 승리를 얻었다.
루터의 시대에 국내의 종교적 국경을 설정함으로써 진행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는 이때에 이르러 정치와 국제법상으로도 진행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국경은 와해되었다. 네덜란드인과 스위스인은 여기에 속하지 않고 "聯合諸州"(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여러 주(헬베티아)는 주권국과 독립국으로서 인정되었다. 더욱이 네덜란드인은 셀트강 하류의 두 제방을 차지함에 있어서 셀트강을 大洋航海를 하는 선박들을 위하여 셀트강의 어구를 획득하고 따라서 안트위프에 대한 상업폐쇄가 확인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포르투갈로부터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에 있는 전진기지를 소유할 권리를 얻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서부 국경으로부터 프랑스인은 작은 여러 지방으로 분산되어 한세기 동안 점령했던 로레느의 세 주교구와 매우 복잡하여 뒤에 분규를 일으키게 된 알사스에 있어서의 권리를 얻었다. 스웨덴의 국왕은 브레덴과 베르뎅의 주교구들과 슈테틴 시를 포함한 포메라니아의 서쪽 절반을 얻었다. 이로써 스웨덴은 발틱 횡단의 영지들을 더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하천들의 어구는 당시 비독일인에 의하여 오데르, 엘베, 배제르 등의 강은 스웨덴에 의하여, 라인강과 셀트당은 네덜란드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브란덴부르크가 마그데부르크의 큰 대주교구와 더 적은 두 개의 주교구인 동부의 포메라니아를 획득하고 바바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팔라틴 일부와 選帝侯國의 한 자리를 가져 그 세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8명의 선제후가 있었다.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웨덴·네덜란드 사람들의 최대의 승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영토의 변화에서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자체의 새로운 헌법에서이다. 숫적으로 3백 개가 넘는 독일의 국가들은 사실상 주권국이 되었다. 각국은 외교권을 행사하고 외국의 세력들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웨스트팔리아조약은 帝國議會(Reichstag)에 소집되는 3백여명의 제후들, 성직자들, 자우도시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서는 황제는 황제의 법률을 제정할 수 없고 세금을 올릴 수도 없으며 군대를 유지할 수 없고 선전포고나 평화조약을 비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한 동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자치나 중세적인 헌법상의 자유의 원리는 효과적인 정치의 내용으로서 제국까지도 파괴하는 데 이용되었다. 대부분의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국왕의 절대주의 밑에서 단결되고 잇는 동안 독일은 "봉건적 혼돈"속에 빠졌다.
웨스트팔리아조약은 반동종교개혁을 봉쇄하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좌절케 하고 약2세기 동안 독일의 국민적 통일을 지향하는 어떠한 운동도 앞질러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근대 유럽의 "國家體制(Staaten System)"라는 국제법의 출현을 명시했다. 웨스트팔리아에 모인 외교관들은 아무런 우월한 유대나 공통적 유대도 안정하지 않은 독립열강을 대표했다. 아무도 그 이상 더 유럽이 종교적·정치적 혹은 기타 어떠한 의의 깊은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위정자들은 그러한 어떠한 통일의 부재를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속에서 "普遍君主國(universal monarchy)"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유럽은 고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추종하고 동맹을 형성했다가 해체하기도 하고 대가와 공사를 교환하면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번갈아 나타나며 변하는 勢力均衡 때문에 태도를 바꾸고 자기 고유의 원칙에 따라 유동하는 대다수와의 관계가 끊어진 독립국, 즉 자유롭게 분리된 원자인 국가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Ⅲ. 결론
독일은 30년 전쟁 때문에 물질적으로 파괴를 입었다. 사령관들이 통제할 수 없거나 사령관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국내정부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하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傭兵들에 의해 상습적으로 전 지역을 약탈하는 것으로 인해 도시들은 피폐하였다. 마그데부르크는 열 번, 라이프치히는 다섯 번 포위·공격을 받았다. 전쟁 전에 인구가 6천 명인 보헤미아의 한 모직물 도시에서의 시민들은 도주하여 소멸되고 주택들은 파괴되어 평화조약 이후 8년만에 그곳에서는 8백 5십 명만이 남아 있었다. 어느 작은 도시에서 스웨덴의 기병대는 이리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농민들은 군대에 의하여 피살되고 도망하거나 고문을 당하였으며 조금밖에 없는 귀중품들은 징발당하고 농사에 관한 관심을 버려 농업은 파멸되었기 때문에 굶주림이 뒤따르고 이와 더불어 黑死病이 유행하였다. 요즈음의 추산에 의하면 독일의 인구 중 약 3분의 1이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17세기에 있어서는 포화의 효과, 질병 및 영양부족, 주택의 부족 그에 대한 대비책의 결여 때문에 더욱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현대전의 공포는 인류가 과거에 경험해온 공포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독일 자체는 물질적으로 파멸되고, 정치적으로 작은 부분으로 분단되어 오랫동안 유럽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도 못하였다. 중부유럽에 일종의 정치적·문화적 진공상태가 존재했다. 한편 서 유럽인등, 즉 대서양 사람들은 17세기에 와서 유럽문제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그 반면 베를린과 비엔나 주위의 동부독일에서는 새로운 독일인의 절반만의 세력의 연합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30년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宗敎戰爭은 끝나게 되었다. 헝가리나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 있어서와 같이 그 뒤의 몇몇의 전쟁에는 宗敎는 하나의 쟁점으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결코 다시 전 유럽의 정치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논쟁점이 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17세기 말까지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사이에 분할이 인정되었다. 그 어느 쪽도 그 이상 더 상대방을 희생시켜 영토의 획득을 기대하지 않았다.
※ 참고문헌
·서양사개론. 민석홍. 삼영사. 1998
·서양근대사. R.R.파머, J,콜튼. 삼지원. 1987
·케임브리지 독일사. 마틴 키친. 시공사. 2001
·서양문화사. 민석홍.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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