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이원형
우산과 양산이 되어준 허공 세 평
직박구리 지지고 볶는 소리 서너 되
바람의 한숨 여섯 근
불면의 밤 한 말 가웃
숫기가 없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늘 반 마지기
산까치가 주워 나른 뜬소문 한 아름
다녀간 빗소리 아홉 다발
오디 갔다 이제 왔나
고라니똥 같은 오디 닷 양푼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는
덤이라 했다
산뽕나무 한 채 헐리기 전
열흘 하고도 반나절의 기념비적
가족사는 이러하였다
일가를 이루었던 세간이며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덩그러니만 남았다
--이원형 시집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쓸테니}(근간)에서
실록實錄이란 무엇인가? 실록이란 첫 번째로 한 임금의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을 말하고, 두 번째로는 어떤 사건이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는 실제로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음직한 사건들을 인간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낸 실록소설을 말한다.
하지만, 그러나 모든 역사나 전기, 또는 신화와 종교마저도 실록소설에 지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실 그대로의 사건이나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나 전기작가, 또는 시인이나 종교학자도 어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 들은 바가 없으며, 그들이 쓴 그들의 책마저도 그들의 상상력과 거짓으로 쓴 가공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나 전기, 또는 신화와 종교에서의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모든 이야기들은 후세의 작가와 역사가들이 조작해낸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이나 사실은 존재해야 하지만, 그러나 진실이나 사실은 존재하지 않은 채로 존재하며 모든 이야기꾼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어제의 진실과 오늘의 진실이 다르다. 이 사실과 이 진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의 조명에 따라 그 작품의 가치와 품격이 달라지듯이, 어떤 사실과 진실은 글쓴이의 역사관과 그 위치와 입장과 심리적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변주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성인군자와 범죄자, 천재와 바보, 장군과 병사, 적과 동지 등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인간들은 그때 그때의 시대와 위치와 입장에 따라 살아가는 ‘천의 얼굴’을 지닌 배우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고, 우리 인간들은 선천적인 사기꾼이자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원형 시인의 [실록]은 산뽕나무 한 그루의 일대기이며, 이 산뽕나무의 일대기를 시로 쓴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실록]은 산뽕나무의 무덤이자 기념비이며, 그 가족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산뽕나무는 우산과 양산이 되어준 허공 세 평의 집을 짓고 살고 있고, 직박구리의 지지고 볶는 소리는 서너 되가 된다. 바람의 한숨은 여섯 근이 되고, 불면의 밤은 한 말 가웃이 된다. 숫기가 없는 그늘은 반 마지기가 되고, 산까치가 주워 나른 뜬소문은 한아름이나 된다. 다녀간 빗소리는 아홉 다발이 되고, 고리니똥 같은 오디는 닷 양푼이 되고,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는 덤이 된다.
이원형 시인의 [실록]은 “산뽕나무 한 채 헐리기 전/ 열흘 하고도 반나절의 기념비적/ 가족사는 이러하였다”라는 시구가 말해주고 있듯이, 그가 열흘 동안 관찰한 산뽕나무의 가족사를 시로 쓴 소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야수 중의 야수이며,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는 악마라고 할 수가 있다. 산을 깎고 강을 막는 것, 집을 짓고 도로를 내는 것, 농지를 개발하고 무차별적으로 불로초를 심거나 벌목을 하는 것----, 우리 인간들은 주관적인 편견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그가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다 저지르고 본다. 산뽕나무 일가를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모든 신화와 종교와 역사와 전통들을 다 파괴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뽕나무는 큰산과도 같고, 큰산은 성인군자의 넉넉한 품과도 같다. 그 넓은 가슴과 옷자락에 만물을 다 품어 기르고, 그의 오디만큼 달콤한 말과 사상으로 모든 만물들을 다 먹여 살린다. “시 삼백 편에는 사악한 생각이 하나도 없다”라는 공자의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산뽕나무는 천세불변의 성인군자와도 같다. 이원형 시인의 [실록]은 성인군자의 실록이며, 산뽕나무 한 그루의 이야기로 만인들을 심금을 울린다.
거짓말에도 이로운 거짓말과 해로운 거짓말, 또는 아름다운 거짓말과 더럽고 추한 거짓말이 있듯이, 우리 인간들은 진실만큼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음과 양, 남과 녀가 이음동의어에 불과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거짓말 속에서 태어나 거짓말의 젖을 먹고 자라나고 거짓말을 생산해내면서 살아간다. 부처와 예수와 알라와 제우스와 호머 등, 이 신화적 인물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조작해낸 가공의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의 진신사리는 히말라야의 설산보다도 더 많고(크고), 전지전능한 예수는 천년, 만년이 지나도 되살아나지 못한다. 호머는 최초의 서사시인이자 최후의 서사시인이기는 커녕, 눈 뜬 장님이자 인간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의 세계는 거짓말의 세계이고, 우리 인간들은 이 거짓말의 역사와 전통을 창출해내면서 더욱더 아름다운 ‘산뽕나무(성인군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모든 시는 거짓말이고, 이 거짓말이 실록으로 정체를 드러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을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미화시켜 나간다. 이원형 시인의 산뽕나무의 일대기, 그 아름다운 소우주는 그러나 너무나도 슬프고 허무하게 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아, 이 디지털 인공지능의 시대에, 그 어디 가서 산뽕나무(성인군자)의 소우주를 찾아볼 수가 있단 말인가?
첫댓글 선생님의 <실록>을 읽고 참 행복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 지난 해 가을 <<애지>>를 통해 등단하였으나 아직까지 어디가서 시인이라고 말 한 마디 꺼내보지 못한 새내기 이용우 촌놈입니다.
시를 배우자마자 등단을 했기 때문에 시로 인한 기쁨을 "어디 갔다 이제 왔나 / 고라니똥 같은 오디 닷 양푼" 이라고 선생님이 노래하신 '오디 닷 양푼' 만큼이나 알까요? 선생님의 다른 작품을 통해 그 앎이 더 깊어지고 커지길 소망하며 시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