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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과 황당 사이
우리가 쓰는 한자어 중에는 평화·화평이나 호칭·칭호 또는 정욕·욕정처럼 그 글자 순서를 바꿔 써도 뜻이 같거나 거의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당황’과 ‘황당’도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되면 당황하게 되므로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래는 별개의 단어인 것이다.
우선 국어사전에서는 ‘당황’은 놀라거나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황당’은 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풀이한다. 기본적인 의미가 ‘당황’은 동사적이고, ‘황당’은 형용사적이다. 그래서 ‘~하다’를 붙여 쓸 때 ‘당황하다’는 동사가 되고 ‘황당하다’는 형용사가 된다. 또한 ‘당황스럽다’는 성립하지만 ‘황당스럽다’라는 말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당황’과 ‘황당’이라는 단어를 실제의 언어생활에서 명확히 가려내어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당황’과 ‘황당’을 잘 구별할 수 있는 사례를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떠도는 것들이 여러 개 있어 왔다. 그중 가장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들면, 한 아주머니가 급한 나머지 길옆에 세워진 트럭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트럭이 갑자기 출발해 버리면 당황하게 되지만, 그 트럭이 후진해 오면 정말 황당하다는 예시다. 재미도 있고 제법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정확한 분석은 아니다. 위 예시와 반대로 트럭이 출발해 버리는 바람에 볼일 보는 걸 들켜 황당했고, 갑자기 후진해 와서 크게 당황했다고 설명하는 ‘짝퉁판’도 있는데, 그런 설명도 딱히 틀렸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큰 트럭이 갑자기 뒤로 돌진해 올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 말이다.
기본적으로 ‘당황’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움직임을 말하나, 그 ‘놀라운 일’은 좋고 나쁘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어떤 가치판단이 전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황당’에는 사전적 의미대로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다’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개입된 형용사적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트럭 운전사가 트럭을 앞으로 운전하건 뒤로 후진하건 거기에 참되지 않다거나 터무니없다는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 습관이 당황할 정도를 넘어 더 놀라운 상태를, 즉 ‘당황’의 비교급 정도의 센 표현으로 ‘황당’을 사용하기도 하나, 위와 같은 사전의 풀이로 볼 때 정확한 사용법은 아니라고 본다.
그 밖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니면서 우리를 웃겨주지만(개중에는 성인판이라 할 정도로 야한 것도 있음), 모두 위 사례가 범한 오류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에서 다른 것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어느 젊은 여자가 쓴 글을 읽게 되었다. 혼자 드라이브를 하던 중 강가에 경관이 좋은 카페가 있어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고 한다. 손님이 많아 베란다 한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아놓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다탁 위에 레몬티가 놓여 있어 순간 당황했단다. 그래서 카페 주인에게 자기는 커피를 시켰으니 커피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황당하게도 그 주인이 “커피보다 레몬티가 건강에 좋으니 그냥 드세요.” 하더란다.
이 예화에서의 일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당황’과 ‘황당’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창작한 것처럼 아주 적절하게 예시하고 있다. ‘당황하다’와 ‘황당하다’를 그 품사에 맞게 정확히 사용했고, 커피를 주문했는데 레몬티가 나온 것은 예상 밖의 놀라운 일로 당황할 만하며, 자기가 잘못해 놓고 손님에게 그 잘못된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억지 논리를 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일이라 할 것이다.
사실 ‘당황’과 ‘황당’은 한자의 글자를 순서만 바꾼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당황은 ‘唐惶’ 또는 ‘唐慌’이라고 쓰고, 황당은 ‘荒唐’이라고 써서 ‘당’ 자는 같은 한자를 쓰지만 ‘황’ 자는 전혀 다르다.
‘唐’은 ‘당나라 당’이라고 알고 있는 그 글자인데, 원래 ‘허풍 떨다’, ‘종잡을 수 없다’의 뜻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어로 ‘唐唐’이라고 하면 걷잡을 수 없거나 허황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떳떳한 모습이나 태도를 표현하는 ‘堂堂’하고는 완전히 다름). ‘惶’은 두려워하다는 뜻이고, ‘慌’은 흐리멍텅함을 뜻하는데 ‘唐’과 결합한 ‘당황’은 종잡을 수 없는 뜻밖의 일을 당하여 놀래서 정신이 나가는 움직임을 표현해주는 단어가 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에 반하여 ‘荒’은 ‘거칠다’의 본래의 뜻에서 ‘다듬어지지 않고 막되다’로, 더 나아가 터무니없어 미덥지 못한 상태를 형용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唐’과 결합하여 황당한 느낌을 잘 표현하는 ‘황당’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당황’과 ‘황당’은 따지고 보면 근원이 다른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황당한 일을 당하여 당황하는 일이 참 많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웬만한 큰일이 닥쳐도 중심을 잘 잡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그런 마음가짐이 종종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태도를 보게 되면 황당한 나머지 그만 당황하게 된다.
한번은 운전을 하다가 네거리의 교통신호가 노란 불로 바뀌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순간 뒤에서 세게 달려오던 차가 내 차를 추돌하는 바람에 나는 잠시 정신이 얼얼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뒤차의 운전자인 젊은 아주머니가 쫓아와서는 나에게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노란 불이면 빨리 속도를 내서 지나가야지 멈추면 어떡해요?”
정말 너무나 황당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 아주머니는 내가 쩔쩔매는 줄로만 알고는 더 쏘아붙인다.
“내 차는 뽑은 지 한 달도 안 됐단 말이에욧!”
적반하장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나는 순간 욕설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한마디 했다.
“황색신호는 ‘녹색신호의 연장’이 아니라 ‘적색신호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교차로 진입 전 황색신호를 마주치면 모든 차는 정지선이 있거나 횡단보도가 있을 때 그 바로 앞에 정지하여야 합니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제6조 제2항!” 했다.
뜻밖에 내가 이렇게 법령 조문까지 들먹이며 당당하게 나오자 그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당황해하면서 바로 기가 죽어서 “그럼 보험 처리하죠, 뭐….” 하고 꼬리를 내렸다.
법률문제를 다루는 직업에 종사하다 보니 나는 검사 때나 변호사 때나 황당한 일을 많이 접해 왔다. 검사 시절에 나쁜 피의자를 많이 수사해 왔지만 자기 이익만을 좇고 남을 위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는 고약한 고소인도 제법 자주 만났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고소인이 피해를 당한 것은 맞는데 형사 건이 될지 단순 민사 사안일지 그 경계가 불분명한 사건이라 그 처분에 대하여 고민을 한 끝에 피고소인을 잘 설득해서 받은 원금만 돌려주는 선에서 합의를 주선하였고 고소도 잘 취소됐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데 검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소인이 따라 들어와 서류를 하나 내미는 것이었다. 고소 취소한 것을 취소하겠다는 문서다. 원금은 받았지만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의 법정이자만 해도 얼만데 그것도 못 받았고, 또 고소하여 조사받고 하느라고 경찰과 검찰청에 여러 차례 출입했는데 그 일당과 교통비도 손해 난 것이니 꼭 받아야 함에도 못 받아서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 억울함 때문에 어젯밤 내내 잠을 못 잤다는 호소까지 한다. 참으로 황당했다.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어렵게 애를 써서 합의에 이르도록 해준 것이 솔직히 약간 후회되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마을변호사로서 무료 법률상담을 하다가 이런 일도 겪었다. 상담신청인이 돈을 벌어보려고 큰돈을 지인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게 뜻같이 되지 않아 처음에 두어 달만 수익금 명목으로 얼마간 받고 원리금 모두를 날리게 된 사안이었다. 사안 자체가 투자금인지 대여금인지 불분명하고, 상대방에게 현재 압류할 재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아 소송을 할 실익도 없어 보여 내가 조심스럽게 구제의 방법이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그랬더니 갑자기 그 민원인은 화를 벌컥 내면서 국가는 국민이 재산권 피해를 입었으면 즉각 이를 복구시켜줘야지 뭘 하고 있냐면서 당장 그 상대방을 구속하고 자기가 손해 본 것을 되찾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사 사건에서 승소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집행할 재산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구속 여부 역시 최종적으로 법관이 결정할 일이나 코로나19 때문에 갑자기 사정이 나빠졌다는 그쪽의 변명이 먹혀든다면 형사 건이 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설명을 드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언성을 더 높이면서 “그딴 소릴 하려면 뭣 하러 여기 나왔어요?” 하는 것이었다. 정말 황당했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낼 수도 없어 오히려 목소리 톤을 낮춰서 공손하게 “사모님께서 어느 정도로 재산적 여유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는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주는 변호사라 서비스의 질이 아주 낮습니다. 그러니까 약간의 비용이 들더라도 훌륭한 변호사님을 찾아가셔서 좋은 법률 서비스를 받아 보시죠.” 하고 다음 상담신청인이 기다린다는 이유로 내보냈다.
이렇게 법률 관련 업무 종사자들은 곧잘 화풀이의 대상이 된다. 돈 벌 욕심에 일은 본인이 다 그르쳐놓고는 그것을 바로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황당해서 당황할 수밖에….
위의 몇 가지 예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당한 경우는 대개 사람의 행위가, 그것도 부당한 처사가 개입된 경우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은 다른 경우보다도 더 당황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부당한 처우를 받아 심한 모멸감, 억울함, 서러움 내지 분함을 느끼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강한 스트레스이기도 한데, 한 조사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특별한 이유 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퇴사 이유를 알아보면 일이 과중해서도, 연봉이 너무 적어서도,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해서도 아닌 바로 직장 내에서 당한 황당한 일 때문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우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회사 중요 사업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세울 때 부장과 상무가 그렇게 억지를 부려 자기들 주장대로 밀어붙여 놓고는 나중에 결과가 안 좋게 되자 엉뚱하게 기안 책임자라고 해서 문책당한 김 과장은 황당해서 그런 조직에서 더 이상 근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다.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황당한 경우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어 하기만 한다거나, 벌컥 화를 내거나,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이를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이 험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심각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황당한 경우를 많이 당하다 보니 나는 그냥 당황만 할 게 아니라는 적절한 방어논리를 개발해 보려는 시도를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당황망조(唐慌罔措: 당황하여 어떤 행동이나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모름)하면 일을 그르쳐 나만 손해니까 말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즉각 화를 내거나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는 것은 내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상처를 받게 되리라고 본다.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욕을 할 때 바로 내가 대들면 저쪽에서도 격한 감정이 상승이 되어 더 세게 나올 수 있다. 내가 의연히 대처한다면 저쪽도 약간 주춤하게 되고, 그러면 조금 생각하며 오히려 반성할 기회도 주는 셈이 된다. 억울하다고 울어버리면 그쪽에서 오해한 것을 그냥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경우를 당했을 때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약한 자는 복수하고 강한 자는 용서한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무시한다.”라는 격언으로 조언을 대신하는 분도 있다. 그렇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너무 쩔쩔매거나 어리벙벙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한 감정이고, 그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선이거나 자존감마저 포기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만 작전상 내 감정을 바로 폭발해 버릴 것이 아니라(바로 반응하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나 곧 후회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조금 숨을 고른 다음 적절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내 주장을 제대로 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한마디로 당황해하지 말고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唐唐’이 아니고 ‘堂堂’이다). ‘당당하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떤 마음을 가질지는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율성을 확인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앞서의 강변의 카페에 갔던 젊은 여자는 매우 슬기로웠다. 어이가 없었지만 짐짓 살짝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카페는 커피보다는 레몬티가 더 자신 있는 모양이죠. 그런데 저는 레몬 알레르기가 있어서 레몬티는 다음에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마시도록 할게요.”
카페 주인은 두말없이 레몬티를 거둬가고 커피를 가져와서는, 자기네 카페는 원래 비엔나 커피가 전문이라면서 아인슈페너 무료 시음 티켓 2장을 함께 놓고 가더란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당황하기만 하고 당당하지 못한 채 너무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 주장이 무엇인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채로 지내왔기에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황당한 일이 점점 더 늘어나기만 하고, 우리는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하고는 또 당황하기만 해 왔다.
그런데 한번 당당해 보자. 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일 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당당해지면 떳떳한 사람들 특유의 객관적 사고가 형성되게 된다. 전에는 자기에게 닥친 황당한 일들이 나만 당하는 일이고 왜 하필 나에게만 이렇게 불행한 일들이 생기냐고 원망 비슷한 감정을 가졌었는데,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펴고 나니까(물론 상대방도 그 나름의 경험과 인생관을 지녔기에 나의 지적이 그대로 먹혀들어가긴 어렵겠지만) 이상하게 자기연민 섞인 원망 같은 것은 사라지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에서 뜻밖의 고난을 만나게 된다는 식의 객관적 시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힘듦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것이라는 식의 보편성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인데, 이 얼마나 건강한 인생관인가. 더 나아가 어떤 때는 나에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짓거리를 한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저 나름대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당황은 당사자의 상식이나 기대 등 익숙한 것과는 다른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보이는 불안정한 정서적 움직임이다. 당황하더라도 곧 바로잡을 수는 있겠으나 일이나 사태를 그르칠 수 있는 리스크가 커져 있는 불안한 상태이기도 하다.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여 일을 더욱 그르치지 말고 잘 수습하기 위해 우리는 미리 마음 훈련을 해 두어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당황’과 ‘황당’에서 ‘황’ 자를 뺀 ‘당당’한 모습을 지켜나감으로써 이 세상에서 황당함이 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
(경제포커스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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