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63
9월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연중 제2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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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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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상대방에게 천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바로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천사(天使)들의 존재는 교부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잦은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지닌 모호함으로 인해 명쾌한 설명이나 해석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천사들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는 신구약 성경 몇 군데에 드러나고 있는데, 대체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개입하실 때 매개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자(使者), 하느님의 사신(使臣), 하느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 편에 서 있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봉사합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명으로 인간 세상에 파견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에게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이름을 지닌 가브리엘 대천사는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파견됩니다.
그녀의 삶에 개입함을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인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치유’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닌 라파엘 대천사는 눈먼 토빗에게 파견됩니다. 그의 병을 낫게 함을 통해 인류의 치유자이신 사랑의 하느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가 하느님 같은가?’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닌 미카엘 대천사는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에 파견되어 악을 물리치시는 승리의 하느님 이미지를 전달했습니다.
척박한 이 세상살이지만 가끔 천사의 모습을 지닌 동료 인간들을 만납니다. 말투나 사고방식,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한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집에서 게임만 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우셨던 선생님은 주말만 되면,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내 접선 장소로 모이게 했습니다.
보통 대여섯 명, 많게는 열 명 내외까지, 생계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동반했습니다. 영양가 만점인 맛있는 간식도 직접 준비해서 산으로 들로, 그렇게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쐬게 해주었습니다.
당신 숙소로 아이들을 데려가서 저녁까지 해먹이고, 집으로 데려다주곤 하셨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2의 돈보스코가 따로 없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가 분명합니다.
솔직히 세상의 좋은 것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살겠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우리 수도자들, 사제들은 신원의 속성상, 맡은 직무에 따르면 천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천사는커녕,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가장 기본적인 역할과 도리에도 소홀하고,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참 아주 부끄럽습니다.
오늘날 이 천사의 역할은 누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을 아무리 올려다봐도 날개 달린 천사는 더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천사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천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바로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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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목하시던 시절,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뼛속까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나 이 세상 좋은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눈을 뜨나 감으나 가난한 사람들 생각뿐입니다. 그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낸다거나 휴가를 가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교 학창 시절, 여름 방학이 오면, 동료 교수들이며, 직원들이며, 신학생들이 모두 장기 휴가를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서 밀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가장 좋은 휴가라고 했습니다.
3년여 전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한 달간의 휴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내 성지순례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거시기 하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 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 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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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BZPkLtOm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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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천사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까?>
민수기 22장에 재미있으면서도 아리송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 임금은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는 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예언자 발라암을 불러와 이스라엘 군대를 저주하려 합니다. 하지만 발라암은 하느님께서 가기를 원치 않으시자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나귀를 타고 떠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이 바뀌셔서 발라암을 죽이려 하십니다. 천사가 칼을 들고 나귀가 오는 앞길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나귀는 천사를 봅니다. 자신과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자 발라암은 말을 안 듣는 나귀를 때립니다. 천사가 더 위협해오자 나귀는 벽으로 붙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나귀를 더 심하게 때립니다. 이젠 막다른 골목에 다다릅니다. 피할 길이 없자 나귀는 주저앉습니다. 나귀가 미쳤나보다고 생각하고 나귀를 죽도록 때립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주십니다. 나귀는 자기가 칼을 든 천사를 보고 피하려고 한 것인데도 왜 죄 없는 자신을 때리냐며 따집니다. 나귀가 하는 말을 듣자 발라암은 그제야 눈이 열려 칼을 들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천사를 봅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 네가 내 앞에서 나쁜 길을 걷기에, 내가 막으려고 나왔다. 나귀가 나를 보고 세 번이나 내 앞에서 비켜났으니 망정이지, 내 앞에서 비켜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귀는 살려 주고 너는 이미 죽였을 것이다.”(민수 22,32-33)
발라암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천사를 볼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나귀가 그를 천사를 볼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나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천사가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자신이 어느 세상에 머무는지 보여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에게 귀신과 대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귀신과 대화한다는 말은 자신이 귀신의 세상에 속해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신기했습니다. 당시 성당 성물방에 ‘하.사.시.’가 꽂혀 있었지만, 제가 아는 한 그 책을 뽑아 읽은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왜 저만 그 책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저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는 파견되어 파견한 사람과 누군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에게는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가 천사입니다. 그 천사를 통해 저는 신학교에 들어와 한 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이유가 나옵니다. 나타나엘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볼 것을 약속하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을 굳게 믿고 거짓말을 안 하려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착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라고 했을 때 저만 들었습니다. 진실한 말은 나귀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천국에 속해있어야 천국의 존재를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알려줍니다. 천국은 거짓이 없는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버지는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 수많은 천사를 내려보내십니다. 그런데 천사를 보는 사람은 극히 일부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언어란 ‘진실’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자기 죄를 고백해야 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성모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감싸는 무화과 잎들을 떼어낼 때 불칼을 든 천사를 통과하여 생명 나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성이 높아지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거짓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저급한 세상에 머물면서 기도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발은 밧줄로 바위에 꽁꽁 묶어놓고 하늘을 날려는 것과 같습니다. 왜 거짓말하면 천사가 보이지 않을까요? 천사는 천국의 존재인데, 천국에서는 거짓말이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 안에서 거짓이 사라지지 않으면 나를 하늘로 이끌어줄 천사를 만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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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천사(天使)’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로써,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입니다. 예언자들은 천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된 길을 갈 때면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면 하느님의 징벌을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과 절망하고 있을 때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시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천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부들은 신학과 교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이단과 이교도와 맞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교부들은 영성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천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 우리들 역시 천사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착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주변에는 천사들이 많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 드리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도 천사들이 있습니다. 매주 친교를 준비하는 성모회원들이 있습니다. 김밥, 비빔밥, 국수, 떡, 빵, 커피, 컵과일 같은 것을 마련합니다. 미사를 마친 후에 교우들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갖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에도 천사들이 있습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은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의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천사가 따뜻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안타까운 사연에 마음을 열고 도움을 주는 분들이 천사입니다. 저도 천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능력이 있고,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는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1년 넘게 제가 있는 신문사에서 브루클린 한인 성당까지 차량 봉사를 해 주신 분도 있습니다. 보험이 없던 제게 치과 치료를 무료로 해 주신 선생님도 있습니다. 낚시해서 잡은 물고기를 나누어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입니다. 그러나 제가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기보다는 천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비록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의상을 입었어도 결코 천사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얀 날개가 없어도, 화려한 의상을 입지 않았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갖지 않았어도 우리는 모두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면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천사입니다. 배려와 나눔이 있으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의 손길로 다가왔다면 어찌 천사로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막연히 잊고 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적성성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컴퓨터를 사려고 했는데 비용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형제님께서 성당엘 찾아왔습니다. 성당 근처에서 군 복무를 하였다고 하면서 컴퓨터를 구입할 정도의 금액을 봉헌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성당엘 찾아오셔서 감사헌금을 봉헌해 주신 그분께 감사를 드렸으며, 살아 움직이는 천사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다른 천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천사는 결코 이론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다정한 이웃입니다. 따뜻한 모습으로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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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7-51: 하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천사는 하느님의 사자들이며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능력들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이다.(히브 1,14) 성경은 자주 이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가 ‘하느님께서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미카엘 천사는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두 번 언급되었는데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을 지닌다. 미카엘 천사는 주로 천상 군대의 장수, 악에 대한 수호자, 임종자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란 뜻이며 다니엘이 본 환시와 예언을 설명해준 대천사이며, 즈카르야와 마리아에게 각각 탄생을 알린 하느님의 사자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하느님의 치유”라는 뜻이며, 토비트를 위해 파견된 천사이며, 시각장애인들의 수호천사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 천사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그들 천사까지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이제 더욱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천사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오가며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전하는 존재라면, 이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사랑과 그분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천사의 모습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으로부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하셨다.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현하려 노력하였던 나타나엘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지녀야 할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우리도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며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복음을 깊이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격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의 천사가 되어 내 삶을 바꾸어준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모두 많은 천사의 도움과 기도로 귀중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오늘 이같이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편 나는 누구의 천사가 되어 그 사람의 삶에 축복이 되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선물이 되어줄 수 있다면 우리도 천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천사의 역할은 계속 나로부터 이어져 퍼져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천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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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
‘대천사 축일’은 대천사들을 공경하는 축일이 아니라, 천사들을 보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경배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축일입니다. 묵시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천사가 또 이어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너의 형제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 하느님께 경배하여라. 예수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묵시 19,9-10) (여기서 “하느님께 경배하여라.”는 “하느님께만 경배하여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히브 1,14) 천사들은 하느님의 심부름꾼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직접 일하시지 않고, 천사들을 통해서 일하실까? 전능하신 분이니 천사들이 없어도 될 텐데...”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됩니다. 탈출기를 보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모세는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대화를 나눈 사람입니다.(신명 34,10) 그런 모세도 하느님을 두려워했습니다.(히브 12,21) 하느님이 원래 무서운 분이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인데,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어서, 인간 쪽에서 감히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위해서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인간들이 두려움 없이 당신을 만나고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은 대체로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겁먹지 않도록.)
사실 천사가 나타나는 일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입니다. 좋은 예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처음에는 ‘낯선 나그네들’로만 생각했습니다.(창세 18,1-2) 그랬다가 그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동안 그들이 하느님의 천사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창세 18,9) 그리고 그 천사들이 나타난 일은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창세 18,16-33) 그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여기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를 뜻하고,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이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나타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 사랑이 낯선 사람에게서 올 수도 있고,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친숙한 사람에게서 올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어떤 식으로 오든지 간에 나에게 오는 사랑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을 주는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받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이 권고를, “우리도 서로 천사가 되어 줍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사랑을 받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은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받은 사랑이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그래서 “사랑이란,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카엘 대천사의 주 임무는 사탄과 마귀들을 물리치는 일입니다.(묵시 12,7)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데, 바로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미카엘 대천사가 도와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마귀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고(루카 1,13),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메시아 강생을, 즉 예수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루카 1,31) 말하자면 가브리엘 대천사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우리가 복음 선포 활동을 할 때 그것을 도와주는 천사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토빗기에 나오는 라파엘 대천사는 ‘수호천사’와 비슷합니다.(토빗 12,12-15) 라파엘 대천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그것은 내 호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그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토빗 12,18) 신앙인은 천사들을 보내서 당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을 날마다 찬미하고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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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사두가이들)과 인정하는 이들(바리사이들, 에세네파)로 나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자리에서 천사의 존재와 역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세 대천사 축일에 오늘 복음을 봉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고 하시자 곧바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 고백합니다.
당시 라삐들은 후기 유다이즘에서 선악과나무와 동일시되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자주 성경과 율법을 연구하였는데, 나타나엘은 그동안 간절히 진리를 찾고 구원을 열망해 온 자신의 내적 투쟁을 예수님께서 꿰뚫어 보셨기에 온전히 승복하여 그분을 메시아라고 고백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나선 나타나엘에게 앞으로 “더 큰 일”, 곧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가 선포한 “사람의 아들”에 관한 계시의 실현을 몸소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조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대로 천상과 지상이 이어진 세상(창세 28,10-17 참조), 곧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하여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통교가 온전히 완성되는 세상을 직접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작은 믿음은 그분 곁에 머무르며 보고 듣고 배우는 가운데 점점 더 큰 믿음과 확신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도 그분께 눈과 마음을 두고 그분 곁에 충실히 머무를 수 있도록, 오늘은 특별히 대천사들에게 전구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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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을 맞아 천사의 임무와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영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천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을 보호하며, 때로는 사람을 벌하기도 합니다. 또한, 천사들은 하느님을 모시는 신하, 또는 군대로 간주되기도 하였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충실히 하였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자기 생각을 조금도 덧붙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진정한 하느님 일꾼의 역할이지요.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천사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희망을 잃고 고통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누구라도 천사 역할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서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어떤 이의 말을 다른 이에게 정확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한 사람은 하나인데, 전해진 내용은 각양각색이지 않습니까?
전하는 사람마다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시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니 불화나 분쟁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이를 그대로 전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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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우체부 역할을 맡았지요. 대표적인 천사가 가브리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한 이유입니다. 또한 천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제대로 고백한 이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볼 수 없다고 여긴 것을 이미 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하여 그분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사를 볼 수 없다고 말하여서도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하늘의 천사가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고백하고 믿고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증거를 대라며 따져 묻겠지요. 그렇다면 간단히 답하세요. 내가 그 증거라고. 그럼에도 믿고 따르고 살고 있는 내가 그 증거라고. 그리고 또 답하세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 보려 노력하는 이가 나라고.
신앙은 도깨비 뿔을 단 이들의 괴기한 신비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늘의 이치를 땅 위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하여 신앙은 자기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 주셨고,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오늘 자신의 삶 안에서 또 다른 십자가를 통하여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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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의 마음속에 담긴 진실한 갈망을 보시고,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요한 복음 1장 45절)으로 예수님을 소개하였을 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복음 1장 46절)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오경은 물론 라삐 문헌들을 연구하고 메시아를 갈망하던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 (요한 복음 1장 46절)라며 그를 예수님께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과 대화에서 자신이 갈망하던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예언서 7장을 상기시키시고, 종말의 광경이 당신에게서 시작되며, 당신의 현존이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하는 구원 성취의 시작임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대천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려 줍니다.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히브리서 2장 7절)
인간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는 우리가 천사들을 통하여 어떤 영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기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이며, 자비로우신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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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천사>
요한 1,47-51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천사>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내미시는
믿음의 손길
하느님께 내미는
사람의 손길을 향한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께 손길 내미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는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께서
사람을 품으시는
사랑의 마음
하느님을 품으려는
사람의 마음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께 마음 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오시는
희망의 발길
하느님께 닿으려는
사람의 발길을 향한
하느님의 발길
하느님께 발길 닿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하느님의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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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들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들 정도의 돈만 있으면, 남들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면, 남들 정도의 가정의 평화만 누릴 수 있다면…. 그런데 그렇게 비교하는 세상의 것들은 결국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이 아닐까요? 즉, 남의 것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은 남과 비교하고 불만을 품는 데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나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 변화해나갈 때 행복을 발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복이 또 다른 행복을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남의 것으로 행복해지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 세속적인 것들이 결국은 남의 것이었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이 세상에 남아 다른 이에게 전달될 뿐입니다.
나의 것은 죽음으로 그냥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사라지고, 대신 사랑의 실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주님께서 모두 기억하시기에 하늘에서도 남게 됩니다. 이렇게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진짜 나의 것입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대천사는 중대한 사건을 전하는 이들이지요.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 같으랴?’라는 뜻으로, 요한 묵시록에 나오듯 우리의 원수와 싸우도록 파견되어 우리가 악을 멀리해야 함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이라는 뜻의 가브리엘은 동정 마리아에게 파견되어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했으며,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뜻의 라파엘은 토비아의 눈을 고쳐 주어서 하느님의 치유를 전해주었습니다.
대천사의 이런 역할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더 철저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것을 구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집중하면 할수록 하늘에 나의 것을 너 많이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없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나타나엘을 향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천사를 볼 수 있을까요? 세상에 나의 것을 만들려고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나의 것을 만들려고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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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천사>
천사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지속해서 전달하고 도와주는 심부름꾼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 파견된 일꾼입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는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써,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 하고 적고 있습니다. 천사란 말은 그들의 정체나 본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직무와 사명을 뜻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의 일에 협조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될 때 우리도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아브라함은 길손을 대접하다 천사를 만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창세 18장), 다니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기도 응답의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다니 8,17) 토비트는 라파엘 대천사를 통해 눈을 뜨는 기적의 축복을 누렸습니다(토비11,4-13). 구약에서 천사론이 전개되는데 하느님의 아들, 거룩한 자, 수호자 등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순수한 영적존재로 나타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루카1,28), 요셉의 꿈에 나타난 분도(마태1,20)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루가 2장14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때 천사들이“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천사는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할 것도 알려주고(마태12,13),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13). 또한 흰옷을 입고 부활을 알려주었으며(마르 16,5), 심판 때에는 그리스도를 옹위하여 나타날 것.(묵시 22,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며 천사들이 영적인 실체라고 가르칩니다.(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선한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이바지한다는 것은 성경과 교회 정통 가르침에 근거한 교회의 신앙입니다.
고‘천사의 존재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천사는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성 바실리오는 말합니다. “모든 신자 곁에는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보호자이자 목자인 천사가 있습니다.” 각 사람을 수호하는 천사들이 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사는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천사가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이미 천사를 만났습니다. 이제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부족하게 보인다 해도, 지금 우리의 일상이 천상의 영광과 기쁨을 만날 자리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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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견줄 수 있느냐?'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만군의 주님 사령관으로 악마를 물리치는 대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영웅’, ‘하느님의 권세’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라파엘은 ‘하느님의 치유자’, ‘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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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우리가!>
우리 교회는 천사들의 존재를 믿을 교리로 얘기하고, 오늘은 천사들 가운데서 대천사들의 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옛날에는 천사 신심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요즘 와서 악마와 더불어 천사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존재를 부정하는 것보다 더 나쁜 곧 얘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천사 문제는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관심하게 되어 버린 겁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 존재마저 거부되고 무관심한 요즘이니 하느님의 천사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세상 너머의 세상 곧 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 세상에만 머물고 이 세상 문제에만 매달립니다.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세상이 세속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천사들이 싸워야 할 것은 악마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영의 세계를 무시하는 세속주의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천사들이 악령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 악령들과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세속주의가 이렇게 천사와 악마 모두 부정하니 실제로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교황님이 몇 년 전 <악마는 존재한다>는 책을 내셨지요. 거기서 “사탄은 하느님을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나라를 증오하면서 세상에서 활동한다.”라는 말씀을 교황님이 하셨는데 증오보다 더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 무시이니, 오늘날의 더 큰 악마는 세속주의입니다.
관건은 이 싸움을 대천사 미카엘에게만 맡겨둘 것인가? 이것입니다. 아니지요. 내 안의 세속주의는 내가 싸워야 하고, 우리 안의 세속주의는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내가! 미카엘 대천사가 되고, 우리가! 미카엘 대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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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시험>
- 예수님을 따르려면 -
말 한마디 천 냥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침묵도 좋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은 더욱 좋습니다. 분위기를 밝게 하는 유머나 청담이나 덕담, 적절한 칭찬은 좋고 감사와 위로, 격려되는 말은 치유의 구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밭 농사가 신통치 않아 약간 상심하는 농장 수사님과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수사님, 배밭 농사에 절대 실망하지 마세요! 믿음의 시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의 시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국은 잘 될 것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시험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어제는 배 수확하는 첫날이었습니다. 마침 예수성심자매회 월모임이 있었고 이를 배려해 농장수사님이 배를 보내주어 미사후 함께 먹었고 사진과 함께 감사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 배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과 미사후 함께 찍은 사진과 예수성심상 사진, 그리고 메시지도 회장 자매님과 주고받았습니다.
“모두가 멋지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사랑의 선물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수님 감사와 축복인사 받으시고 가족 모두가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멘! 신부님!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요즘은 차가 많이 막히네요. 신부님의 사랑을 듬뿍 담고 와 한 달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부님의 따뜻한 기운으로 훈훈한 삶을 살아보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수십 년 동안 공동체를 한결같이 충실히 섬겨온 고마운 자매님입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마음은 그대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이래서 어제 하루 믿음의 시험은 잘 통과한 느낌입니다. 삶은 시험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믿음의 시험입니다.
역시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인내와 공부가 얼마나 믿음의 시험에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미사와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평상시 삶이 미사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수도회 연피정 지도를 하면서도 평상시 삶 자체가 피정준비임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해 갈 때 앞으로의 시험은 물론 최종 믿음의 시험이자 최종의 봉헌이자 순종인 죽음도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믿음의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욥기는 전체가 욥이 믿음의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참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에 주목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정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대로 우리 믿음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 파스카의 여정에 각오도 새로워야 할 것입니다. 익명의 사람들 셋은 우리 모두일 수 있습니다. 이들 셋의 믿음의 시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결연한 포기를 요구하는지 깨닫습니다.
첫째,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없다.” 어디로 가시든지 스승님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준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과연 정처없는 예수님을 홀가분하게 결연히 모두를 포기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오직 하느님께 정처定處를 둔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르는 무소유의 삶,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 쉽지 않은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오늘 이 믿음의 시험이자 과제를 마음에 담고 내 삶의 자리에서 힘껏 주님을 따라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사 청하는 이에게 참 몰인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죽은 이들 보다 산 이들의 일이,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믿음의 시험 문제를 준다면 어떻게 처신할지 오늘 잘 생각하면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또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깊이 깨닫기만 한다면 실제 상황에서는 각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해 자유로이 처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 조문이 아니며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의 시험 문제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이에게 하신 주님의 답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과 비전의 실현에 전념해야 할 사람이 세상일에 너무 관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일에 전념해야 할 제자가 무분별하게 세상의 잡다한 일에 매어 있음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일 할 일 다하고 언제 주님을 따르며, 하느님 나라의 꿈을 펼칠 수 있겠는지요! 이 또한 분별의 문제요, 늘 결단해야 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 최대의 유일한 과제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목표와 꿈이 선명할수록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도 충실할 것이며 믿음의 시험도 잘 통과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역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화두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욥의 둘째 담론입니다. 욥의 하느님 공부와 인내가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공부하여 깨닫는 욥이요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욥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절대 승복하는 욥이요 반역이나 저주의 성향은 전혀 없습니다. 너무나 하느님을 잘 알고 인간인 자기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 무사하리오.”
욥이 얼마나 깊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지, 하느님의 영역을 존중하는지, 또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깊이와 인간의 깊이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 공부 없이 인간은 절대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참으로 혹독한 믿음의 시험을 잘 치러내는 욥의 인내가 참 장하고 놀랍습니다. 평소 하느님 공부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그의 깊은 하느님 공부의 내공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거인 욥이요, 이에 비하면 우리 자신의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빈약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시험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믿음의 시험입니다. 평상시 꾸준하고 한결같은 하느님 공부가, 하느님 나라 공부가, 예수님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한결같이 잘 따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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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우리도 천사가 되자!>
오늘은 '성 미카엘과 성 가브리엘과 성 라파엘 대천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천사(天使)'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오르내리며 우리를 도와주는 '영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잘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늘 이런 천사들의 도움과 보호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미카엘 대천사는 악마와 대적할 때 우리를 도와주는 천사'로,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천사'로, '라파엘 대천사는 병마와 싸울 때 우리를 도와주는 천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세 대천사를 통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깊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미카엘 대천사와 가브리엘 대천사와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필요한 은혜를 간구할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도 천사가 되자!'
이번에 성전 재건축을 하면서 건축기금을 보내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보고 크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천사들입니다.' 한 개인의 집도 아니고, 배둔공동체만의 성전도 아니고, 하느님의 성전이고, 우리 모두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많은 천사를 배둔으로 보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요한1,47-51)을 보면 필립보의 인도를 받아 당신 쪽으로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우리도 거짓이 없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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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LoQP1IxB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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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 51)
하느님의
모든 창조는
아름다운 섭리와
질서로 드러납니다.
영적여정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의 삶입니다.
가장 높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부터
가장 낮은 땅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은
간절하며
아름답습니다.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대천사가
있습니다.
악이 아닌 선이
승리함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대천사는
분명 존재합니다.
아픈 삶을 치유하시어
건강한 영혼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대천사가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통해
우리의 삶은 희망을
되찾게 됩니다.
이처럼
대천사의 역할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름다운 직분을
맡은 분들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 여정이
참된 힘과 참된 겸손
참된 기쁨으로 새로이
채워지길 기도드립니다.
대천사들이시여
매일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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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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