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군함 두 척이 나란히 계류해 있던 부산 영도의 안벽은, 겉으로 보기에 그저 조선소의 일상적인 풍경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장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시간과 제도, 그리고 선택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상징
적인 장면이었다. 한 척은 2007년에 취역한 우리 해군의 독도함이었고, 다른 한 척은 2008년에 취역한 미 해군
군수지원함 아멜리아 에이하트함이었다. 취역 시기는 고작 1년 차이였지만, 두 함정의 외관은 그 세월을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독도함의 선체는 여전히 매끈했고, 아멜리아 에이하트함의 선체 곳곳에는 녹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다는 공평하게
염분을 뿌렸을 텐데,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순히 국력이나 예산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그 녹슨
흔적들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 그 미 해군 함정이 계류한 이유는 한진중공업, 아니 이제는 HJ중공업이라 불리는 중견 조선사가 미 해군의
MRO 사업을 수주했기 때문이다. 한화오션이나 HD현대중공업 같은 이른바 ‘빅3’가 아닌 조선사가 미 해군 함정의
유지·정비·분해 사업을 맡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깊다. 미 해군 MRO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
야 하는 관문인 MSRA(함정정비협약)를 체결하기까지, 그 과정은 혹독했다 한다.
조선소에 설치된 CCTV가 중국산인지 아닌지, 사각지대는 없는지까지 점검하는 미 심사단의 눈길은 집요했다. 항만
테러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은 물론, 하도급업체의 재무 상태와 숙련공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력까지 검증했다니, 그
철저함은 거의 집요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집요함이야말로 미 해군이 수십 년간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유지해 온
비결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나 자신의 기억이 겹쳐진다. 해군 장교로 입관해 처음 함정에 배치되었을 무렵, 해군 내에서는
PMS, 즉 계획정비제도가 최대의 화두였다. 미 해군에서 도입된 이 제도는 “PMS만 제대로 따르면 돌발 사고는 일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되곤 했다. 사고의 원인을 사후에 찾는 대신, 사고가 싹틀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제거하겠다
는 발상이었다. 정비 항목 하나하나를 정해진 주기에 따라 수행하는 이 시스템은 번거롭고 고되었지만, 그 효과만큼은
분명했다.
시간이 흐르며 PMS는 군함을 넘어 일반 상선 회사들로까지 전파되었고, 어느새 일상적인 제도가 되었다. 그렇게 보면
독도함의 매끈한 선체 또한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는 사람의 손을 통해 살아 움직이고,
성실히 지켜질 때 비로소 제도의 얼굴이 외관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제도는 영원하지 않다. PMS가 도입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미국 동부 휴스턴에서
학회 참석차 만난 한 교수와의 대화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미 해군기지가 있는 노폭의 대학에서 온 그 교수는 PMS
의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지금은 예전처럼 그대로 지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는 의외
였고, 또 어쩌면 당연했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비용과 환경, 시대적 조건을 무시한 채 유지될 수는 없다. 예외 없는 법칙이 없듯, 완벽한 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제도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일이 아니라, 그 정신을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응용하는
지혜일 것이다. 녹슨 선체는 방심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효율을 중시한 선택의 흔적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매끈한 선체
역시 성실함의 증거이자, 아직은 감당 가능한 비용 구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부산 영도의 안벽에 나란히 서 있던 두 척의 회색 군함은 말이 없었지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조정하며, 어디까지를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가. 제도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시대의 조류와 현실의 파도 속에서,
그 수단을 어떻게 다듬어 나갈 것인가는 결국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언젠가, 녹슨 선체나 매끈한 외관이라
는 모습으로 조용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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