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완 여행3 - 아스완에서 고물택시를 전세 내어 필라에 섬으로 가는길!
4월 7일 아스완 강변에서 서양인 단체 관광객을 태운 펠루카 를 구경하다가 우린 황혼녁에
타서는 일몰을 보자는 생각으로 뒤로 미루고는 택시를 잡아 필라에 섬 으로 가는데
그냥 편도 택시만 탈 까 하고 생각하다가.... 4월인데도 찌는 듯한 염천 더위에
질려서 만약 돌아올때 택시가 없으면 고생할 것을 생각해 그냥 왕복전세 를 얻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나 선진국 그리고 중국에서는 택시는 미터기 요금 대로 받으니 한명이
타든 4명이 타든 요금이 같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택시들이 합승을 하기위해
3~ 4명짜리 손님은 피하고 한,두명짜리 손님만 골라 태운 적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와 선배님 부부등 우리일행은 4명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가난한 대학생
한 두명이 타는 것 과는 요금이 다른 것 이지만, 마눌은 이걸 이해 못하네요?
기사와 밀고 당기는 흥정 끝에 왕복에다가 필라에 섬에서 이시스 신전을 보는
동안 한시간 대기 요금을 포함해 모두 70 LE (파운드, 1만 4천원) 에 마무리 합니다.
그런데 이눔의 택시가 카이로 보다도 더 심해서 폐차장 가기도 늦었는데, 세상에
앞 좌석은 밖에서는 문이 안 열리고 택시 기사가 안에서 열어 주어야
하네요! 그러고는 택시는 아스완 시내를 빠져 나가서는 강 상류(남쪽) 로
달리는데, 무슨 현대적인 건물이 보이니 이건 아마도 기독교 콥틱 교회 일러나.....
그런데 세상에나..... 택시 오른쪽 사이드밀러는 아예 없네요? 이때 뒷좌석의 선배님이 창문을 열어
달래니 기사가 앞 사물함에서 손잡이를 꺼내더니.... 세상에!!! 네상에!!! 뒷 창문 아래쪽 나사에
끼우고 돌리니 그제사 창문이 내려가네요!!! 이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4년 전에 쿠바
아바나에서 헤밍웨이의 집 가는 길에 탔던 40년 된 낡은 시보레 택시가 이에 비견될 수 있을라나!!!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친미정권인 바티스타를 쫓아내고 미국 재산인 토지와 산업체를 국유화
하는 데.... 이때 쿠바의 4대 산업은 설탕, 커피, 담배 그리고 관광 이었으니, 대개는 미국인이나
혹은 친미파 지주 의 소유니 대부분 국민들은 공원이나 소작농으로 가난했는데, 미국은 1961년
CIA 가 망명한 바티스타 정권의 쿠바인 1,400명을 훈련시켜 미군 함대의 호위로 피그만에 상륙 시킵니다?
하지만 사전에 예상했던 후방의 쿠바인들 동조 시민봉기가 발생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러자 미국은 쿠바에 대한 해상과 경제 봉쇄조치 에 들어가자 농작물과 채소며
육고기, 닭 등을 거의 모두 미국 등지에서 수입하던 쿠바는 식량부족으로 아사자가 속출 합니다.
이때 의사였던 체 게바라 덕분으로 의료진의 의술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때는 러시아에 2천명이나 파견 되었던 의사들도 약품과 마취제가 없어
수술도 중단됩니다. 공산품은 물론이고 석유등 모든 물자의 수입이 미국에 의해
봉쇄되고 미국인 관광객의 쿠바 방문 금지 와 쿠바에 무역차 기항한 배와 그회사는....
앞으로는 미국에 기항할 수도 없으며 미국이 투자한 제3국 기업과도 거래할 수 없다고 하니... 쿠바의
모든 차량들도 석유가 없어 운행이 중단 되었던 것이라? 이에 쿠바는 소련과 교역해서 설탕과
담배, 커피 등을 수출하고 소련과 동구권에서 생활필수품의 수입으로 경제적 안정을 되찾았으나....
1991년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의 몰락으로 수입이 다시 막히고 미국이 경제 봉쇄조치를 한층
강화하여 의약품과 분유 수입 까지 철저히 틀어막자 쿠바는 아사자가 속출합니다.
해서 중국에서 자전거 200만대를 긴급 수입해 교통에 임하고, 병원에서는
마취제 대신에 중국 침술을 수입해 수술하며 약 대신에 약초를 채취해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고기와 계란등 수입이 끊기고 농약과 비료 공급이 끊기자 아바나 시내에서는 집집마다 옥상이나
마당에 스티로폴등 박스에 흙을 담아 지렁이를 키운 퇴비 흙 에서..... 채소를 키워 자급
자족하게 되니 생활은 어렵지만, 그렇게나 심했던 비만은 사라지는 뜻밖의 부수입이 있었으니?
사정이 그러하니.... 옛날에 스무날간 러시아 전국 일주 배낭여행을 함께 했던 선배님
부부와 넷이서 2006년에 다시 쿠바를 배낭여행을 했을 때, 아바나 시내의 도로는
곳곳에 움푹 파인 것을 복구하지 못하고 거리의 집들은 수리를 못해 낡은상태 였습니다.
쿠바 수도 아바나 거리에는 우마차 와 함께 40년 된 낡은 시보레
가 검은 매연을 뿜으며... 굴러 다니는게 신기할 정도 였던
것이니..... 여기 아스완의 고물 택시와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드디어 우리가 탄 택시는 이시스 신전으로 가는 선착장 입구에 도착했는 데,
여기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 이시스 신전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입구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 섰는데 모자며 콥틱 십자가, 신전의 이집트
신들이며 아프리카인 누비아 여인들의 흙 인형 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우선 신전 입장료를 1인당 50 LE 씩 주고 끊고는 선착장에
이르니 십수척의 배가 손님을 태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자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뱃사공들을 물리치고는 우리 4명만 타면
1인당 비용 이 너무 크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타려고 했더니.....
여행사 단체는 한 배에 수십명씩 타는 관계로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 이리 저리 기웃
거리다가 서양인 6명이 타기에 쫓아가서 같이 타자고 햇더니 “프라이빗” 이랍니다!
에전에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3번 산악 열차를 타는데 마지막 3차 열차를 타려고
달려갔더니 온통 일본인으로 그때 저 “프라이빗” 이라는 말로 거절당한게 떠오릅니다.
서양인 그들이야 잘사는 나라에서 관광을 왔으니, 오늘 배삯 몇 푼 아끼자고 낯선 누룽둥이
동양인들과 비좁게 끼여 가기 보다는 그들끼리 쾌적한 여행을 하겠다는 데야!!!
지금은 삼성 가전제품과 반도체에 현대 자동차가 엄청 수출이 되고 한류가 세계를
석권해 한국인들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이집트 여행 당시는 초라한 동양의 작은 나라라....
선착장에서 아무리 둘러 보아도 동양인은 그림자 조차 볼 수가 없고 알맞은 숫자의 서양인도
발견할수가 없는 처지라 어쩔수 없이 우리 4명이 배 한척을 세내는 수 밖에 없게 됐네요?
그런 와중에서도 수학여행온 학생 들이 동양인을 처음 보는지.... 연신 신기해 하며 몰래 쳐다
보기에 아예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그리도 좋아할 수가 없네요!!! 로마의 포로 로마노
유적지에서 멕시코에서 수학여행온 여고생들에게 너희나라 멕시코를 여행한
적이 있다고 말하니 펄쩍, 펄쩍 뛰면서 좋아하며 먼저 사진을 찍자고 말하던게 떠오릅니다.
여기서 좀 느긋하게 기다리면 다른 관광객들과 팀을 이루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 염천 무더위 뙤약볕 에는 견딜 재주가 없으니 흥정을 시작합니다.
처음에 아프리카 흑인인 누비아인 녀석과는 아무리 흥정을 해도 가격이 맞지 않아
다른 녀석을 찾으니..... 이녀석 들이 담합을 했나? 무려 100 파운드를 부르네요?
그 때 저멀리 역시 누비아인 으로 우릴 힐끔 힐금 쳐다보는 눈이 있어 다가 가서는
필라에 섬까지 왕복에 30분 대기 조건 으로 60 파운드에 합의를 봅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금뽁 같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는 드디어 배를 타고 나일강
바람을 맞으며 섬으로 가노라니 돌아오는 배들이랑 바위와 암초 등......
여기 나일강 주변의 경치도 참으로 볼만한 데.... 섬에 가까워지니
신전의 모습 이 나타나기 시작하니 그 운치를 더합니다.
여기 이시스 신전은 원래는 필라에섬 에 있었는 데, 아스완 댐 건설로 일부 수몰됩니다.
필라에섬의 낮은 부분은 물에 잠기어 베니스의 건물처럼 보여 운치가 한층 더 있었다는 데.....
그후 아스완 하이댐 건설이 추진되면서 강물의 수위가 높아져
아부심벨 신전 처럼 물에 완전히 잠길 위기가 닥치자....
바로 이웃해 있는 아길리키아섬 으로 신전을 해체해 옮겨서는 다시 조성 했다고 합니다!
20여분 배를 타고가서는 내리는데... 이 비수기에 어디서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