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복판인 돈암동(敦岩洞) 북쪽 산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흥천사는 일주문에서 '
북한산 흥천사'를 칭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산(北漢山)은 좀 떨어져 보이긴 하지만 성북동과 돈
암동 산자락까지 엄연한 북한산의 일부이다. 다만 도로와 주거지로 인해 서로가 끊긴 듯 보이는
것이다.
흥천사는 신흥사(新興寺)란 이름도 가지고 있으며, 조선 왕실 최초의 원찰이다. 1397년 태조 이
성계(李成桂)가 정릉의 원찰로 창건했으며, 원래는 중구 정동(貞洞)에 있었다.
1. 왕실의 원찰 흥천사의 탄생
1396년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경복궁(景福宮)과 가까
운 지금의 정동 미국대사관저와 러시아공사관터 일대에 그녀의 능인 정릉(貞陵)을 만들었다. 참
고로 정동이란 지명은 정릉에서 유래된 것이다. 능을 도성 바깥도 아닌 도성(都城) 4대문 안에
둔 것은 그만큼 강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탓이다. 또한 그걸로도 성이 안찼는지
부인의 명
복을 비는 원찰 건립을 추진하여 1397년 정월, 정릉 동쪽(덕수초교와 서울시의회 일대로 여겨짐
)에 자리를 닦아 170칸 규모의 흥천사를 세웠다. 공사 감독은 당시 건축 경력이 상당했던 김사
행(金師幸)과 김주(金湊)가
맡았으며, 공사 기간 동안 수시로 현장을
찾아 공역에 동원된 일꾼
들을 격려하고 돈과 식량을
두둑히 내리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그
덕에 공사는 순조롭게 진
행되어 그해 9월에 뚝딱 완성되었다.
태조는 초대 흥천사 주지로 상총(尙聰)을 임명했으며, 그가 좋아하던 조계종(曹溪宗)의 본산(本
山)으로 삼았다. 또한 밭
250결을 내려 절 유지비에 쓰도록 했다.
절이 완성된 이후
태조는 매일 아침 흥천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어야 밥숟가락을
들었다고
하니 사별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종소리로 달랬던 모양이다.
2. 억불숭유(抑佛崇儒) 속에서도 번영을 누린 흥천사
1398년 6월 태조는 절 북쪽에 3층 규모의 사리전(舍利殿)을 지어 절을 장엄하게
꾸몄다. 그리고
통도사(通度寺)에서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당시 조선 유일
의 석가불
사리를 옮겨놓고, 불경과 여러 보물을 두었다. 사리전이 완공되자 태조는 우란분재(
盂蘭盆齋)와
강씨의 수륙재(水陸齋)를 열었다.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자신의 계모(季母)가 묻힌 정릉의 존재
를
입 안에 가시처럼 달갑지 않게 여겼다. 태조가 1408년 승하하자 정릉의 석물을 명나라 사신
의
숙소인 태평관(太平館) 보수와 나무다리였던 광교(廣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하는데 죄다
동원했다. 또한 그것도 모잘라 1409년 정릉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켜 사람들의 뇌
리에서 영원히 잊혀지게 만들었다. 허나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는 절을 잘 지켜달라는 태조의 유
언 때문에 건들지 않았다.
대신 절의 노비(奴婢)와 밭의 면적을 줄였는데, 그것도 태평관을 철
거하면서 남게 된 밭과 노비를 절에 넘기면서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1410년 절을 수리
하고 1411년 사리각을 중수했다.
세종 때는 1424년(세종 6년) 각 종파를 통합 정리하여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삼았
으며, 전답을 두둑히 내려 승려 120명이 상주하는 큰 절로 성장했다. 1435년과 1437년 절을 수
리했으며, 1440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했다. 1441년 3월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
찬회(慶讚會)를 열었으며, 1447년 세종은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했다. 또한 1449년(세종 31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흥천사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
는데, 몇일 뒤에 비가
내려 전국을 촉촉히 적셔주자 세종은 너무 기뻐 절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다고 하니 절의 규모가 얼마나 상당했는지 보여준다.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世祖)는 흥천사에 큰 동종을 만들어 시주했으며, 1469년(예종 원년) 명나
라 황제가 불번(佛幡)을 선물로 보내와 흥천사에 봉안했다. 또한 1480년(성종 11년)에 절을 중
수했다.
3. 흥천사의 비참한 최후
불교를 지원하던 세종과 세조(世祖)가 붕어(崩御)한 이후 왕실의 지원이 감소하면서 잘나가던
흥천사에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연산군(燕山君)은 1503년 궁궐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곳
으로 옮기고 흥천사의 건축자재 일부와 불상을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옮겼다. 그리고 절은 궁
궐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寺) 관아로 삼았다.
1504년 화재로 사리전을 제외한 전각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그 상태로 방치되어오다가
1510년(중종 4년) 3월, 4부학당의 유생들이 불교배척을 외치며 야음을 틈타 불을 지르면서 사
리전을 비롯한 흥천사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왕실의 원찰임에도 유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방화를 저지른 것은 중종과 당시 권력층의 묵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증발한 흥천사의 유일한 생존자인 동종(銅鍾, 보물 1460호)은
동대문과 광
화문을 떠돌아 현재 덕수궁(德壽宮) 광명문(光明門)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
4. 신흥사에서 다시 태어난 흥천사, 다시 정릉과 이웃이 되다.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진 정릉 부근에 신흥암이란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릉이
선조 때 강씨의 후손 강순일의 노력으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1669년 송시열(宋時烈)의 건
의로 정릉을 중수했는데, 마침 신흥암이 정릉과 너무 가까웠으므로 절을 석문(石門) 밖
합취정
(合翠亭)터로 옮기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바꿨다. 그때부터 다시 정릉의 원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승려 성민(聖敏)과 경신(敬信)이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고,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으로 전국 8도에서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했다. 이때 극락
보전과 명부전, 대방(만세루)이 새롭게 지어졌다. 대원군은 신흥사와 정릉이 이웃한 점을 들어
중종 때 없어진 정릉의
옛 원찰, 흥천사란 이름을 쓰게하여 300년 동안 끊긴 옛 흥천사의 유지
를 잇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흥천사는 다시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고, 정릉과 다시 이웃하게 되
었다. 비록 다른
이름을 가진 절을 흥천사로 덮어쓰기 했다는 한계점은 있지만 말이다. 이름 변
경 기념으로 대원군은 '흥천사'란 편액을 내렸는데, 그것은 현재 만세루에 걸려있다. 이곳이 흥
천사 외에 신흥사란 이름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흥천사로 많이
불림) 그외에 1794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이전하면서 새로운 흥천사란 뜻에서 신흥사로 했다는
설도 있다.
흥천사로 거듭난 이후 왕족과 사대부(士大夫), 궁궐 상궁(尙宮)의 발길이 늘었으며, 고종의 아
들인
영왕(英王, 영친왕)도 5살에 다녀가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5.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머물던 원찰, 그리고 현재
조선이 사라지고 35년의 어둠의 시절을 겪는 동안 흥천사는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했다. 6.25시
절에는 격전지였던 미아리고개가 지척임에도 다행히 총알과 폭탄이 비켜가 고종 때 지어진 극락
보전과 명부전 등이 온전히 살아남았으며, 전쟁이 끝나자 순종(純宗)의 황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가 피난에서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 윤씨는
양식 1홉으로 하루를 지냈다고 하며, 그
1홉에서 매일 1줌 씩을 떼어 향과 초를 사들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만세루(대방), 용화전, 독성각
등 8~9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
과 명부전을 비롯하여 만세루와 괘불(掛佛), 흥천사 현판 등이 있어 절의 오랜 전통을 가늠케
한다. 또한 일주문 바깥에는 3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북한산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흥천사는 엄연한 산사이나 턱밑까지 밀려온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
앞에 고즈넉한 산사의 농도도 적지 않게 떨어졌다. 6.25이후 민가(民家)들이 절 부근까지 밀려
왔으나 그래도 서로
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절 바로 남쪽까지 밋밋한 회색 아파트
들이 폭풍처럼 몰려와 절을 굽어보고
있는 실정이며, 절을 둘러싼 삼삼한 숲도 야금야금 줄어들
고 있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의 원찰로 의미가 깊으며, 비록 300년의 공백이 있으나 조선 왕실의 지원으
로 성장한
절의 하나로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워 성북동 길상사와 더불어 도심 속의 산사(
山寺)라 불릴만하다. 아직은 절의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는 많지 않으며, 도심 속에 박혀 있음
에도 한적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멀리 나가기 힘들 때, 잠시 발걸음을 하여 속세
의 오염된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인근에 정릉(도보 20분 거리)과 북악산길,
성북동 등의 명소가 푸짐하게 늘어서 있어 이들을 연계하여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도심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흥천사 찾아가기 (2011년 5월 기준)
*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5번 출구)에서 성북구마을버스 22번(10~15분 간격)을 타고 돈암2동주민
센터 하차. 절까지 도보 3분.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절까지 1km, 도보 15분
* 4호선 한성대입구역(1,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돈암2동주민센
터입구(흥천사)에서 하차, 성북구마을버스 22번을 타거나 도보 10분
* 절까지 차량 접근 가능하며, 절 밑에 주차장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595 (☎ 02-921-1626) |
첫댓글 절에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맛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
절밥도 괜찮습니다. 저 같은 영세민들에게는 진수성찬이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