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리라 불리는 세금 징수원들은 일반 유대민중에 의하여 개와 같이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세금 징수원인 세리들은 로마 총독에게서 할당된 양의 세금을 국민들에게서 받아내기만 하면, 세리 자신을 위하여 얼마간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자연 부당하게 많은 액수의 세금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징수하여 자신의 뱃속을 채우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의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에 “산중에는 사자가 있고 성안에는 세리가 있다”라는 동요가 보여주는 것처럼 세리라는 직업은 극도로 멸시받던 직업이었습니다.
삭개오 역시 국민들에게 얼마의 세금을 징수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사리 사욕을 위해서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곤 했습니다. 자연히 그는 점점 이기적이 되었고, 돈의 노예가 되었고, 일반 백성으로부터 멸시와 원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성경에 그는 키가 매우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가 살던 마을에 오셨을 때 뽕나무위에 올라가서 보아야 할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매우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콤플렉스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던 세리의 직업을 선택하게 한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도 한번 생각하여 봅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피했습니다. 그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친절한 자들은 세금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덜 낼까하는 아첨장이들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그를 걱정해주고 기도해주는 진정한 친구하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리라는 직업을 통해서 얼마간의 부는 축척 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영혼은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종교인인 바리세인들은 그런 그에게 영혼의 안식처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기는커녕 그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기만 했습니다. 이 바리세인들은 자신은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을 남에게 강요하고 자신의 외식을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거룩으로 포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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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그런 고통 중에 있는 세리 삭개오를 찾아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장이었던 그를 보시고 배척하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처럼 죄인이라 먼저 정죄하시지 아니하시고 “오늘 너의 집에 좀 머물러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멸시받고 관심 받지 못했던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를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 같은 것 누가 거들 떠나 볼까. 관심이나 가져줄까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나 같이 못나고 가정 환경도 좋지 않은데 남학생이나 여학생이 관심이나 가져줄까? ” 그렇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그 생각은 사실입니다. 반드시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과 같이 무능하고 힘없고 배경 없는 사람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이기적인 세상은 오직 잘 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텔레비전을 보세요. 모두가 잘 난 사람들만 대접받고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도무지 능력 없고 힘없는 사람은 있으나 마나한 세상입니다. 얼마 전에도 돌볼 사람이 없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죽은지 열흘이나 지나서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이 세상은 힘없고 쓸모 없는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 일반사람들이 멸시하던 ”이방인, 세리, 창녀들에게 관심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고아와 과부와 사회에서 멸시받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분은 연약하고 볼품 없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관심과 사랑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이 가지는 학벌, 외모,가 정 환경같은 것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외로운 세리장 삭개오를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오늘 밤 너의 집에서 유하여야 겠다라고 하신 것처럼 멸시받고 고통받고 힘없는 우리들을 주님은 사랑하시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 사람의 외모나 조건이나 능력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오실때에 “내가 너의 죄를 탓한다”라고 하시지 아니하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목적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고 처벌하고 지옥에 보내시기 위해서 오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오늘 밤 너의 집에 내가 유하여야겠다“ 곧 ”내가 이제부터 너와 함께 하여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간음하다가 벌거벗긴 채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한 한 여인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의 사랑을 넘보던 여자였습니다. 유대의 율법에는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히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무서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의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자라나면서 모세의 오경 즉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며 자라납니다. 이 여자는 자라나면서 실제로 그렇게 돌로 쳐죽임을 당하던 사건을 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런 간음하던 여인을 경멸하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느 덧 자신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 지금 옷이 벗긴 채로 끌려 왔습니다. 이 여인은 “이게 꿈일까? 이것이 정말 나의 이야기일까?” 라고 순간 남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수많은 성난 군중들이 둔탁한 돌을 들고 금방이라도 자신을 내리 칠 것만 같은 군중들 앞에 이 여인은 끌려와 비참하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SFC 회원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이 범죄 했거나 실수했을 때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웃지 마십시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죄를 손가락 질 했다가 내가 그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다시 간음한 여인에게로 이야기는 돌아갑니다. 순간 여인은 자신을 끌고 온 억센 남자들의 외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절과 4절에는“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 넣기 위하여 지금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여자를 이용합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이 여자를 만약 예수님이 구약에 기록된 율법대로 “돌로 쳐죽여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지금껏 사랑을 외치고 용서를 외치던 예수 당신이 매정하게도 이 여자를 돌로 쳐죽이라고 하는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을 비웃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용서하고 그 여자를 살려 주시요”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 모세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라고 말하는 자”라고 몰아 붙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 넣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에서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지혜롭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뒤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모두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서로를 쳐다보고 자신의 손에 들린 돌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윽고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서 어떻게 대응하실까를 엿보던 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 상황을 기록합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돌로 쳐죽일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수많은 사람들과 웅성임이 있던 그 자리에 오직 간음한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삭개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여인의 죄를 지적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진심으로 불쌍이 여기셨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 상황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이 간음한 여인에게도 죄를 지적하거나 죄의 댓가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 있다라고 처벌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처벌하고 형벌을 주실 목적이면 하늘의 보좌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처벌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그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친구들이 죄를 짓고 그 죄에 죄책감을 가지고 인생을 자포자기하라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죄를 탓하기만 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죄를 미워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과 죄를 짓고 난 다음 용서의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인간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죄는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나 저나 여기서 죄를 안 짓고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늘 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기독교는 죄에 대한 용서가 있고 죄인이 살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 죄로부터 자유로워 지는지를 제시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그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인간을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 세리와 창녀와 고아와 과부들의 친구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언제나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의 편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사회의 힘있는 지도층들과 거짓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힘있는 자들의 반대편에 서셨기 때문입니다. 회교를 일으킨 마호멧은 사회의 지배층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25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두배나 나이 많은 한 부자과부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주의 주인 이시면서도 겸손하게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주님은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의 길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나 짐짓 자신이 종교적인 열심과 구약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바리세인들이나 똑같이 죄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같은 죄인들끼리 판단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예수님에게는 세리나 창녀나 바리세인들이나 모두가 극악무도한 죄인일 뿐 죄가 많고 적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로 용서하여 주실것이었습니다.
판단은 누가 합니까? 우리들에게 죄가 “있다 없다”를 말하는 권리가 있는 존재는 누구십니까? 그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분은 이 땅의 판검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신 것입니다. 또 그 죄를 진정 용서할 수 있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한 사람이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합시다. 그는 체포되어 20년 간의 징역형을 치르고 출감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 값을 형무소에서 치렀기에 자신의 죄와 그 양심의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권자이시오 우주의 창조주요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살인범이 형무소에서 형을 살았다 해도 여전히 그 살인죄는 남아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도로 살려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그 살인범의 죄의 댓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인범의 죄의 댓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판사는 그 살인범을 위하여 죄의 댓가를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죄의 댓가를 치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죄없다고 하시면 누가 우리를 죄있다 정죄할것입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누가 우리를 “죄 있다” 라고 할 것입니까? 창조주이며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죄 없다”라고 하시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것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대신 죽어주신 그 사실을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곧 그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믿는자에게 우리는 죄 사함을 얻었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오늘 제가 예로 든 이 두 사람 세리장 삭개오와 간음한 여인은 분명히 죄인입니다. 유태인의 율법은 이런 사람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이 용서는 그가 재판장이실 뿐 아니라 장차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대신 받아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간음한 여인의 죄를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데 이 세상 그 어떤 존재가 우리를 죄있다 할것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신 속죄하심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와 죄의 값인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이미 2천년 전에 다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나 자신에게 받아들여 믿는 가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그 세리장 삭개오나, 자신의 남편을 속이고 남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그 여인을 예수님이 무조건 용서하여 주셨다면 도대체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용서받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붙들고 지옥을 보내겠다고 협박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때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삭개오와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죄인인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에서 버려진자들을 먼저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들과 딸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능하고 못난 우리를 결코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무능한 자를 쓸모 없다고 비웃을 뿐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과 잘난 자들이 움직여 가는 세상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천부적인 지능과 타고난 가문, 학벌이 사람의 일생을 존귀하게 하든지 짐승만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든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배처럼 여기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 연약한 사람일수록 더 관심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2000년 기독교 교회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던 열 두 제자는 모두 배우지 못하였고 인격적으로도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글도 모르던 무식한 어부였으며 성격도 급하고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그를 수제자로 삼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성자 어거스틴은 30세까지 세상의 환락과 사탄의 종교를 쫒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세기의 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구두방 수선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설교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그를 세기의 부흥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악독한 세리장 삭개오, 간음한 정욕의 여인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신 그 주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빚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