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읽기백태
"하나 둘 셋,,,."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초읽기는 피를 말린다고 한다. 요즘 한창 붐을 타는 인터넷 바둑을 두어본 아마추어들도 실감을 해보았을 것이다. 한참 삼매경에 빠져 나름의 최선을 찾다가도 옆에서 들려오는 저승사자의 호통에는 그 어떤 베테랑도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귀신같은 프로들의 바둑에서도 어김없이 초읽기 소리는 흔한 장면이며, 그들도 결국은 사람인지라 초읽기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프로들의 전장을 찾아가면 심심찮게 초읽기에 관한 에피소드를 만날 수 있다.
지난달부터 한국기원에는 새로 도입된 계시기가 선을 보였다. 한국기원의 방침으로는 계속 그 계시기를 공식대국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인원감축과 공정한 초읽기관리라는 두 가지 이유 탓이다.
사실 그간 초읽기는 사람이 직접 불러주는 것이 리드미컬하고 그 독촉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수를 더 읽어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괴물이 등장하자마자 실력이 아니라 실수로 대국을 그르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되었으니, '웃지 못할 우스운 일'이 최근 수차례 일어나 화제가 되었다.
신라면배 국내예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신라면배는 제한시간이 각자 1시간이요 초읽기는 드라마틱하게도 1분 1회. 즉 각자 1시간의 자유시간이 지나고 나면 초읽기를 하게 되는데, 1분 1회라면 1분 동안 다음 착수를 않으면 곧장 시간초과패로 끝난다는 규정이다.
프로바둑이 점점 속기화하고 있지만 제한시간이 1시간이면 '번갯불 콩 구워먹기' 수준이다. 아마추어들에게 서너판을 둘 수 있는 시간이지만.
말이 예선이지 신라면배는 국가대항전으로 5명의 국가대표를 뽑는 과정이요 대표로만 뽑히면 2천만원 이상의 거금을 만질 가능성이 거의 8할은 되니 프로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한 기전이었다. 당연히 마주앉은 기사들의 머리사이로는 고뇌의 전파가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지금까지 3명의 예선통과자가 가려졌는데 그 3명은 4인방으로 대표되는 정상그룹이 아니고 최철한 박영훈 최명훈 등 신진기예들이다. 그럼,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등은 다 예선을 탈락했는가. 그렇다. 보기 좋게 탈락했다. 그럼 우리 젊은 기예들이 그렇게 성장했는가? 한꺼번에 정상기사 3명이 모조리 탈락할 만큼.
꼭 그런 건 아니었다.
<2>초읽기백태
신라면배 예선에서 조훈현과 서봉수는 사실 실력으로 졌다고 하기엔 좀 석연찮은 점이 뒤따른다. 바로 처음 등장한 묘한 기계, 계시기의 초읽기 탓에 바둑을 그르쳤기 때문이다.
조훈현과 최명훈의 대국광경이다. 최근 좀 슬럼프라곤 하지만 조훈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피디한 바둑이며 '번갯불 바둑'의 일인자. 바로 지난달 그는 아시아 TV선수권에서 이창호를 꺾고 아시아 최고의 '빠른 손'으로 우뚝 솟은 바 있다.
조훈현은 바둑을 당연히 속기로 치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계시기의 시간은 자신이 훨씬 많이 쓴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속기전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요 생명이다. 제아무리 감각파이지만 조훈현은 상대보다 시간을 더 많이 쓴 것으로 나타나 있는 이 계시기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인은 자신이 한 수를 착수하고 난 다음에 계시기의 단추를 눌러서 자동으로 상대방에게 시간이 흘러가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만 깜박깜박 까먹고 조훈현은 단추를 누르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그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자신은 1초만에 두고 상대방은 20분을 장고했다고 치자. 그럼 당연히 자신이 20분을 생각한 것이 되고 상대방의 계시기는 1초만 흘러갈 뿐이다.
조훈현은 자신이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몇분 씩이나 지나고서 알아차리니 그건 또 하나의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었다.
한 수를 겨우 생각해내고선 '휴우' 하고 여유를 찾는다. 그러다 어쩌다 눈길을 준 계시기-. '아뿔사, 또 단추를 누르지 않았구나.'
이런 속앓이를 수십차례. 그러다 보면 제한시간 1시간으로는 불과 몇분밖에 남지 않는 괴상한 상황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훈현에게 금방 초읽기 시간이 다가온 건 불문가지. 바둑은 이제 중반인데 벌써 초읽기라니,,. 물론 1분이란 시간은 한 수를 갖다 나르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수십년 동안 익숙해진 초읽기 방식에서 거뜬히 살아남은 인물이 조훈현이다.
그런데 중반을 넘기던 어느 장면이었다. 운명의 장난이 벌어지는데, 조훈현이 돌 통에서 손이 나가 바둑판에 착륙하려는 순간 계시기는 희한한 소리를 내뱉는 것이 아닌가. "열!. 시간패입니다."
<3>초읽기백태
프로레슬링을 보다보면 상대를 캔버스 위에 드러눞이고 육중한 체구가 프레스를 가하면 심판이 '원, 투'를 외친 후 '쓰리'를 외치기 직전 반동을 이용해 궁지에 몰린 선수가 일어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잘 짜놓은 각본이긴 하지만 우리는 맘속으로 '쓰리'를 외치는데 얄밉게도 '쓰리'는 잘 불려지지 않는다.
사실 프로바둑에서 아무리 시급한 중차대한 장면이라고 해도 "마지막 10초입니다. 하나 둘,,,,아홉 열!" 이렇게 끝까지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조훈현은 그 저승사자 계시기의 "열!"이란 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필자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여덟' 소리에 돌통에 손이 갔고 '아홉' 소리에 돌이 반상에 착륙했다. 그리고 착점이 되었다. 보통 때 같으면 아무 탈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착점을 하고 계시기 단추를 눌러야 하므로 착점 후 손길이 계시기로 가는 도중에 그만 계시기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열' 소리를 부르고 만 것이다.
조훈현의 시간패는 아마도 그가 30년 프로생활을 통해 처음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그런 일을 당한 적은 없다. 조훈현의 시간패는 익숙치 않는 계시기의 초읽기 리듬에 감각이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TV나 바둑잡지의 대국사진을 보면 대국자가 마주 앉아있고 기록계와 계시계가 병풍처럼 뒤에 대기하고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선이상의 중요한 시합만 두어본 '귀족' 조훈현은 자기가 스스로 계시기를 눌러본 기억이 거의 없다. 따라서 조훈현이 새로운 '흉물'의 단추 누르기를 당연히 잊을 법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이 기계라는 놈은 인정사정이 없어서 아홉 다음에 약간의 인터벌도 없이 똑 부러지게 '열' 이라고 부른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사실 사람이 불러주는 초읽기는 낭만이 있다. 흔히들 하나에서 열까지 읽는데 10초가 걸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15초쯤 걸린다. 그리고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면 인정이 또 좀 가미되어 '아홉, 반의 반'도 알게 모르게 통용된다.
그렇게 낯선 기계에게 당한 기사가 조훈현 이외에 서봉수 김승준 등 한국랭킹 10걸 안에 드는 초호화배역이었으니, 기력보다는 기계가 우선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바둑가의 유행어로 자리잡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초읽기에 얽힌 에피소드 중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 또 있으니 속기의 달인 김희중에 관한 얘기다
<4>초읽기백태
김희중은 정창현 서능욱 정대상 등과 함께 한국바둑 속기파의 4대 거두로 꼽힌다. 정창현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김희중은 작년에 한국기원 기사직을 은퇴했다. 김희중은 현재 인터넷 바둑사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국기원 소속 40명의 기사가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으니 그의 수완은 이미 바둑가에서 정평이 나있다.
그런데 김희중이 수완 말고 이창호 조훈현을 능가하는 실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초속기파로서의 재주다. 김희중은 전성시절 정창현과의 대국에서 불과 10분여만에 대국을 마친 적도 있을 뿐 아니라 후배 서능욱과의 대국에서도 기록계가 기보를 작성하기 힘들 정도의 번갯불 콩 볶아 먹기로 바둑을 해치워버린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니 그가 인물은 인물이었다.
그중 백미는 타이틀이 왔다갔다하는 결승전에서 벌어진 촌극이다. 지금은 위성채널로 옮겨졌지만 80년대 KBS바둑왕전은 상당한 인기였다. 일요일 정오쯤 방영이 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향의 수백만 바둑팬의 이목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김희중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원맨쇼를 했으니 그것은 시간초과패였다.
82년도의 일이다. 당시 조훈현과 김희중은 KBS바둑왕전 결승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조훈현이 당대 최고수임에 틀림없으니 속기에서만큼은 김희중이 아직 밀리지 않는다고 수많은 팬들은 믿었다. 그리하여 결승전 3번기는 일요일 한낮임에도 바둑의 인기가 여느 연예프로보다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듯 수백만의 바둑팬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제1국은 김희중이 패해서 0:1. 3번기로 우승자를 가리니 제2국은 김희중으로서는 막판인 셈이다. 그러나 김희중은 수백만팬들의 응원열기를 받아 국면을 유리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TV속기전은 방송을 본 팬들은 알겠지만 한 수를 두자마자 곧장 초읽기 독촉이 닥친다. 볼륨을 낮춰놓은 시청자에게도 시끄러울 정도다. 그날도 두 싸움꾼의 바둑은 전쟁에 비유될 만큼 포연이 자욱했고 계시계의 초읽기 소리도 덩달아 톤이 올라갔다.
당시 계시계는 조영숙 초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유일의 여류프로였던 조영숙씨. 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카랑카랑했다 "하나 둘 셋,,,마지막입니다. 여덟 아홉.."
<5>초읽기백태
"마지막입니다. 여덟 아홉,,,여-어-얼!"
김희중과 조훈현은 '마지막 20초'라는 소리 정도로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남은 10초동안 한 수를 갖다놓기에 충분하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조훈현 김희중같은 초속기파가 아니라도 '여덟'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놀라는 기사는 없다. 사실 돌통에서 돌이 나오는 데엔 0.5초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열!'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혹시 돌이 부주의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확률은 분명히 있지만 필자는 프로들이 중차대한 순간에 돌을 떨어뜨리는 일을 직접 목도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조영숙씨가 불러댄 '여덟'엔 좀 분위기가 묘했다. 분명 어느 한쪽은 초읽기에 몰렸다는 얘기고 어느 한쪽은 어깨를 움칠거리며 돌통에 손이 가야 정상인데 '아홉'이라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두사람 모두 돌통에 손이 가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둘 맘이 없는 것이다. 둘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 자신이 둘 차례가 아니므로.
'아홉' 이란 소리도 사실은 그리 자주 듣는 건 아니다. 조영숙씨의 '아홉' 소리가 들리자 조훈현과 김희중은 빙긋이 서로를 쳐다보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그들은 똑같은 얘길 속으로 던졌을 것이다. '너 왜 안두니?'
"열!. 시간 지났습니다. 시간패입니다."
"누가 시간패입니까?"
"김희중사범님입니다."
김희중은 기가 찰 노릇이다. 그는 여지껏 자신이 아닌 조훈현에게 초읽기를 해대는 줄 착각하고 초읽기 독촉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우두커니 상대의 착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상대가 두었는데 또 두기를 기다릴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지 말라. 사람이 생각에 잠기다 보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더욱이 초읽기 독촉이 자신의 유리한 형세를 상대에게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달콤하게 느꼈다면 그 독촉에 자장가가 되었을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김희중은 그후로도 TV바둑에서 우승도 하는 등 종종 얼굴을 알렸으나 팬들은 82년 그날 이후 김희중만 보면 초읽기가 생각이 아니 날 수 없었다. 낙관파 유창혁도 KBS바둑왕전과 인연이 있다.
<6>초읽기백태
김희중이 타이틀이 걸린 결승전에서 초읽기 착각을 하여 시간패를 당한 일화를 소개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일이 17년의 세월이 흐른 99년 똑같은 KBS 바둑왕전 결승에서 일어났다.
물론 주인공은 이창호와 유창혁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면 그것이 결승전 쯤일 것이라고 알아서 짐작할 것이다. 99년 그들은 속기의 황제자리를 놓고 4강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4강전이라고 해서 그 해프닝의 강도가 결코 떨어지는 건 아니다. 유창혁은 그해 이창호를 꺾고 배달왕에 올랐고 동시에 이창호는 갑자기 성적이 저조해 약간의 슬럼프로 여겨질 때였다.
따라서 속기파이며 낙관파인 유창혁이 한번도 속기전에서 우승을 해보지 못한 한을 풀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물론 이창호만 꺾으면 거의 우승은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낙관파의 거두 유창혁도 김희중 못지 않게 딴 생각으로 한참을 뜸들이고 있었으니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저승사자의 독촉은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수수는 고작 60수 언저리. 그러면 초반전도 예사 초반전이 아니다. 아직도 창창하게 바둑이 이어질 찰나였는데 유창혁은 어찌된 일인지 둘 생각을 않는다.
이미 속기전에서 초읽기를 착각한 몇몇 사례를 경험한 해설자 노영하는 자기가 마치 계시계인 듯 파르르 입술을 떨면서 멘트.
"마지막인데요. 어, 어, 저러면 안되는데, 두어야 하는데요,,"
노영하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고작 60수 언저리면 보통 기보의 삼분의 일도 안되는 수수(手數). 그러면 대국자는 '졌다' 하고 일어서면 그만이지만 해설자는 그 짧은 바둑을 놓고 이 갈래 저 갈래 놓아가면서 시간을 떼워야 하는 것이다.
유창혁은 화면에 비친 모습으로 볼 때 자신의 초읽기를 놓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시간을 지나친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만일 모르고 시간이 지나간 것이면 놀라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할진대 유창혁은 덤덤히 시간패를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어쨌던 초읽기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 가장 유명한 기사가 유창혁이다. 반면 이창호는 그 신중함 탓인지 초읽기의 혜택은 입었어도 실수를 한 적은 없다.
<7>초읽기백태
이창호의 별명 중 하나는 돌부처. 돌부처라면 잡다한 사변적인 사건사고는 모두 소화해낼 수 있는 넉넉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사실 이창호는 초읽기 부분에 있어서도 가장 재미없는 케이스다. 도무지 실수라고는 등장하지 않는 신중파이니 초읽기에서도 인간적인 실수를 하는 법이 없다. 어쩌면 그런 치밀한 자기관리가 오늘의 이창호를 있게 한 제일 가는 모티브였을 것이다.
이창호가 관련된 초읽기 사건이 있었긴 하지만 피해자는 역시 상대방이었다. 90년 한일 TV속기전에서 생긴 일이다.
한일 TV속기전은 한국과 일본간의 속기전우승자끼리 만나서 속사포경쟁을 국제적으로 하던 이벤트 기전이었다. 당시 이창호는 4단이었고 일본의 대표는 유키 사토시라는 젊은 6단. 유키 사토시는 일본의 '괴물' 후지사와가 일본을 이끌어갈 천재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던 유망주.
MBC스튜디오에서의 일이었다. 역시 스피드광들의 게임이므로 계시계의 초읽기 소리는 요란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당시에도 최정상급이었던 이창호에게 일본의 유망주가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가 있었겠는가. 바둑은 갈수록 유키에게는 불리해지고 초읽기 소리는 더더욱 드높아지고 있던 중반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20초입니다"라는 경고가 분명히 들렸는데도(물론 영어로) 유키는 "텐!" 소리가 나도록 착수를 하지 않아 시간패가 선언되고 만다.
사실 머리를 박박 밀며 투지를 앞세운 유키 사토시는 '라스트'란 소리를 안들은 건 아니지만 그 타이밍을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일본식 초읽기와 한국식 초읽기의 문화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유키는 어차피 어려운 바둑이었으므로 그리 애석해 하지는 않았다. 내용으로 진 것보다는 '사건'에 의해 패했으므로 어쩌면 유키는 패배의 그럴싸한 명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건은 이랬다. TV바둑을 보노라면 대국자들 뒷편으로 계시계와 기록계가 앉아있고 남아있는 초읽기 개수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놓여있다. 그 표지판에는 '3'이란 숫자가 있고 한 장을 넘기면 '2'. 또 한 장으로 넘기면 '1'이 나온다. 마치 탁구시합 때 스코어판같이 말이다.
문제는 표지판을 넘기는 방법에서 일본과 한국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8>초읽기백태
사실 초읽기 때 표지판을 넘기는 방법도 어지간한 매니아들도 알지못하며 심지어 프로들도 그 방식에 대해 알 지 못한다.
한국식은 제한시간을 다 소비하고 나서 초읽기가 시작되어도 애당초 표지판의 '3'이란 숫자에 아무런 변동이 없다. 즉 '당신은 세 번의 초읽기 기회가 있다' 라는 뜻으로 '3'이란 숫자를 그대로 표시해둔다. 따라서 한번 30초 초읽기를 사용하면 '2' 그리고 두 번을 사용해 마지막 30초가 남으면 '1'이란 숫자가 나타난다. 만일 시간패가 선언된다고 해도 액면엔 '1'이란 숫자를 남긴 채 시간초과패가 선언될 것이다.
반면 일본식은 초읽기가 시작되자마자 '3'이란 숫자를 넘긴다. 즉 한사람이 초읽기 상태면 '2'라는 숫자가 나타나고 다른 쪽에서 제한시간이 남아있으면 '3'이란 숫자가 나타난다. 반면 한국식으로는 초읽기에 들어갔든 아니든 '3'이란 숫자가 화면에 비칠 것이다.)
즉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면 일본식은 '1'이 아닌 '0'이란 숫자가 나타난다. 물론 기사에게 '당신은 마지막 초읽기입니다' 란 경각심을 나타내는데 '0'이 '1'보다는 좀 더 타이트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필자의 시각으로는 일본식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은가 싶다. 사실 초읽기에 몰린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똑같이 표지판에 '3'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것도 어울리지 않고 '1'이란 숫자는 한번이 남아있다는 의미이지 한번 더 어기면 탈락이라는 의미는 굳이 아닌 것이므로.
다시 이창호와 유키 사토시의 한일 TV속기전으로 돌아가자. 물론 계시계는 영어이지만 분명히 마지막이란 독촉을 전해주었지만 반상에 몰입해 있던 유키 사토시는 슬쩍 표지판을 바라보니 '1'이란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그는 일본서 그랬던 것처럼 30초 한번이 더 남아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바둑도 어렵고 하니 마지막 한번에 몰릴 때까지 열심히 수를 읽겠다고 좀더 깊숙이 반상을 파고들 즈음 파장을 알리는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유키 사토시 선생, 시간패입니다. "
90년에 MBC-TV 화면 속에서 일어났던 초읽기 해프닝은 기사의 인간적인 실수라기 보다는 대회진행 자체의 소홀로 인해 빚어진 촌극이다. 물론 그 뒤로는 국제전 때 어김없이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개시가 된다. 어쨌든 이창호로서는 초읽기 해프닝의 수혜자가 되었고 그 대국은 초유의 국제적 초읽기 해프닝으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9>초읽기백태
흔히 공식대국으로 역사에 남는 바둑은 본선이상의 중요시합이다. 그러나 간혹 예선에서도 초읽기 해프닝은 당연히 발생한다. 그러나 수십년간 프로생활을 한 프로에게 물어보면 그런 해프닝의 주인공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천풍조도 사실은 초읽기의 횡포에 당한 케이스다. 정확히 기전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10변전쯤 2차예선에서 백성호와 만났을 때였다.
예선시합은 일일이 대국막판이 되면 한국기원 직원이나 연구생 그리고 어쩌다 필자같은 손님들도 초읽기 '사역'을 하게 된다. 수십판이 동시에 초읽기 상태이므로 누군가 착수를 재촉해야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초읽기 요원을 비싼 돈주고 대기시킬 수도 없는 일이니. 그러나 주로 초읽기를 하는 주인공은 한국기원 사업부직원이다.
그런데 천풍조와 백성호가 한창 시합에 열중하던 차에 어김없이 초읽기 시간이 찾아왔고 한국기원 직원은 그 대국자들 옆에 바짝 의자를 끌어당겨 초읽기 카운트를 하게 된다.
그런데 천풍조가 둘 차례가 왔고 이 직원은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덟 아홉 열!" 너무나 쉽게 카운트가 이루어졌고 천풍조는 너무 황당하여 채 돌통에서 손을 꺼낼 엄두를 못내었다. 물론 시간초과패.
이 대목은 한동안 천풍조와 직원이 옥신각신 다투기도 하였는데, 요지는 카운트가 너무 빠르다는 것. 직원은 '룰대로' 1초에 하나씩 불러댔다는 것이고 천풍조는 관례를 무시하고 너무 경직된 카운트가 아니었냐는 것.
사실 누구나 초읽기를 해본 사람은 "아홉" 다음엔 "열!"을 불러보고 싶은 '작은 욕망'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 직원이 일부러 부른 것은 아니겠지만 "아홉'이란 소리 다음엔 대국자의 폼을 보고 돌이 옮겨지고 있으면 지긋이 기다릴 줄 아는 아량도 필요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관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직원은 바둑이 아마5단이기도 하였지만 아직 초읽기 카운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지금도 당시 상황을 물으면 자신은 정정당당히 카운트를 했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초읽기는 꼭 10초가 아니라 15초쯤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해프닝이었다.
첫댓글 바람님 글에 이어 올라온 글인듯하네요 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