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7.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사10,5-7.13-16 마태11,25-27
‘주님의 종, 주님의 도구’인 우리들
“거룩한 철부지의 삶”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그 어디든 가까이 내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선택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면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자신에게 떳떳하게 행동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어른이 되고,
일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다산>
다산의 말씀도 멋집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일 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때
참기쁨, 참행복의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군자는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형제에게 탈이 없는 것,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맹자>
역시 맹자다운 말씀으로 주님의 종으로서 손색이 없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닮고 싶은 것은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부끄러움없이 하늘을 바라볼수 있다면 참행복한 주님의 종들입니다.
자주 자신을 성찰하라고 눈들면 어디나 하늘입니다.
18년전 “언제나”라는 고백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언제나
높이보다는 깊이를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드러나기보다는 드러나지 않음을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시끄러움보다는 고요함을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을
부수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이는 것보다는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라!”-2006.
이에 앞선 “수묵화水墨畵처럼” 이란 글도 마음이 끌립니다.
“천연색 사진보다
빛과 어둠이 신비로이 조화된
흑백 사진이 좋듯이
천연색 마음 들떠 가볍게 하는 봄, 여름, 가을 풍경보다는
수묵화처럼
깊고 고요한 넉넉하고 편안한 겨울 풍경이 좋네.”
이래서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는 수도승들은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는가 봅니다.
문득 나이 50이 넘으니 겨울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수녀의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도구로서 묵묵히, 겸손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제분수를 모르고 기고만장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바로 제1독서, 하느님 징벌의 도구인 아씨리아가 제 분수를 많이 벗어났고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에 이어지는 분수에 넘친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질책이요 이와 아랑곳없는
무지한 아시리아의 자기확신입니다.
의인화된 아시리아 제국의 교만한 행태가 오늘의 제국을 보는 듯 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하느님을 망각한 제 분수를 잊은 교만한 제국의 행태요, 정말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습니다.
지도자의 외로움과 고독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각계각층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은 정말 기도해야 할 난세중의 난세입니다.
다시 제분수를 잊은 아시리아의 건방진 행태에 대한 주님의 신랄한 질책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아시리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겸손한 종, 주님의 참 좋은 도구인 예수님이
우리가 본받을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앞서 무도無道하고 사악한 불신의 세 도시를 꾸짖던 자세와는 판이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일한 감사기도이자 찬양기도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당대의 철부지 제자들은 바로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란 젊잖은 호칭이지만 원래 아람어는 “아빠”입니다.
얼마나 아빠 하느님과 친밀한 부자관계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종으로, 도구로 살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바 하늘나라의 신비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는 일상화된 감사찬양기도의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같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 ‘거룩한 바보’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
참 마음 설레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야 말로 참행복, 참부자, 참자유인입니다.
역설적으로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살 줄 하는 진짜 지혜로운 자들은 철부지 제자의 삶을, 주님의 충실한 종의 삶을 원할 것입니다.
이어 우리가 평생 추종하는 예수님의 신원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은혜로이 계시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에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삶의 참보물이자 참행복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종이자 도구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 갈수록 날로 거룩한 철부지의 삶, 겸손과 온유, 감사와 찬양의 삶,
주님의 충실한 종이자 도구로서의 삶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은총이 날로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줍니다.
늘 바쳐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좋아하는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