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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 4. 17. 수요일.
내 고교 여자친구 카페에서 최근에 내가 글을 복사해서 별도로 보관 작업을 하고 있다.
2개월마다 한 차례씩 복사해서 저장한다.
이번에는 163건이다. 즉 2개월에 글 163건이면 하루에 2.7건씩 글 쓴다는 뜻이다.
나한테 글 쓰는 작업을 별것도 아니다. 컴퓨터 자판기를 그냥 다다닥 눌러서 글 쓰면 그뿐이다.
1초에 1자 이상이니 1시간이면 3,500 ~ 5,000자 가까이 쓴다.
아래는 2015. 11. 24. 일기 가운데 '순대국밥' 편만 복사해서 여기에 올린다.
*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국어맞춤법 검사기'로 검색해서 오탈자를 수정해야겠다.
그 당시(1980년대 후반) 나는 사무실에 한영자 회장을 본 적이 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 우리 조직체에 들러서 내 직속상관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체류탄'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다.
인터넷에서 <체류탄 한영자>라는 문구로 검색하니 글 몇 개가 뜬다.
'순대국밥"이란 글도 떴다. 몇 해 전 내가 쓴 글이다.
'1987년 당시이던가? 체류탄을 생산하는 방산업체 <삼양화학>은 그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세금을 냈다. 사장인 한영자.
그 당시 전두환... 국내에서도 엄청나게 시위를 했고, 그 시위대에 처질러댔던 체류탄... 얼마나 많이도 팔았으면 그해 개인별 세금을 가장 많이 냈을까? 인터넷에서 아래처럼 조금만 퍼왔다.
"... 한영자 회장의 소득세 순위는 1982년 16위, 1983년 17위, 1984년 11위, 1985년 4위, 1986년 2위까지 올라갔습니다.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 한영자 회장은 52억 5,300만 원의 소득으로 소득세만 28억 7,800만원을 납부했습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오너를 제치고 소득세 랭킹 1위가 됐습니다. 최루탄이 얼마나 많이 생산돼 판매됐고 사용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순대국밥
'...... '체류탄'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인터넷에서 <체류탄 한영자>라는 문구로 검색하니 글 몇 개가 뜬다. '순대국밥"이란 글도 떴다. 몇 해 전 내가 쓴 글이다.
'1987년 당시이던가? 체류탄을 생산하는 방산업체 <삼양화학>은 그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세금을 냈다. 사장인 한영자.
그 당시 전두환... 국내에서도 엄청나게 시위를 했고, 그 시위대에 처질러댔던 체류탄... 얼마나 많이도 팔았으면 그해 개인별 세금을 가장 많이 냈을까? 인터넷에서 아래처럼 조금만 퍼왔다.
"... 한영자 회장의 소득세 순위는 1982년 16위, 1983년 17위, 1984년 11위, 1985년 4위, 1986년 2위까지 올라갔습니다.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 한영자 회장은 52억 5,300만 원의 소득으로 소득세만 28억 7,800만 원을 납부했습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오너를 제치고 소득세 랭킹 1위가 됐습니다. 최루탄이 얼마나 많이 생산돼 판매됐고 사용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늦가을 날씨 밤 8시에 비 내린다는 일기예보.
낮 동안에는 비 안 올 터.
배낭에 감과 사과 두 조각씩을 담은 비닐봉지와 물병 하나만을 챙기고서는 등산 채비를 마쳤다.
성남시 분당구 이매역.
중학교 친구와 함께 역구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내 맞닿은 등산로.
늦가을 냉기였을까, 울창했던 참나무숲이 휑하니 뚫렸다. 가랑잎이 거의 다 떨어져서 산길을 덮었다.
잎을 떨꾼 나뭇가지에는 갈바람이 걸렸다.
늦가을철이라서 그럴까 등산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곱상한 여인네들 한 때가 바쁘게 산을 타고, 노인 등산객 일행은 산로를 바삐 올라갔으나 친구와 나는 쉬엄쉬엄 걸었다.
숲속에는 짙은 갈색빛나는 작은 짐승이 참나무 숲에서 쪼르르 움직이었다. 청솔모 한 마리.
영장산에는 이 작은 친구가 많이 산다고 친구는 말했다.
오늘도 친구는 듣는 쪽이었고, 나는 수다쟁이처럼 폭포수처럼 주절주절 사회현상과 정치상에 관하여 말을 끈질지게 이어갔다.
지난해 4월 남해 진도 팽목바다에 수장된 세월호 침몰 사건, 아직도 인양 작업도 못하고, 사체 10구는 물속에 잠긴 사건.
정부의 최고 수장은 세월호 침몰 사건 때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보도자료가 없다는 현실에 질타를 했다. 303명이나 떼죽음을 한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이나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무야무야한 리더에 대한...
내 친구는 참다운 군인출신이다.
1975. 4. 30. 패망한 월남전. 월남전에 참가한 한국 군인들. 그 가운데 5,000명이 전사하여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채명신 장군은 장군묘역이 아닌 사병묘역으로 안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았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전직 대통령인 리승만, 박정희, 김대중 이외에 이번 11월 22일 작고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11월 26일에 안장하면 4명의 전직 대통령을 영현하게 된다.
일반 병사는 화장하여 영현당으로, 장군은 8평의 땅에, 대통령은 80평의 땅에 안장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살아서도 계급 차등을 받고, 죽어서도 우대 차등을 받아야 하는지는 더 숙고해야 한다고 ...
나는 보탰다. 1979년 12·12사태 당시의 이야기, 1980년 5월 당시에 내가 어느 곳에 있으면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 서울 중구 교육기관에서 다니면서 체류탄에 눈을 못 뜬 이야기를 잠깐 언급했다. 미관말직이었던 나로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을 했다. 누가 감히 ...
1987년 6월 항쟁 시에 시위대한테 경찰이 쏜 체류탄. 그해 체류탄을 공급한 한영자 사장은 1987년 소득세 1위였고, 그 체류탄은 하도 독해서 해외로 수출할 수 없었다.
한국사람 체질이 세계에서 가장 독해서 그런 체류탄을 맞은 것이 아니다. 그만큰 시위대에 대한 탄압이 비인간적이고, 그게 남한정부 정권이었다며, 한영자의 이름을 메모지에 적어 주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1987년 소득세 1위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겠지.
권력자는 역사와 진실을 늘 숨기고 오도하게 마련이고, 역사는 긍정마인드로 몰고 가고, 진실은 묻힌다고 말을 보탰다.
현행 남한의 국사 국정화에 대한 정부의 일방적인 행태도 비판했다. 1894년의 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탈과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8월의 한일합방에 대한 서울대 역사학자 이병도 사관(史觀)에도 언급했다.
일제가 일본 고대역사가 한국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꾸미려고 조선사 편찬사업을 왜곡하여 편찬했던 이야기도 조금 언급했다. 일제의 주동자보다도 조선인의 편찬인이 과연... 뒷이야기를 중단했다. 다 말할 수는 없었다.
1905년 을사조호조약의 을사5적, 1910년 합방 시의 이완용 등 몇몇의 친일파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나 그 당시 양반계급 700여 명이 찬성하고는 일본정부로부터 엄청난 대우와 재산적 이득을 보았던 사실을 언급했으며, 이런 역사의 비행은 숨긴다는 비화도 곁들였다.
을사5적만 나쁜 사람이고, 나머지 백성과 국민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을까를 되짚어 봤으면 싶다고 말했다.
아닐 게다. 정말로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을 게다. 지금껏 친일파 4,385(?)여 명의 명단이 오르내린다. 그 후손들은 아니라고 항의하겠지만 이를 책자로 만든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 게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 명단은 숱하게 늘어날 게다. 조사가 지속되면... 누구의 시각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극과 극을 달리하겠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군사권과 외교권을 상실한 껍데기 국가였다. 단지 숨만 헐떡거리는 늙은 나라였다. 그 당시의 애국애족했던 독립투사들은 일본의 시각과 구한말 왕권의 시각으로 보면 좌향사람이었다고.
어떤 정치가는 남한의 국사교육자 90%가 좌향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일제시대의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는 좌향이 아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제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을 지금의 왜곡된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완만하게 걷는 산행이라도 숨이 가빠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들이 더 공부해야 할 듯 싶고...
내 친구는 1965년 경의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서 참전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직업군인으로서 성실하게 군 복무를 수행한 덕분에, 퇴직한 이후에도 특별근무지로서 국가기록원에도 3년 넘게 근무했다고 한다. 국가기록원에서는 업무량이 무척 많았으며, 그는 한문을 한글로 편역, 옮기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어쩐지. 그가 이따금 쓰는 핸드폰과 카페에 글을 보면 무척이나 한자어를 많이 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는 한문세대이지만 한문, 한자어는 아주 젬병이다. 대신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애써 쓴다고 실토했다. 쉬운 우리말과 쓰기 쉬운 우리글로써 뜻을 나타내려고 했다. 사실 말이지, 한문 한자어로 글을 쓰면 유식해 보이며, 글맛도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글로만 글 쓰기를 원했다.
산행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몇 개의 산능선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영장산(靈長山) 높이는 413.5m.
내 고향 뒷산 최고봉이 205m이므로 이곳 영장산의 높이라면 나한테는 무척이나 높은 산에 들어갔다.
전문 등산인이야 이런 산은 뒷동산 수준밖에 되지 않겠지만 노인 대접을 받는 세대로서는 이런 산 높이가 건강에 적합하다고 의견을 같이 했다.
영장산은 수도권에 있는 산이라서 멧돼지는 없고 고라니는 여러 번 보았다고 그는 말했다.
멧돼지를 보면 멧돼지를 똑바로 보되, 뒤로 피할 때는 직선으로 뒷걸음치지 말고, 큰 나무를 의지해서 좌우로 몸을 피신해야 한다고 했다. 진선으로 달리면 저돌적인 멧돼지가 공격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멧돼지의 습성을 이해했다. 내 고향 뒷산, 그 야트막한 산에도 멧돼지가 살기에 나로서는 고향 뒷산에 오르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하지만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영장산은 이런 야생짐승이 없어서 다행이다. 사슴보다 작은 고라니가 서식한다니 등산 시 안심해도 될 것이다.
영장산 정상이 가까운 산길 옆에는 돌무더기 하나가 있다. 아직 채 완성되지 않는 돌탑 가운데는 태극기 깃대가 하나 꽂혀 있다.
국기가 반쯤 내려져서 축 쳐져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장에 대한 반기(半旗)다. 전국 많은 산의 영봉에 국기가 게양되었다면 아마 이처럼 반기로 애도할 게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일 게다. 평소에 좋은 치적을 남겨야 할 게다.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는 하나의 정당인으로써 당적(黨籍)을 유지하지만 대통령이 되어 국가원수가 된다면 당적을 버려야 할 터인데도 당원직을 유지한다는 게 문제라고 나는 말했다.
당원이 아니어야만이 국사를 공정공평하게 다룰 터인데도 작금의 정치행보를 보면 하나의 당원으로서 특정 정당만을 위한다는 느낌을 준다.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사안으로 여긴다.
영장산 최정상(413.5m). 1987년에 지적 표지한 곳.
영장산 표석을 중심으로 서서 등산했다는 증거로 사진을 찍은 사람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최고봉을 의미하는 표지석 옆에 서서 증명사진을 찍는 등산객의 행태가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산의 최고봉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은 적은 없다고 기억한다.
최고봉은 어떤 신비로운 신령이 머문 곳이기에 인간이 등정했다, 정복했다는 증거로 사진 찍어야 하는가를 늘 생각하고픈 나였다. 나는 아니다. 늙어빠진 얼굴을 찍기보다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산세 등 산림과학적인 측면에서 사진 찍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남한에 산이 몇 개나 될까?
그는 몇 천 개나 될 것이라도 대답했다. 맞을 게다. 4,000여 개의 산 이름이 있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십만 개쯤의 산이 있을 게다.
예전 시골사람들은 지도가 없기에 구석구석마다 다 이름을 불렀기에 누구나 쉽게 그곳을 알았다. 남한에서 산이 4,000여 개이면, 그럼 이북은 얼마쯤의 산이 많을까? 더 나아가 세계 20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의 산은 얼마쯤일까?
산 이외의 장소는 전 세계에는 얼마나 많을까?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자꾸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인간이 일편생 가고 보고 듣고 안다는 것이 정말로 보잘것없다. 한강에 쌓인 모래에서 한 알 수준이 인간의 지식일 게다. 때문에 나는 외국은 고사하고 남한의 산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모른다. 깜깜하지만 내가 아는 지식과 상식으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인간의 만족은 끝이 없지만 나로서는 현재 속의 여행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돼먹지 않은 엉터리 사색가처럼 옹졸한 나를 옹호했다.
어떤 사람은 외국을 얼마쯤 여행했다는 것을 숱하게 자랑한다.
나로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그래서 위처럼 나를 다독거려야 했다.
하산길.
천천히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갈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공원묘지가 내려다 보였다. 공원묘지가 묵직한 판석(版石)으로 규격화되었다. 사각형의 봉분이 무척이나 크며 화려해 보였다. 죽어서도 꽤나 비싼 무덤에 묻혔다는 증거다.
무덤을 호화분묘로 치장하면 장묘업자는 돈 많이 벌어서 좋겠지만 친구나 나는 고개를 살짝 외면하고 싶었다. 화장한 분말을 작은 단지로 넣어서 집중 보관하거나 수목장 또는 숲에 자연스럽게 살포하는 방식으로 화장처리하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이런 이야기가 주로 오간 이유는 있다.
이번 11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님의 묘역설치가 민간인과는 지나치게 크다는 인식을 들었기에.
하산할 때다.
숲 속에서 계단식 밭을 보았다. 묵정밭. 굵은 참나무들이 잔뜩 들어찼다.
오래전에는 이곳 같은 산속에서도 산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이었다. 혹시 폐사(절간 터)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산밭을 보면서 2015년 11월의 농업인의 고민도 이야기를 나눴다.
금년 11월 내 고향의 쌀값은 80kg 한 가마니가 129,000원이다.
2013년에는 165,000원.
2014년에는 150,000원
2015년 올해에는 129,000원이다.
해마다 쌀값은 하락하는데 정부는 외국과의 무역협정으로 연간 40만 톤(백미 500만 석)을 사 온다.
현재 재고량도 2,000만 명의 국민이 1년 내내 먹을 만큼 쌓여 있다. 소비할 방법으로 앞으로는 가축 사료까지도 고려 중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친구는 놀랬다. '어찌 사람이 먹은 쌀을 짐승을 먹이는 사료로 쓴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현실은 자꾸만 그쪽으로 나간다. 쌀이 남아도는데...
2015. 11. 14. 서울 시민총궐기에서 전남 보성의 백씨 농부(68세)는 서울 올라와 데모를 하다가 물대포로 안면을 직사당하여 현재 사경을 헤맨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그만큼 쌀값, 농작물 가격이 천대를 받으니까 데모라도 해야 하는 현실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숲속에 버려진 산밭을 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묵은밭은 묵정밭이라고 하는데 서해안 내 고향의 뒷산에서 사정은 똑 같다. 논과 밭이 묵혀서 이제는 산이 되었고, 멧돼지나 출몰하는 농촌의 현실이 되었다. 그만큼 농작물 가격이 천대를 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남한 농업의 문제점을 살짝 꼬집었다.
농민 270만 명, 농가 1가구당 경작면적 1.5ha(4,500평). 논 마지기 200평으로 계산하면 22.5마지기이다. 이보다 많은 농민도 있지만 이보다 훨씬 적은 농토를 소유한 빈농도 수두룩하다는 뜻이다. 평균이란...
논 1마지기에서는 예전, 내가 1972년~74년 당시 농사를 지을 때에는 쌀 3가마니 나왔지만 지금은 4가마니가 나온다. 경지정리, 비료, 농약 등으로 농업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벼 수확량이 많아졌으나 농촌생활은 오히려 더 가치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쌀이 모든 농작물 가격의 기준이 되었으나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말했다.
또 1960년대의 머슴(일꾼 아저씨)의 새경도 말했다.
머슴은 24시간 주인집에서 자고 일하는데 일년 새경을 정초에 받으면 쌀 8가마니이고, 가을에 벼 바슴이 다 끝난 뒤에 받으면 쌀 12가마니라고 말했다.
2015년 시세로 이를 환산하면, 정초에 미리 받으면 쌀 8가마는 1,032,000원이고,
농사 다 끝난 뒤 년말에 늦게 받으면 쌀 12가마니는 1,548,000원이다.
이게 1년 품값이다. 2015년으로는 이런 임금은 글쎄다... 이런 품값을 받고 남의 집에서 1년간 고용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40여 년 전에는 이랬다. 그만큼 쌀값은 비쌌으며, 농촌사람은 우대를 받았는데도 21세기인 지금에는 참으로 천대받는다. 어쩌면 '정부로부터 얻어 먹는 존재'이라 비하했다.
나 스스로도 농사꾼인데...
논 한 마지기는 200평, 1평은 5만 원. 1마지기는 1,000만 원.
도시에서 웬만한 아파트 한 채는 10억 원. 이 아파트로 논을 사면 100마지기(2만 평)을 산다. 대농이다.
현실은 이게 아니다. 이렇게 많은 논을 가진 농민이 몇 명일까? 농가 1가구당 평균 4,500평이 채 안 되는데...
그 친구는 올해 성남시에서 운영하는 실버농장에서 한 구좌(4평)을 얻어서 채소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첫 농사는 실패했다고 실토했다. 배추에 진딧물과 배추벌레 때문에 완전히 폐농했다고 말했다.
첫 농사의 실패. 왜 실패했을까? 그는 농약을 전혀 치지 않았다. 농약을 치지 않는 친환경 자연농법이 어렵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다.
내년에 다시 텃밭농사를 지을 기회가 된다면 어떻게 영농계획을 세울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는 올해 농사는 100% 실패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유기농법, 친환경농법, 자연농법 운운하는 것들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렇게 지은 농작물이 시중에 나와 판매 유통될 것인가를 따져보는 눈을 지녔다고 본다. 이런 농법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어떤 특별한 영농비법이 있어야만 겨우 소량으로 성공하는 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깨달았을 것으로 본다. 이런 측면에서 실패도 하나의 성공이라고 본다.
나는 고향에서 농약 한 방울도 안 치고 농사는 지은 적도 있었다.
몇 년간. 즉 수확물이 극히 보잘것없다는 전제조건에서만 자연농법 운운한다.
2015년 첫 도시텃밭에서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많이 속상해 했을 그 친구는 내년에는 어떤 농법을 계획하는 지가 조금은 궁금하다. 내년 늦가을에 한 번 더 그의 도시텃밭(실버 텃밭)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내년 이야기를 미리 기대해 본다.
야탑역 시내 쪽으로 접어들었다.
신설된 도시답게 도로 폭이 넓었다. 양쪽 도로변에는 프라타너스(양버즘나무)가 거침없이 쭉쭉 잘도 컸으며, 사다리차에 올라탄 벌목공이 가로수의 잔가지를 기계톱으로 쓰윽 잘라내었다. 엄청난 회전속도로 돌아가는 기계톱이 스칠 때마다 나뭇가지들은 베어져서 연방 지면으로 떨어졌다. 오래전부터 가로수의 잔 가지를 전정했다는 듯이 프라타너스 줄기는 뭉텅뭉텅 베어낸 흔적들이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조막손같았다. 가지가 벋을 때마다 수없이 베어낸 흔적들.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인간의 간섭으로 왜곡되고 변형된 상흔이었다.
이에 비하여 반대쪽의 도로변 가로는 삼나무 계열의 메타스꿰어가 하늘 높이 자라고 있었다. 무척이나 올곧고 쭉쭉 뻗었다. 도시의 매연과 시멘트 바닥으로 성장에 많은 제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삼나무 계열의 나무는 장하게도 잘도 자랐다. 지금은 모두 낙엽져서 잎들이 우수수 인도 위를 덮고 있었다.
순대국집이 보였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시각. 순대국밥 속의 고기를 안주 삼아서 새우젓에 찍었고, 쌀막걸리 잔을 부딪치면서 늦은 점심밥을 들었다. 돼지냄새다. 약간 역겨운 듯한 냄새다. 그래도 큼직한 깎두기와 풋배추김치로 냄새를 가시면서 국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시골태생인 나는 거친 음식, 서민음식 등 아무 거나 잘 먹는다고 말했다.
단 한 가지 음식물은 잘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뚱한 표정이었다.
나는 '비싼 음식물이다. 비싼 음식물은 나는 별로 먹지도 못했거니와 잘 먹지도 못한다'라면서 촌에서 살다가 올라 온 촌늙은이의 행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음식물을 정말로 소중하게 다 먹는다.
친구는 순도 6도라는 쌀 막걸리 한 잔으로도 배 부르다면서 밥 반 공기를 남겼다.
왜?
나는 의문이 든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라는 그 친구의 대답에 나도 잠깐 생각해 보았다. 벌써 우리 나이가 그렇게 되었나? 밥 많이 먹으면 위에 부담이 가는 세월에 와 있는가 하는 아쉬움 같은 것을 느꼈다.
나도 그렇다.
성남시 분당 영장산에는 몇 차례 올랐으니 다음번에는 전철역이 닿은 청계산으로 진출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청계산. 예전에는 산을 탔지만 최근에는 전혀 타지 못했다. 기회가 되면 등산화 끈을 졸라매야겠다.
2015. 11. 24. 화요일. 최윤환
저녁밥을 먹고 났더니만 글의 흐름이 꺾었다.
생각도 안 나고..
그만큼 기억력 감퇴가 심각하다는 뜻.
첫댓글 잘 읽었습나다.
1980년대 후반 체류탄을 생산하는
방산업체 < 삼양화학 >이 돈을 많이 벌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