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퍼왔는데..너무 감동 적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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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우리가 밤새 차를 달려 고향집에 도착한 것은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녁이었다.
사람들을 맞기 위해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집 안은 울음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고 의외로 조용하고도 차분했다.
그러나 대문 바로 앞에 놓여있는 사자밥은 아버지가 이미 이승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형은 물론 가까운 대도시에 남동생들과 여동생 매제들은 밤 사이에 모두 내려와서 장사에 대비하고 있었다.
"내려 오니랴고 고생했다. 밥 먹어라."
상주들이 입을 옷과 소복을 챙기시며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해 오신 탓인지 어머니는 슬퍼하거나 낙담한 표정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의연하셨다.
매사 꼼꼼하고 용의주도하신 신 어머니는 아버지가 앓아누우셨을 때부터 질좋은 삼베로 아버지의 떠나가실 때 입을 옷과 상주들의 삼베옷이며 상여꾼 쓸 망건 까지 미리 만들어 두셨기 때문에 동네에서 초상이 나면 부인들이 모여 삼베옷을 만드는 부산스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안방에 세운 8폭 병풍 너머에 자는 듯 누워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내 아이와 함께 절을 하면서 나는 울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울음이 나오지가 않았다. 마음은 비감했지만 장사를 다 치룰 동안 어쩌면 안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 만큼 의외로 태연했다.
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왔다.
금새라도 아버지가 "원석아!" 하고 부르시는 목소리가 집안 여기저기서 들려올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매일 처럼 정화수를 떠놓으시는 장독대 위에는 정화수를 갈아 떠놓으신지가 얼마나 됐는지 까만 때가 낀 텅 빈 그릇만이 을씨년스럽게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설날을 나흘 앞두고 돌아가셨고 그런 엄동설한이어서 그런지 북쪽 하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줄기들이 아버지가 심어놓은 나무가지 사이로 소리를 내며 스쳐가고 있었고 철 마다 온갖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던 화단의 꽃들도 모두 사그라지고 앙상한 줄기만이 남아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남겨주고 아버지가 떠나가신다......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때서야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나는 회색빛 하늘을 보며 차가운 바람에 눈물을 말리면서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했다.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언젠가는 다 한번 반드시 죽게 마련이지만 아버지 역시 그 전의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분들처럼 다시 못올 그 길을 떠나가시는 것이지만 나는 어버지의 죽음을 그런 뭇 사람들의 별리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부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어쩌면 아버지를 일찍 돌아가시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무섭고도 엄청난 죄책감이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라고, 절대로 아닐 것이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하려 해도 그런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이 나를 섬짓섬짓 놀라게 하고 있었다.
아니, 아버지를 일찍 돌아가시게 한 것은 틀림없이 바로 나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이를 우리에게 올려보낸 후 정확히 3년만에 7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처음 2년 동안을 마음둘 곳이 없어 쓸쓸하게 보내시다가 치매에 걸려 1년 동안 의식조차도 없이 누워계시다가 떠나셨으니 실제 아이가 떠난 후 아버지가 사신 것은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가 떠나자 아버지는 늘 아이 걱정 밖에 없었고 안절부절을 하지 못하셨다고 했다.
아이가 없으니 여린 당신의 마음을 붙잡거나 지탱해 줄 지주가 없어 술을 많이 드셨고 그런 아버지에게 자연 어머니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서울로 모셔와서 아이와 함께 지내시도록 했는데 아버지는 처음엔 기뻐하셨다가도 이틀 사흘이 지나면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신지 한사코 집으로 돌아가시겠다고 우기셔서 고향으로 모셔다 드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이 역시 당신이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같이 키울 때 귀여운 손자였지 사람이라곤 없는 서울의 낯선 빈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시는 것은 평생 고향집을 떠나 살아보신 적이 없는 아버지에게는 감당하기가 힘든 그 무엇임에 틀림없었다.
확실히 그 사이에 아버지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떤 한가지에 흥미나 관심을 두려하지 않으셨고 자그마한 일에도 어린애 같은 감정을 감추려하지 않고 쉽게 감탄하시는 분이었지만 아무리 즐거운 일도 기뻐하시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키우신 당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 마저 귀찮아 하시고 건성으로 대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닥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토끼와 개를 키우기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쐬고 동네 노인정에 가서 노인들과 어울려 노시기 보다 들판에서 토끼풀이나 뜯고계시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해 또다시 지리한 마찰을 벌이셨다.
하지만 내 눈에 아버지는 아이 대신 당신이 정성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셨고 그래서 가축들에게 공력을 기울이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가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의 나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이를 키우실 때만 해도 건강하셨던 아버지가 왜 그렇게 갑작스레 심약해지셨는지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방송원고를 써야하는 일에 매달려 서울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내게는 아버지를 집에 모시려고 해도 당신이 싫어하시고 별다른 어떤 뾰쪽한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갈 수록 아버지의 건강이 안좋다는 것 뿐이었다. 속옷에 변을 지렸다는 말이 들려오더니 이윽고는 입 한쪽이 약간 돌아가면서 말 까지 어눌해지는 증세 까지 보이기 시작하셨다.
놀란 형과 동생들이 큰 병원으로 모셔다가 진찰을 받게 하고 또 한방 치료도 해 드렸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나는 곰곰 궁리 끝에 아버지를 모셔다가 서울로 성남으로 잘한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당신이 젊었을 때 부터 좋아하신 뱀탕을 해 드렸다.
온갖 뱀을 넣어 오랫동안 끓인 생사탕을 일회용 팩으로도 만들어 드리자 아버지는 모처럼 어린애같이 크게 즐거워 하시면서 고향으로 갖고 내려가 장복을 하시고는 했다. 그 생사탕은 아버지에게 적지 않은 효과가 있어서 건강이 조금 회복되는 듯 했고 그런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겐 큰 행복이자 더없는 안도였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당신이 좋아하시는 뱀탕을 해 드리겠다며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 때가 성한 모습의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틀 밤을 내 집에서 아이와 지내고 사흘째 되던 날 과천의 여동생집으로 가셨던 아버지에게 갑자기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매제의 차에 실려서 서둘러 고향집으로 향하셨다.
그리고는 점점 더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자리에 누우시고 말았으니 결국은 ...... 결국은 오, 하나님! 내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사람이 좋은 목적을 갖고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해도 의외로 원치 않았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듯이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보지만 난 아버지가 자리에 눕고 나신 후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해 오는 이 엄청난 자괴감과 자책감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자격지심일 수 있어도 갑작스런 아버지의 변고, 그것이 설사 예정된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 앞에서는 합리화가 될 수 없었다.
경우야 어떻든 아이를 맡겨서 다시 데려오고 난 후 부터 황폐해 지기 시작한 아버지의 심신...... 그후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의 씻을 수 없는 불찰...... 이런 일련의 연속된 일들이 아버지를 깊고 깊은 병 속으로 몰아넣었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일찍 떠나가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과 자격지심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더욱 더 참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것은 아버지의 변고 앞에서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는 형제들의 눈빛이었다.
그들도 아버지의 병환이 종국은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을 하나같이 인정하고 체념하는 표정들이 역력했지만 그 표정들 자체가 나를 소리없이 무섭게 책망하는 것 같은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에 젖게 했고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이를 아버지에게 보내기 이전부터 결코 원치 않은 상태에서 부모님과 우리 형제라는 가계를 이끄는 위치에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젊은 시절 많은 방황을 하면서 부모님의 속을 그렇게도 많이 썩혀드렸고 형제들에게 걱정과 근심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갑작스럽게 수입이 늘어나면서 이 수입의 대부분으로 부모님의 생활과 동생들을 뒷바라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모든 것에 방관자적인 입장이었고 물론 어디까지나 내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집안에서 진행되는 일들은 스스로 내 책임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사실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그래서 뜻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변고라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사태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처럼 나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로는 인명은 재천이라고 자위하면서 악몽과도 같은 그 생각들에서 벗어나고 또 잊으려고 애써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바램에 불과했다.
나는 무서운 얼굴로 침묵했다.
이것이 업이 되어 지옥불에 떨어지고 내생에 다시 태어나 응보를 받을지라도 나는 기꺼이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나는 혼자서 참으로 많이 울었다.
그리고 건강하셨을 때 당신이 매일 새벽 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우리를 위해 치성을 드리신 것처럼 나 역시 아버지를 위해 무수한 기원을 드렸다.
아버지는 근 일년 동안을 죽은 듯이 누워 잠만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가 계신 집안은 그야말로 적막강산과 같았다.
우리 형제들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그런 아버지를 뵙기 위해 고향집을 찾았다.
살아 생전의 효도를 다하지 못함의 아쉬움과 불초함이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의식없이 누워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일기장에 써놓으셨던 '불효부모사후회'라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당신의 나이 열다섯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지요
당신은 낮 설고 물 설은 일본 땅 그 찝찝한 산중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밤낮으로 우셨지요.
그리고 60년이라는 세월을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가슴 속에 담고 사셨지요.
아버지 무슨 꿈을 꾸고 계시나요?
그 길고 긴 꿈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셨나요?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부르고 계신가요?
그래서 가실건가요?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를 그렇게도 그리워하셨듯이 이제 나도 내가 죽을 때 까지 당신을 내 가슴에 담고 당신을 그리워 해야 하나요?
아버지여, 나의 우주여!
나는 어쩌다 당신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당신은 왜 나의 아버지가 되셨나요?
왜 당신과 나는 이 세상에 부자지간의 인연으로 만나 이렇듯 서로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나요?
아버지,
한번만 눈을 뜨고 일어나셔서 그 온화한 목소리로 "원석아!"하고 불러주세요.
아버지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이 그립습니다.
당신의 체취, 당신의 발자국소리, 기침소리.......당신이 즐겨드시던 음식 하나하나 까지 기억납니다.
여름이면 된장지를 그렇게도 즐겨드셨고 명태포같은 생선 말린 것 드시는 것을 그렇게도 좋아하셨지요.
아,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음식을 잡수시면서 소리를 내는 것을 그렇게도 듣기 싫어해 그때마다 아버지를 핀잔하고 그랬지요.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세요. 다신 안그럴께요.
아버지, 용서한다고 한번만 말씀해 주세요.
나는 방바닥에 내 머리를 쿵쿵, 또 찧고 찧었다.
이윽고 날이 밝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몰려오면서 집안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보성 벌교장으로 장 짐을 하러갔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돌아오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들은 손님맞을 음식 장만에 들어갔고 마당 한쪽에서는 돼지를 잡는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유대꾼들이 모여 새끼를 꼬고 상여앉힐 채비를 하느랴 바빴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던 나는 사람들이 날 위로하며 따라주는 술을 주는대로 다 받아마셨고 일찍부터 인사불성이 돼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상주로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것을 탓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다행히 형제간이 많아서 조문객들을 받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인사불성이 돼서 잠에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 집안이나 나를 위해서 더 편한 일이었는지 몰랐다.
이런 자리, 이런 상황에서 내가 격정이 한번 북받치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시해서 그런 나를 크게 힐난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사람들의 통곡 속에서 입관을 할 때 까지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이 안방 문지방을 지나고 마루를 넘어 마당으로 향하는 순간 아, 이제 아버지가 이 정든 집을 영원히 떠나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설움이 북바치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의 관을 붙잡고 그만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유대꾼들이 아버지의 관을 들고 마당을 돌고 상여에 안장돼 동회관에서 노제를 모실 때 까지 나는 어찌나 울었는지 몇번이나 자진해서 쓰러질 뻔 했다.
울어도 울어도 그치지 않고 쏟아지는 눈물과 억누를 수 없는 격정 때문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고 두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40 평생 한번도 터져보지 못한 울음보가 쉬지않고 봇물처럼 터지니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휘청거리고 아찔아찔한 현기증이 났지만 스스로 그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의 상여는 우리 동네는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의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동네 회관에서 노제를 지내고 당신이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조성남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아 마지막 안장터가 될 벌교 열가재를 향해 떠났다.
우리 자식들의 통곡과 사람들의 흐느낌 속에서 마침내 아버지가 다시는 못올 차가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막상 아버지의 관이 땅 속으로 내려가자 내 아이도 그렇게 서럽게 울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똑똑히 보고 기억해라. 그리고 절대 네 할아버지를 잊지 말아라. 네 할아버지가 너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 이제 다시 할아버지를 볼 수가 없단다. 다시는 할아버지를 볼 수가 없어......"
아이는 할아버지를 부르며 더욱 서럽게 통곡을 했다.
아버지의 안장이 끝나자 마자 나는 삼우제도 지내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제 사흘 앞이면 설이라서 나는 당시 일하고 있던 방송국의 "설날 특별 교통방송" 스탭으로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의 부음이 급작스런데다가 설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나를 대신할 사람을 구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나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의 환영에서 어서 빨리 도망이나 치려는 듯 서둘러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첫댓글 나도 이 글처럼 작은 아버지,어머니께 효도를 열심히 하도록 노력하는 예리가 되겠다 ^ ^
이 글처럼 부모님께 열심히 효도해야겠다.
나도 앞으로 부모님께 열심히 효도 하는 송희가 되겠다.
이 글의 내용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다. 나도 앞으로 부모님께 좀 더 열심히 효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