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2)
역사적 사실은 필연을 낳고 이는 곧 또 다른 역사적인 창출을 하게 한다. 그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슬람 세력에 짓밟혔던 그들은 국토회복을 하면서 내실을 탄탄히 기하고 신념을 확고히 하고자 회복된 땅에 맨 처음 지은 것이 수도원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군인들을 돌보고 기도를 하며 바른 행실을 하도록 선도하였다. 지금도 레온에 있는 비에로소 수도원이나 갈라시아에 사모스 수도원, 부르고스에 오냐 수도원들이 그 시대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대성당이 세워지게 된 것은 수도원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그들은 교구주교좌성당을 가리키는 대성당을 카테드랄이라 부른다. 그들의 도시 도심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바로 그 카테드랄이다.
정식으로는 라틴어의 에클레시아 카테드랄리스라 하는데, 오늘날 카테드랄이라는 명칭을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이며, 이탈리아에서는 두오모, 독일에서는 돔 또는 뮌스터로 쓰고 있다. 주교가 사는 교구로서 그 도시의 이름과 같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도시를 대표하는 큰 성당은 아니다. 유럽의 큰 카테드랄은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부터 차츰 변모하여 13∼16세기에 이르러선 거의 고딕 양식으로 탈바꿈한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샤르트르나 아미앵 ·랑스 ·루앙 대성당 등의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성 스테파노 대성당이나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밖에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네오 비잔틴 양식,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스페인의 도심의 지도를 살펴보면 여타 유럽국과는 달리 알카사르라는 특이한 건물이 그것도 카테드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존재함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는 스페인만이 갖는 독특한 형식이다.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장대함 때문에 알카사르는 그 도시의 아주 중요한 관광 포인트가 된다. 이 알카사르는 732년부터 8세기 동안의 이슬람 지배 이후, 스페인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축조한 방어와 대비를 위한 복합 건축물이다. 묘하게도 그 말은 스페인어로도 아랍어로도 똑 같이 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보통은 직사각형의 형태인데, 네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귀퉁이에는 거대한 탑이 있으며, 안에는 파티오라고 하는 넓은 중정과 예배당, 병원 등이 있다. 그러니 그들의 도시를 살펴본다면 자연 제일 미관이 뛰어난 카테드랄과 알카사르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런 그들은 가는 곳곳 성채가 많다. 이 또한 그들이 갖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성채는 평화의 시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서기 천 년을 전후한 국토회복의 시대 지역을 관할하는 성의 영주들은 성의 안녕과 군대 지휘가 주관심사였다. 성들은 높은 곳이거나 산의 암벽, 때때로 물이 가득 고인 호수의 한가운데 세워졌다.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하나의 문과 올렸다 내렸다하는 다리가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공격이 있을 경우 성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재빨리 그들의 가축을 끌고 성안으로 도피했으며 성채의 망루에 오른 파수꾼은 적이 눈에 띄면 종을 쳐 알렸고 군인들은 무기를 잡았다. 습격자들을 향해 구름 같은 화살과 돌, 펄펄 끓는 물과 기름을 부었다. 그래서 성을 정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난공불락의 요새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보단 내부 반역자에 의해 점령의 기회가 생기게 되는 역사적인 사실이 많다. 성이 점령되면 영주는 그만이 아는 비밀 지하통로를 통하여 성을 빠져나가는 것 또한 실제로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 당시는 밭에 나가 일하다가 밤이면 성안에 큰 방에 모여 기타를 치며 지친 하루 일과를 위로하거나 먼 길을 온 순례자로부터 산 넘어 또 다른 성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그곳에서 본 무용담을 듣는 것이 낙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당시의 영주는 성안에서 무술대회를 종종 열어 훌륭한 기사를 발굴한다던지 사냥을 하여 실전에 대비를 하는 것에 여념이 없어 학문이나 예술의 가치 창출엔 전혀 기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국토회복을 하던 때의 문화에 대해선 전설 같은 이야기말고는 별반 다룰 것이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톨레도 시내에 접어든 우리는 한 눈에도 알아 볼 언덕위에 우뚝 선 알카사르로 향하였다. 그들은 알카사르로서 대표될 만한 곳으로 이곳과 세비아 그리고 예쁘다하여 디즈니랜드의 백설공주의 모델이 되었다는 세고비아의 알카사르를 꼽는다. 태양의 문을 통과하고 언덕을 따라 소코도 베르 광장을 지나 알카사르 옆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이곳 알카사르는 합스부르크 왕조시대 카를로스 1세 국왕이 마드리드로 천도하기 전인 1551년 요새 원형을 복원한 건물이다. 이슬람으로부터 국토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진 후 복원이 이루어졌기에 역사의 아픔을 모두 씻어내었으리라 하였을 이 건물이 비참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 다시 큰 아픔을 간직한 상징으로서 자리하게 될 줄은 그 누가 알았을까.
1936년 7월 21일.
이곳 알카사르에는 1,100명의 남자들과 520명의 여자, 그리고 50명의 어린이들이 고립되어 있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사관학교의 생도들과 민경 대원들이었다. 인민전선 군들은 마치 굶주린 호랑이들과 같이 성 안의 사람들을 단숨에 삼켜버리려 했다. 비행기의 폭격과 수백의 포탄들이 쉴 새 없이 강인한 요새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들 수호자들의 사기는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군에게 자신들이 밤낮으로 그들의 부녀자와 아이들, 그리고 스페인을 수호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7월 23일 전화가 울렸다. 크고 둔탁한 목소리의 한 남자가 톨레도에서 전화를 했는데 그는 알카사르를 지키는 대장에게 연결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윽고 모스카르도 대령이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모스카르도 대령이십니까?
- 네, 무슨 일입니까?
- 저는 톨레도 시의 통치권을 갖고 있는 사회주의 민병대의 대장입니다. 알겠습니까?
- 네, 그런데요?
- 당신에게 10분간의 결정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그 시간 내에 요새를 넘겨주지 않 는다면, 내게 잡혀 있는 당신의 아들은 죽게 될 것이오. 그리고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당신 아들과 지금 통화시켜 주겠소.
- 아버지, 안녕하세요?
- 그래, 아들아!
- 저들이 만일 아버지가 요새를 내놓지 않으면 날 총살한대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전 하느님과 스페인을 위해 영광스럽게 죽을 거예요.
- 그래, 루이시또, 스페인 국민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만세를 두 번 외치고 죽어라. 한번은 그리스도를,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서 말이다.
수화기가 내려지고 이윽고 총탄이 그의 아들 루이스의 생명을 앗아 갈 때, 톨레도의 하늘에는 이 젊은이가 외친 두 번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스카르도 대령이 이끄는 프랑코군 측 진영은 그곳에서 55일 간을 버텨내 인민전선을 격퇴 하게 된다. 참으로 역사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내전 당시 육군보병학교가 있었던 곳이 바로 톨레도이다. 그런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당연히 스페인 내전의 최대격전지가 된 곳이다. 지금 톨레도 군사박물관에는 프랑코 반란군에 가담하여 곳을 사수했던 모스카르도 대령의 당시의 전투상황과 주 의회에 인질로 잡혀 있던 그의 아들과 나눈 최후의 통화 내용을 재생해 놓고 있다고 한다.
반란을 승리로 이끌고 36년간의 독재를 이끈 프랑코가 죽음에 앞서 남긴 이야기는 유명하다. "적을 용서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내겐 적이 없다. 모두 사살되었다."는 답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1841년 이래 스페인은 202회의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으며 1975년에 사망하는 프랑코가 202회 째의 성공자가 된 셈이라하니 근대로부터 현세에 이르는 시기의 스페인의 참혹한 비극과 혼란을 미루어 알 만하다. 이러하듯 톨레도는 로마 시대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전 역사의 산증이기도 한 곳이다. 우리는 알카사르를 돌아보고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 카테드랄로 향하였다.
마침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 소리를 듣자니 헤밍웨이가 떠오르고 스페인의 내전이 떠오른다. 그 작품은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그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 당시 4만 달러를 아낌없이 내놓았었다. 그 시대의 종은 결국 전 인류에게 경종을 울렸을 뿐 어느 누구도 보살펴 주지 않았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내가 느끼게 되는 것은 역사적 혼란은 파멸을 낳고 이는 곧 또 다른 역사적인 혼란과 환멸을 자초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지금 과거 우리가 뼈 아프게 겪었던 상잔의 비극과 너무도 닮은 20세기 이념의 갈등이 낳은 참혹한 최대의 격전지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