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들쥐’를 보고:
돈의 구덩이와 참된 우정이라는 보물
전래동화에 나오는 그 흔한 이야기, 어떤 사람의 손톱을 먹은 들쥐가 그 사람의 모양으로 변신해서 그 사람의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를 닮은 이 드라마는 10화로 이루어졌다. 그 전체를 하루에 몰아서 보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묵직한 과제를 가슴에 받은 느낌이다. 그 과제들은 나의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I.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하나님과의 만남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을 통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면 결국 나의 정체성도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조금 더 비극적인 경우,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 또는 목회의 자리를 내려놓으면 그의 삶도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그에게 종교나 신앙은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또 다른 피상적인 관계들 중의 하나였음이 드러난다.
또한 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순교자가 되는 이유도 분명하다. 그들의 도전적인 말과 행동이 그들의 정체성을 흔들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었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가 천하를 흔들어 뒤엎는다고 우려하며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드라마 ‘들쥐’를 보면서 나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라는 이 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이름, 신분증, 은행 계좌들이 도용되어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줄기차게 들려주는 조언이다. 그러니까 나와 밀접하고 친근한 사랑의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의 정체성은 흔들릴 수 없다. 그러나 한두 사람과만 그런 관계를 갖게 되면 인생의 정체성은 불안하게 될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 관계를 진실되고 사랑스럽게 맺으면 그 관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은 분명해진다. 그 분명한 정체성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기쁨을 준다. 그래서 삶이 힘들어져도 흔들리지 않으며 그 고난을 함께 이겨낼 수 있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최근에 배우고 있는 헬라어 문법책에는 친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언들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친구와 우정을 쌓는 것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다.
1. κοινὰ τὰ τῶν φίλων (아리스토텔레스)
· Friends’ things are common.
·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다.
· “사람들이 친구일 때는 정의가 필요 없다. 하지만 정의로울 때조차도 그들에게는 우정이 필요하다. 속담에도 있듯이,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다.’ 참된 우정은 동등함과 친밀함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중에서
2. τί ἐστι φίλος; ἄλλος ἐγώ.
· What is a friend? Another self.
· 친구란 무엇인가? 또 다른 나(제2의 자아)이다.
3. ὅστις ἄνδρα φίλον μὴ προδίδωσιν... (아티카 연회가)
·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필멸의 인간들 사이에서나 신들 사이에서나 거대한 명예를 얻는다.
4. οὐδείς ἐστιν οὕτω πονηρὸς...
· 행실에 있어서 친구를 사귀기를 원치 않을 정도로 그렇게 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5. φίλους ἔχων ἐνομίζε θησαυροὺς ἔχειν.
· 친구들을 가졌기에, 그는 보물들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6. ἐὰν μὴ ἔχω φίλους, γιγνώσκω ὅτι κακῶς ἔχω.
· 만약 나에게 친구들이 없다면, 나는 내가 처참한 상태라는 것을 안다.
7. φίλων παρόντων καὶ ἀπόντων μέμνησο. (탈레스)
· 친구들이 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들을 기억하라.
8. μὴ φευγ’ ἑταῖρον ἐν κακοῖσι κείμενον.
· 불행에 처한 친구를 외면하여 도망치지 말라.
9. ζῆν οὐκ ἄξιος ὅτῳ μηδὲ εἷς ἐστι χρηστὸς φίλος. (데모크리토스)
· 단 한 명의 좋은 친구도 없는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
10. 소크라테스의 담론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 “나 또한, 안티폰이여,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이나 개, 혹은 새를 보고 기뻐하듯, 나는 좋은 친구를 보고 더욱 기뻐한다. [...] 옛 지혜로운 이들이 책에 남긴 보물들을 친구들과 함께 읽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큰 이익이라 여긴다.”
11. ἔγωγε μετὰ φίλου ἑταίρου κἂν διὰ πυρὸς ἴοιμι (에우리피데스, 《오레스테스》)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친구인 동반자와 함께라면 불속이라도 뚫고 가겠다.
드라마 ‘들쥐’는 이 문장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분명하게 일깨워주었다.
II. 우정: 인생과 공동체를 세우고 지탱하게 하는 보물
고대 그리스인들의 글과 문화가 자신들을 정복한 로마인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그 이후 기독교회의 중심을 차지하다가 르네상스를 만나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다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등을 통해서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있다. 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 또는 법이나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민들의 정신을 붙들어 땅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다. 내가 보기에 헬라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세웠던 지혜는 바로 이것이다. 즉, 우정이 사회를 세운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환대하는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를 잃은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겪으며 공동체는 망가지는가를 목격한다. 오늘의 국제관계에서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처럼 사람을 삼키는 나라들이 누구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유린하는 것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를 처절하게 목격한다. 영화 ‘들쥐’가 개인 간의 우정이 인생을 세우고 지탱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면, 이 맥락은 그 우정이 개인 간의 범위를 넘어 나라들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크세니아’의 교훈이다.
사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공동체 전체적으로도 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인의 은행 계좌에 돈이 쌓이는 것을 기뻐하고 국력이 신장되는 것을 뿌듯하게 여긴다. 그러나 드라마 ‘들쥐’는 그 돈을 좇다가 구덩이에 노잣돈과 함께 묻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치 ‘인생을 돈돈거리며 살면 이 꼴 난다!’고 우리에게 외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우정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고, 직장의 동료들 사이에 있으며, 선배와 후배 사이에도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든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에 우정이 없으면 그것은 망가지기 쉬운 인생이며, 직장 동료들 간에 우정이 없다면 그것은 오직 직급으로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될 것이다. 지금 시급하게 점검할 일은 우리의 관계에 진정한 우정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최대의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 이것이다. 이런 각성과 노력만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윤기가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드라마 ‘들쥐’를 보고 나서 느낀 첫 번째 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