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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워>
- 토니 주트(플래닛, 2008)
('전휴 유럽'은 '포스트워'와 같은 책입니다, 이 발제는 '포스트워'을 텍스트로 발제하였습니다)
7장 문화 전쟁
- 유럽에서 파시즘과 민주주의 사이에 벌어진 투쟁은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를 가르는 새로운 불화로 대체됨. 1947~1953년 사이에 동유럽과 서유럽,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선이 유럽의 문화생활과 지적 생활 속에 깊이 새겨짐.
- 두 대전 사이에는 극우파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회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었다. 파시스트 정당이나 신문은 물론 극단적 보수주의 신념을 지닌 정당이나 신문도 이제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충성의 공개적 표현은 중도파와 좌파에 국한되었다. 유럽에서 우파 사상과 여론은 빛을 잃었다.
- 동유럽과 서유럽의 중간 계급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의 미래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 열광에는 프롤레타리아, 즉 육체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독특한 열등감 콤플렉스가 수반되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공산당에 입당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앞에 엎드렸고, 혁명적 노동 계급을 거의 우상의 지위로 드높였다.
- 공산당은 처음에는 지식인에게 아첨했다. 공산당이 지식인에 대해 품었던 야심은 나치의 폭력적인 반지성주의는 물론 조국의 소국다운 편협성과도 현저히 달랐다. 공산주의는 많은 청년 지식인에게 확신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념의 문제였다. 적극적인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은 비록 동유럽의 학생, 시인, 작가, 소설가, 기자, 교수 등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종종 그 세대에서 가장 재주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 그러므로 파벨 코호우트는 훗날 반체제 인사요 탈공산주의 시대의 수필가이자 극작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음에는 대중의 눈에 새로운 정권을 열광적으로 지지한 사람으로 비쳐졌다.
- 몇몇 동유럽 청년들이 순수한 열의를 지니고 공산주의에 투신했다고 해서 소련이 그들 나라의 지배권을 넘겨받은 일에 대한 모스크바의
책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열의는 이후의 각성과 환멸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질라스(1911년생)처럼 약간 나이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언제나 ‘열정의 조작은 속박의 씨앗’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더 젊은 전향자들은 공산당 규율의 엄격함과 스탈린주의 권력의 실체를 알고는 정신이 아찔했다.
- 그러므로 1948년 이후 주다노프가 ‘두 문화’이론을 강요하며 식물학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입장을 채택하라고 우겼을 때 동유럽 인민민주주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 주다노프주의 :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시기 동안 예술에 대한 정부의 엄격한 통제와 극단적인 반서구적 성향을 조장한 소련의 문화정책. 본래 문학에 적용되던 이 정책은 곧 다른 예술 분야로 확산되었고, 점차 철학·생물학·의학 등 소련 내에서의 모든 지적 활동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당 서기이자 문화부장이던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주다노프가 작성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1946)에 의거해 시작되었다.
- 당 노선에 대한 지식인들의 굴종은 어쨌거나 전부터 억압과 정통의 유산을 이어받았던 소련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된 현상이었지만, 합스부르크 왕실의 상당히 자비로운 통치에서 벗어나 이제 막 등장한 국가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 스탈린의 사망(1953년)으로 대부분의 동유럽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품었던 열정은 그 열정이 가장 강력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수정 공산주의’나 ‘개혁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몇 년 더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공산 국가들 내부의 분열은 당국(경찰과 관료, 어용 지식인을 갖춘 당)과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 이런 의미에서 냉전의 단층선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가 아니라 동유럽과 서유럽 각각의 내부에 생겼다. 동유럽에서는 공산당과 당 기구가 사회의 나머지 부분과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이었다. 서유럽에서도 동일한 단층선을 따라 지신들이 양편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론상의 공산주의에 대한 열광은 실제 공산주의의 직접 경험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었다.
- 당대 동유럽의 운명에 대한 이 무지의 만연은 서방의 무관심 증대와 결합하여 동유럽의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동유럽 지식인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문제는 주변부에 위치한 자신들의 상황이 아니었다. 동유럽인들은 오래전부터 그 운명에 복종해 왔다. 1948년 이후에 동유럽인들의 괴로움은 이중으로 배척되었다는 데 있었다. 소련의 존재 때문에 고유의 역사로부터 배척되었고, 서유럽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동유럽의 경험이나 사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서유럽의 의식 속에서도 배척되었다.
- 1920년대 이래로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독재 정권에 굴복하면서 정치적 난민과 지식인 망명객들은 프랑스로 향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
전 이후에 진정으로 유럽적인 지적 생활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곳은 한 곳뿐이었다.
- 그 결과 프랑스는 자연스럽게도 한 번 더 지식인 무적자들의 유럽 내 안식처이자 근대 유럽의 사상과 정치가 교환되는 정보 센터가 되었다. 전후 파리의 지적 생활은 이중으로 세계적이었다. 유럽 전역의 남녀들이 거기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여론과 논쟁의 확대되어 더 넓은 국제적 청중에게 전달되는 유일한 무대였다.
- 프랑스가 1940년에 완전히 패배하고 4년간 독일에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전후 시대의 국제 외교에서 미국과 영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상관없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시대의 대변자로서 국제적으로 특별한 의의를 획득했으며, 프랑스의 정치적 논의에 내포된 경향은 세계 전체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축소판이었다.
- 프랑스의 독자들과 작가들은 역사적 변화와 정화 작용을 하는 유혈극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에 오래전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사르트르와 당대인들은 공산주의 폭력은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이요 ‘역사의 산파’라고 역설했을 때, 그 사람들은 스스로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관습적이었다.
- 프랑스의 환상 속에서는 혁명적 폭력이 익숙했고, 여기에 예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대한 우호적인 기억이 덧붙여져, 프랑스 지식인들은 소련의 잔학 행위에 대한 공산당의 조직적인 옹호를 명백히 동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 문제가 갖는 중요성은 프랑스 공산당의 편재성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탈리아처럼 큰 규모였던 적은 없지만 종전 직후 선거에서는 더 성공적이었다.
- 프랑스 공산당은 또한 지식인을 특별히 매정하게 대했다. 이탈리아 공산당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늘 고집 세고 둔감한 당 관료들이 지도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다소 완고하기는 했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위성정당이요, 스탈린주의 노선을 변호하고 실천할 편리한 수단이었다.
- 지도력과 지침, 규율 그리고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할 전망을 찾던 전후 학생 세대에게 프랑스 공산당의 엄격함은 적어도 몇 년 동안 마치 체코나 폴란드의 공산당이 처음에는 학생들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듯이 일정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더 오랜 역사를 지닌 프랑스 지식인들이 보기에, 프랑스 공산당의 문화위원들이 당 일간지 <뤼마니테> 등의 과장된 지면에서 정통 교리를 강요할 때 보여 준 열정은 자신들의 진보적인 신념을 날마다 회의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공산당에 운명을 걸었던 학자들은 이탈리아의 비토리니나 런던의 공산당 역사가 집단처럼 재량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없었다.
- 이런 이유 때문에 파리 지식인들의 친화 관계는 냉전기 유럽의 신념과 견해의 단층선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다. 파리에서는 다른 곳과는 달리 지적인 분열이 국내외의 정치적 형세를 따라갔다. 동유럽의 시범 재판은 파리에서 유달리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 서방 지식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열광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굴라시 공산주의’나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 시대가 아니라 공산주의 정권이 가장 잔혹했을 때인 1935년에서 1939년 사이, 그리고 1944년에서 1946년 사이의 시기였다. 작가, 교수, 예술가, 교사, 기자들은 스탈린의 허물을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허물 때문에 번번히 스탈린을 찬양했다. 스탈린의 통제 밖에 있던 자들이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스탈린 숭배에 가장 크게 반했던 때는 스탈린이 산업적 규모로 인민을 학살하고 있을 때, 시범 재판이 마치 연극처럼 소련 공산주의를 가장 섬뜩하게 보여 주었을 때였다.
- 공산주의는 히틀러나 자유민주주의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공산주의는 이국적이었고, 그 규모는 웅대했다. 레몽 아롱은 1950년 ‘유럽 좌파가 피라미드 건설자를 신이라고 믿는... 바보같이 우스꽝스러운 깜짝쇼’에 대해 언급했다.
- 소련이 중대한 일을 추구하고 있고 그 대망에 비추어 결점은 정당화되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합리주의적인 지식인들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파시즘이라는 빠져들기 쉬운 죄악은 지엽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완벽하게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목적을 향하고 있었다. 많은 비공산주의자 관찰자들이 고발한 공산주의의 범죄는 이를테면 역사와 거래하는 비용으로서 용서받았다.
- 유럽의 문화적 경계선의 한편에는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친구와 옹호자, 즉 진보주의자들과 ‘반파시스트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반공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소련 진영 밖에서 숫자상으로 훨씬 더 많았지만 명백하게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반공주의자는 트로츠키주의자에서 네오파시스트까지 전 영역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소련을 비판하는 자들은 흔히 자신들이 다른 점에서는 혐오했던 정견을 지닌 자들과 기반이나 희망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좌파가 순풍을 타고 역사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우파 지식인들은 반항하는 패자가 되었음을 자랑했다.
-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역사가 자신에게 강요한 미국과의 관계를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보다는 언제나 분명 편하게 받아들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고, 이 시기에 유럽과 상대했던 많은 미국 외교관과 정책 입안가가 경제 사회 정책에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장려하는 뉴딜주의자였던 데다가 정치적으로 좌파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 지식인들이 미국과의 관계를 편하게 받아들인 것은 또한 미국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미국의 노총과 정보부, 국무부는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온건한 사회민주당과 노동당을 특히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공산주의의 전진을 가로막는 최선의 장벽으로 간주했다.
- 1947년 봄에 프랑스와 벨기에, 이탈리아 정부에서 공산당이 배제된 후에, 특히 1948년 2월 프라하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후에, 서유럽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소원해졌다. 공산주의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노동조합이, 그리고 공산당이 지도하는 파업자들과 사회주의 정부 각료의 명령을 받은 군대가 격렬히 충돌한데다가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는 소식이 더해져, 서유럽의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소련 진영의 확실한 적으로 변했으며 그들은 미국의 은밀한 자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프랑스의 레옹 블룸이나 독일의 쿠르트 슈마허 같은 사회주의자에게 냉전은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 1930년대에 잠시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곧 탈당했던 알베르 카뮈는 전쟁을 겪고 나서 당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온갖 급진 개혁가들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동맹을 확고하고 신뢰했다.
- 카뮈는 프랑스 전후 재판과 숙청 기간에 처음으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때 공산당은 유일한 레지스탕스 정당으로서 강경 노선을 채택했고, 수천 명에 달하는 실제 부역자와 부역자로 추정된 자들의 축출과 투옥, 사형 선고를 요구했다. 그 후 1947년부터 정치적, 지적 충성에 동맥경화가 일어나자 카뮈는 자신이 정치적 동맹자들의 신념을 의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합을 위해 이러한 의심을 습관적으로 억눌렀다. 1947년 6월 <콩바>지를 넘겨받은 카뮈는 이제 3년 전처럼 정치적으로 자신만만하지도 못하고 낙관적이지도 못했다. 같은 해 출간된 소설 <페스트>를 보면, 그가 정치적 동지들의 냉혹한 현실주의를 거북하게 느꼈다는 점이 드러난다. (타루 “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들을 죽게 하거나 혹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 이후 카뮈는 한층 더 신랄하게 ‘진보주의적’ 환상을 비판했는데, 혁명적 폭력에 대한 비난이 절정에 달했던 1951년의 평론집 <반항하는 인간>은 파리의 좌파 지식인 사이에 있던 옛 친구들과 단절하는 마지막 계기가 되었다. 사르트르에게 급진적 지식인의 첫 번째 의무는 노동자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었다. 카뮈로서는 실로네가 그랬듯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결국 문화에서도 냉전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종결부 : 구유럽의 종말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처음 10년간 일상생활은 여러 가지 본질적인 특징에서 50년 전의 남녀에게 충분히 익숙했을 것이다. 그 시기에 석탄은 여전히 영국이 필요로 하는 연료의 10분의 9를 충족시켰고, 벨기에와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기타 회원국들에게 필요한 연료의 82%를 차지했다.
- 1920년대와 1930년대를 뜨겁게 달군 근대화에 대한 열정은 퇴조했으며, 구시대의 생활 질서를 부활시켰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럽 대부분의 농촌 지역처럼 아이들이 여전히 초등 교육을 마치자마자 인력 시장에 뛰어들었다. 1951년에 13살이 지난 후까지 학교를 다니는 이탈리아 어린이는 아홉에 1명 뿐이었다.(ex.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 유럽의 전통적인 종교들 중에서는 오직 가톨릭만이 40년대와 50년대에 적극적인 지지자 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만이 교회와 직접 결합된 정당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그러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가톨릭교회는 신도들에게 당시로서는 매우 심하게 결핍되었던 것, 연속성과 안전의 느낌, 안도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도기에 가톨릭교회에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 것은 가톨릭교회와 구질서의 결합이요, 덧붙여 근대성과 변화에 반대한 가톨릭교회의 확고한 태도였다. 북서 유럽의 다양한 개신교 교파에는 그러한 매력이 없었다.
- 전후 유럽의 소비 유형은 대륙의 계속되는 빈곤과 대공황과 전쟁의 지속적인 영향을 반영했다. 식량 배급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 계속되었다. 영국에서 빵의 배급은 1946년 7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시행되었고, 의복 쿠폰은 1949년까지 유효했으며, 전시의 실용적인 의복과 가구 제도는 1952년에 가서야 포기되었다. 육류와 여타 식량 배급은 1954년에야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 영국 노동당 정부가 건설하고 있던 새로운 가족 주거지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 권장 규모는 900평방피트(25.3평)에 침실 3개짜리 주택이었다. 유럽인들 중 자동차나 냉장고를 보유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 전후 시대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유럽인은 당시에 정보에 밝았든 그렇지 않았든 자신들에게 갑자기 닥칠 변화의 규모를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반백 년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 비관론에 빠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유럽은 낙관적인 대륙이었으며, 정치가들과 평론가들은 확신을 갖고 미래를 기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사람들은 30년 동안 계속해서 끔찍했던 과거에 단호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시선을 고정시켰다.
- 유럽인이 20세기 전반에 자초한 집단적 불행의 규모 자체는 강한 비정치화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암울한 시기에 살았던 유럽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방식을 따라 극단적인 해결책에 호소하는 대신 정치를 외면했다. 이를테면 파시스트 정당이나 공산당이 일상적인 생존의 어려움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고, 경제가 집단행동의 목적과 언어로서 정치를 대체하며, 새로이 등장한 가내 오락과 가내 소비가 공정인 일에 대한 참여를 대신하는 현상을 통해서 말이다.
#토니주트 #포스트워 #전후유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