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수도회 발생지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이탈리아 아시시
사람들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포베레요(poverello), 즉 '가난하고 불쌍한 형제'라고불렀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람들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을 지어주었다.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이다.
프란체스코는 1181년 움브리아(Umbra)에서 아시시의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날에는 부잣집 아들로서 방탕한 한 때를 보냈다. 그러나 22세 때에 페르시아 전쟁에 출정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시 시실리아 전쟁 중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까지 했다. 그런 과정에서 삶의 의미에 눈을 뜨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길로 귀의(歸依)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삶은 철저한 무소유와 청빈과 봉사의 삶이었다. 큰 아들의 그런 모습에 실망한 아버지가 온갖 방법으로 그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끝내 그는 맨 몸으로 아버지 집을 떠나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단벌옷으로 탁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였다. 자신에게 보장된 밝고 편안한 미래와 세속적인 부를 모두 거부하고, 1209년 교황의 축복과 함께 탁발수도회(청빈과 엄격한 규률을 이념으로 13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널리 포짐)를 설립하였다. 탁발수도회는 선교 활동 이외에도 가난과 질병에 맞서고 폭정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프란체스코는 프랑스 남부와 이집트에서 선교 한 뒤, 아시시로 돌아왔다. 그는 아시시에서 자신의 성당을 세우는 대신 서민들의 집이나 그들이 제공한 소박한 숙소에 기거했다. 그가 상 다미아노 정원에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시 중 하나인 '태양의 찬가'를 썼을 때는 거의 실명 상태였다. 1226년 10월 3일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수중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벌거벗은 채 돌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 프란체스코의 청렴했던 삶과는 극히 대조적 지금의 웅장한 대성당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났 지 2년 후,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 다음 날인 1228년 7월 17일에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초석을 놓았다. 당시에는 수도원이나 성덩이 아니라 단지 성 프란체스코 묘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생전에 그는 범죄자를 처형했던 '지옥의 언덕'에 묻히기를 소원했는 데,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을 받았던 골고다 언덕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는 1230년 새로 지어진 예배당으로 이장되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건축학적으로 중세의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웅장한 교회 두 개가 2층 구조로 지어젔는데, 이는 성 프란체스토와 친분이 가장 두터웠던 엘리야 다 코르토나 수도원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신랑과 익랑으로 구성된 하부 성당(1228~1230)의 돔은 로마네스코 양식과 초기 기독교 무덤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신랑 하나로 이루어진 상부 성당(1230~1253)은 고딕 양식, 특히 파리의 생 샤펠 성당의 영향을 받았다.
측면
정면
광장 회랑의 부조
장미창
상부 성당의 내무-펌
1295~1300경 제작한 지오토의 프레스크 벽화-펌
중정
광장과 회랑 넘어 풍경
성당 정문에서 바라 뵨 풍광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
“아, 주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되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 하게 해주소서"
주여 나를 받으소서 / 까리따스수녀회
사진-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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