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마리
서 한
내 집은, 마을 저 안쪽까지 들어가 언덕바지에 오르면 성처럼 우뚝 서 있는 빌라 꼭대기 층이다. 베란다 오른편에 울타리 없는 농가. 이 집의 마당을 가로질러 밭길을 죽 가면 돌아서 가야 할 동네 초입에 금세 다다른다. 마당 한쪽 집보다 더 오래된 나무 아래, 몇 발치를 사이에 두고 개 세 마리가 묶여있다. 목줄도 제 몸길이보다 짧다. 주인 말인즉 빌라 사람들이 편히 오갈 수 있게 그리해 놓았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주인 말이 그렇고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만 어쩌다 오갈 뿐 사람들 왕래가 없다. 만만한 가게 하나 없는 외진 동네여서 어차피 시내로 나가려면 자가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제 주인집 못지않게 허름한 개집이 옆에 엎어져 있지만, 제때 모르고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개들은 들어갈 생각을 않는다. 다음날이면 백구들은 황구가 되어있다. 바지런한 주인은 밭일에 바쁜 중에도 마당 그늘 자리에 땔감을 가득 쟁여 놓았다. 그의 발걸음이 좀 가까워질라치면 눈 마주치려고 기를 쓰며 개들이 꼬리를 흔들어댄다. 하지만 주인은 녀석들에게 소홀하다. 속도 몰라주는 인심이 얄궂어 대신 “멍뭉아” 불러줬더니 그는 괜한 말을 덧붙인다. “귀찮아서 다 팔아버려야지!” 아유,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했다. “쟤들 개장수에게 넘기면 다 개고기 돼요.” 죽어서 개로 태어날 수 있다는, 내 소신이며 심증이고 설득이기도 한 이 말은 목구멍에서 삼켰다.
농가 마당을 거치지 않고 빌라에서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샛길 둘. 길 끄트머리엔 컨테이너를 뒤집어엎은 듯 겉모양새가 그만그만한 공장들이 있다. 꼭 밖에서 볼일을 보는 우리집 중개를 데리고 나갔다가 식겁을 했다. 곰만한 개들이 사람 한 점 보이지 않는 동네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유기견이거니 했다가 공장 한구석에 있는 개집을 보고서야 집이 있다는 걸 알았다. 꼬질꼬질 땟물 절은 빈 밥그릇을 뒤집어놓고 길게 누워 사람에겐 별 관심도 안 보이던 놈이 제 몸뚱이 반도 안되는 우리 개를 보더니 헉헉거리며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을 흔들며 쫓아오는 모양이 영락없이 성난 곰이다. 그 모습에 먼저 살던 동네에서 대장 노릇하던 놈이 단박에 꼬리를 내렸다. 살다 보니 개에게 쫓겨 개와 함께 도망칠 일도 생긴다. 어쨌든 녀석들은 도시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자유로운 영혼들임이 틀림없다. 주인에게 별 살가운 대접도 못 받는, 공장의 경비원인 게 확실해 보이지만.
사실 샛길 하나도 남의 집 마당을 지나쳐야 했다. 여러 날 내가 멋모르고 다녔던, 담벼락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와집 앞 널찍한 공간. 여차하면 구덩이로 굴러 떨어질 것같이 위기를 느꼈던 폭 좁은 길을 지나 드디어 안심하며 들어섰던 그 빈터가 마당이었다. 비었다고 주인이 없는 땅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남의 땅을 무단횡단하는 것도 그랬지만, 좁은 길옆 움푹 팬 바닥엔 닭 세 마리가 살고 있었다. 공장의 녹슨 컨테이너 몸통에 맞춰 한쪽 팔 길이쯤 될까 한 세로, 삼면에 철조망을 높이 쳐놓아 닭들은 꼼짝없이 갇힌 판국. 물 빠짐도 안 좋아 악취까지 나는 열악한 환경에도 엉성하게 볏짚을 깔아놓은 구석엔 늘 달걀이 보였다. 사람이나 차가 지나가면 몸 숨길 데도 없이 세 놈이 한데 모여 댕그란 눈을 굴리느라 정신이 없다. 이래저래 내 심기도 불편해 그만 찻길을 끊었다.
상마리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흘을 남겨두고 있다. 오늘 아들과 장기동에 가는 길. 별수 없이 다른 샛길로 향했다. 인삼밭 끝자락에 새로 들어설 공장 자리를 닦느라 둔덕이 반쯤 깎여 있다. 그 높이에 맞춰 둥근 ㄱ자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길이 내려다보였다. 아니 길보다 짱짱한 햇빛 아래 ㄱ자 꼭지에 주저앉은 비둘기가 먼저였다. 앉은 게 아니라 쓰러져 있다. 며칠 전 저 자리쯤 S자로 있던 뱀의 사체는 무시했을망정 작은 영혼은 거두는 게 옳다는 판단이 섰다. 벼랑 위에 아슬하게 차를 세워놓고 사체를 집어 들었다. 햇볕 때문일까. 아직 따뜻했다. 야산에 올라가 풀숲에 뉘어 놓고 넓적한 낙엽 여러 장으로 덮어 주었다.
늦은 오후 헉, 소리가 나게 액셀을 밟아 역기역자를 올라왔다. 땅을 고르느라 며칠 굴착기소리가 그치지 않던 공장 터에 섰다. 얕은 바람에 아카시아 향이 실려 왔다. 찔레꽃도 뒤섞였다. 아, 그런데 얼핏 ‘요정’의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 머릿속에 잠재된 낮은 울음. 나는 소리를 가늠할 수 있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도 가슴을 후비는 짧지만 날카로운 소리. 비명이었다. 간밤에 비라도 온 걸까. 응달쪽 젖은 진흙에 빠지며 생각 없이 걷다가 순간 뒤돌아보았다. 생시가 꿈인 것 같았다. 돌아가려다 야산 쪽을 살폈다. 둔덕 깎인 풀숲에 어린 나비가 있다. 긴 잡풀이 다 숨겨줄 것처럼 오도카니 그렇게 숨어서.
농가 백구 한 녀석이 밭고랑 사이로 걸어왔다. 얼추 자란 작물을 살피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걷는 게 사람 같다. 덩치는 나보다 큰 놈이 눈빛이 여간 선한 게 아니다. 가까이서 보니 앙상한 가슴팍에 젖이 축 처졌다. 젖이며 옆구리 피부까지 벗겨져 벌겋게 속살이 드러났다. 집의 몇십 배나 되는 밭에 매일 코를 박던 주인이 좀 한가한지 말을 걸었다. 쟤가 새끼 낳고 밥을 안 먹어서 저렇다며 스트레스를 받았나 싶어 풀어놨단다. “새끼 네 마리 낳았는데 얼마나 예쁜지 몰라.” 하며 고양이 밥 또 갖다 놨느냐, 어디에 뒀냐, 가져와 쟤나 먹여야겠단다. 나는 얼른 “집에 좋은 통조림 큰 거 있는데 드릴게요.” 대답했다. 녀석이 나무 밑 젖은 땅을 파헤치고 발랑 드러누워 몸을 비벼댔다. 그런데 의사에게 보여야 할 거 같다는 말을 차마 못 했다. 그제 아래층 여자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다. “작년 겨울엔 새끼들이 다 얼어서 죽었어요. 저 집은 왜 개를 키우는지 몰라. 새끼들은 또 팔 거예요. 세 놈이 암놈인데 다 새끼 뱄다고 하던데.” 3층에서 4층 계단 절반을 차지한 화분들에 물을 주며 그녀는 혀를 쯧쯧 찼다.
옆동에 나비 두 놈과 사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동네 고양이들까지 설렁설렁 챙겼다. 사료를 주문해놓고 양해를 구했다. “드리면 안 되겠느냐.” 왜 주느냐고 못 받겠다고 했다. “제가 10월 초에 이사를 해서요. 겨우 몇 달 애들 얼굴만 익히고 밥줄 끊기가 그래서요.” 아유, 요 오지랖이라니. 어쨌든 내가 이렇게 방정을 떠는 새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한 이틀 혹은 사나흘마다 지팡이를 끌고 농가 마당을 느린 걸음으로 옮기는 할머니를 지켜보며. 생각은 엉뚱한 데다 두고도 공연히 울컥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월이 올 테고. 언젠가 상마리, 이 달달한 풍경이 눈물겹게 그리워질지 모를 일이다.
─반년간지 『시에티카』 2014년 · 하반기 제11호
서 한
서울 출생. 2009년 『시에』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