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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로를 강팍케 하셨을까
출 7: 1-7
우리는 히틀러 110번째 생일인 99년 4월 20일 "가능한 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학교를 불바다로 만든다"는 우리를 섬찍하게 만드는 이 글은 누가 쓴 글이며 왜 쓴 것인지 아십니까?
이는 미국 중부 콜로라도주 덴버시 남서쪽의 리틀턴에있는 1천 8백명이 다니는 콜럼바인 공립고교에 18세의 에릭 헤리스와 17세의 딜런 클레볼드 학생이 적은 글입니다.
이들은 매일 검은 트렌치 코트를 입고 다녀 트렌치 코트 마피아 라는 별명을 붙여 다녔습니다. 그들은 그 날 그 시를 맞추어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을 다짜고짜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도망치고 총에 맞아 딩굴며 피가 물처럼 흘렀습니다.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생지옥이 되었는데 그들은 평상시처럼 총을 난사하면서도 낄낄 웃었다고 하니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오는 형편입니다.
삽시간에 13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30분 후에 경찰 특수부대가 학교에 도착해서 부상자를 인근 병원에 후송하기 시작했고 오후 4시경 도서관에서 총상을 입고 숨져있는 두 범인을 발견했습니다.
사단의 역사는 두 학생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과 함께 15명의 꽃봉오리가 비참하게 꺽이고 20여명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 부상자로 남기고 막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악해도 자기의 마음대로 사람을 죽일 수 는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히틀러도 분명 사단이 그 마음을 사로잡아 역사한 것입니다. 히틀러 마음을 사로잡아 역사한 사단은 콜럼바인 고교에 에릭 헤리스와 딜런 클레볼드 학생의 마음도 사로잡아 역사한후 자살로 끝나게 한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생사고락을 함께한 예수님을 죽음에 내 놓을수 있는 것은 사단이 유다를 재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후에 처참한 자살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도 베를린에서 소련군에게 포위된 가운데 총독관저에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두 학생도 살인극을 행한 후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실날이 가까워지니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캉팍케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왜 마귀를 강팍케 하십니까? 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십니까?
1.하나님을 믿는자에게는 하늘의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1절"--볼찌어다.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 신이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바 이는 모세에게 하늘의 권세와 능력을 네게 있음을 이방인에게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크게 보이고 사람은 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하는자 앞에 사단이 무릎을 꿇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도는 세상에서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귀에게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물리치기 바랍니다.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막강해도 그것을 쫓아가지 마십시오. 아부하지 마십시요.눈치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것보다 훨신 큰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터인 세상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하나님의 일을 할 때 부족함이 있으면 친히 채워주신다.(1,2)
불신앙을 가진자는 바로와 같은 마귀가 강팍케지면 어쩌나 염려하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리 아시고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1)
우리모두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사명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의 일 하시는데 무엇이 필요합니까?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무엇입니까? 주님만 생각하십시오.
모세에게 아론을 미리 준비시켜 놓은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만 바라보고 물위로 걸어 가십시오. 주님을 보고 있는동안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3.고난이 클수록 성도가 받을 믿음과 축복이 더크고 많다.(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면 되지 무엇 때문에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만들어 고난의 짐을 더 무겁게 하십니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권능과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기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고난의 잔을 마셔보지 못하였으면 40년 광야 생활도 잘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체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후에 광야 40년 동안 참고 견디고 이겨 나가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려운 시련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여러분이 받을 축복과 상급이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날뛰는 것도 우리에게는 더 큰 축복과 승리의 주인공이 되게하시는 하나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하나님의 재앙을 피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4)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모세와 아론이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함으로 여러 큰 재앙을 애굽에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겠다고 말씀 하였습니다. 만일 바로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내린 큰 재앙은 면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강팍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큰 재앙을 당하였을뿐 아니라 결국 이스라렐 백성은 내어보내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아무리 반항하고 거역해도 모든 일은 자기의 뜻대로 진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를 기억하십니까?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풍랑을 만나고 큰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기 뱃속에 3일동안 죽을 고생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순종했더라면 재앙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거나 아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치 않다가 나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주위가 어려움을 당한일은 없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십시오. 거역하면 할수록 자신의 고통만 더 크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5.순수한 믿음과 아멘의 삶은 승리로 가는 길임을 보여준다 .(6)
6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곧 행했다고 했습니다. 본문은"명하신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을 보아서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아멘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퍼런 칼날 앞에 생명의 위협을 받을수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아론의 순수한 믿음을 볼수있고 아멘의 순종을 볼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자를 좋아 하십니다.어린아이와 같이 누가 말해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처럼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아멘하고 순종하는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다 계획을 세우시고 진행하시는데 성도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노 한다고 아론이 불평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아니 몰라도 무조건 아멘으로 순종하면 바로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하나님은 그대로 다 이루어 주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현실을 볼려고 하지 마십시오. 바로가 강팍해져서 살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수순이요 절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확인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분을 신뢰 하십시요.그분이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여러분의 지식으로 판단하지 말고 순종의 무릎으로 아멘하므로 주님의 역사가 빨리 진행되도록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모두는 강팍해져있는 바로왕 같은 이세상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다.
나의 머리로 대항할려고 하지마십시다.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분을 믿으십시다.
기도하여 확신을 가지십시다.
주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기십시다.
결국은 바로를 정복하고 승리의 면류관을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론에게 배운다
출 7: 1-7
I. 서론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발 8,848 미터(29,028 피트)나 된다니 얼마나 높은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산악인들이 이 산을 정복하려고 시도했지만 숱하게 실패했습니다. 고산소증에다가 살과 뼈를 에이게 하는 악천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 120여 산악인들의 시신이 에베레스트 산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을 세계 최초로 등정한 사람은 뉴질랜드인 에드문드 힐레리(Edmund Hillary, 1919-)였습니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인 에베레스트가 인간에 의하여 정복된 것입니다. 그 때까지 수 십년간에 걸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산악인들이 모두 일곱 차례나 실패한 뒤에 이룬 쾌거였기 때문에 온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은 힐레리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힐레리만 기억할 뿐 이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셰르파(Sherpa), 즉 전문 산악인의 여러 물건들을 운반하는 짐꾼(porter)으로서 네팔 원주민이었던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 1914-1986)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산을 아는 사람들은 노르게이가 없었더라면 힐레리가 도저히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르게이는 무엇보다도 네팔 현지인으로서 에베레스트 산의 지리나 기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노르게이의 도움으로 힐레리 경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으로서 텐징 노르게이가 훨씬 더 주목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에드문드 힐레리라는 이름에는 익숙하지만 텐징 노르게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이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서도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마치 TV 드라마나 영화에 있어서 주인공보다 조연이나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이 더 큰 역할을 하듯이 꼭 1인자만이 아니라 2인자나 3인자가 사실은 더 큰 공헌을 한 예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II. 본론
오늘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모세의 형인 아론을 한번 살펴봅시다. 아론은 언제나 모세의 형이자 대변인으로서 기억이 됩니다. 사실 아론은 대제사장의 원조(元朝)로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모든 제사장들은 반드시 아론의 후손들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동생인 모세와 떼어놓고서는 생각될 수 없습니다. 마치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서(마 4: 18) 기억이 되고, 촬스 웨슬리(1707-1788)가 요한 웨슬리(1703-1791)의 동생으로서 기억이 되듯이 아론은 언제나 모세의 형으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나 촬스 웨슬리의 경우 모두 동생들이니 괜찮다고 하겠지만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형이 동생보다 못하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아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생인 모세의 후광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론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정신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① 동생을 더 높이는 2등 정신, 즉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볼 때 제일 먼저 자기 얼굴부터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얼굴이 잘 나왔으면 그 단체 사진은 잘된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얼굴이 조금 찡그려진 상태에서 사진이 찍혔다든지 해서 자기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 사진은 잘못된 것이라고 푸념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든 인간 속에 나르시시즘, 즉 자기 중심적인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오늘날 사회가 왜 시끄럽습니까? 다 높아지고 다 1등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다 주인공만 되려고 하지 조연이나 엑스트라로서 만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보면 출애굽이 일어날 때 모세가 80세요 아론은 83세였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3살이나 많은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언제나 모세의 이름이 아론보다 앞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아론과 모세'라고 되어 있지 않고 '모세와 아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아론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1절의 말씀 그대로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말주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 앞에서 10가지 기적을 보일 때에도 아론은 모세의 의중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실질적인 주역은 언제나 모세였습니다. 아론은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론은 여기에 대해서 한번도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습니다. 비록 자기가 형이었지만 형이 동생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론은 2등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주연보다 조연으로 만족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2등 정신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난 사건은 출 17: 8-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비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군대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산밑에서 전쟁을 하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힘이 빠져서 손이 내려오면 전쟁에 졌습니다.
이 광경을 쳐다본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와 모세를 앉게 하고서는 양쪽에 서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 결과 모세의 팔은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이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론이 동생인 모세의 한쪽 팔을 붙들어 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론의 2등 정신, 조연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시카고 남부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분위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유달리 의사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장로님들 14분 가운데 2/3 정도가 의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중 문화 가정 자매들이 한 1/5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나 일반 교우들이 이중 문화 가정 자매들을 얼마나 챙기는지 몰랐습니다. 재산관리 위원장이라는 이중 문화 가정의 어떤 권사님은 굉장히 교회를 자랑하고 장로님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습니다. 시카고 남부 교회는 여러 배경이 다른 분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저는 이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를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답은 하나였습니다. 모두가 2등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바로 겸손히 섬기는 마음에 그 비결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에서 내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종이 되어서 서로 섬기고자 할 때 교회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빌 2: 5-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도 낮아져야 할 것입니다.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 1등이 되려고 하기보다 2등이 되고, 다 주연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조연이 되려는 아름다운 양보 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②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정직함을 배워야 합니다.
아론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약점이 있었습니다. 실수를 할 줄 알았습니다. 출 32장 말씀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는 동안 아론은 산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리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세가 산에서 좀체 내려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내려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내려오지 않게 되자 군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세는 물론이고 하나님마저도 포기하고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 한가운데에서 아론은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설득해서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도록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인내심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 그의 믿음마저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에게 금고리들을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금붙이들을 다 녹여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그 금송아지 앞에다 제단을 쌓고 흥청거리며 뛰어 놀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숭배 놀음을 했던 것입니다.
아론은 위기 관리를 잘하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의 동요를 막는다고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 그대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될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켰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즉각 아시고 모세를 산 아래로 내려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을 때 모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글자를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버렸습니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 수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되게 하고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까지 했습니다(출 32: 20).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출 32: 21-25에서 모세가 아론을 다그치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아론이 도대체 백성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이 백성들이 이렇게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느냐고 따집니다. 모세는 이 엄청난 죄악이 아론 때문에 일어났다고 매섭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 때 아론은 모세를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비록 혈육으로는 형제간이었지만 자신이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절감하고서는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자기는 동생인 모세의 종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론은 모세에게 세 가지 변명을 합니다. 첫째로, 이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지 잘 알지 않으십니까? 둘째로, 백성들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는 산에 올라가 감감 무소식이니 이제 자기들을 인도해 줄 신을 만들어 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셋째로, 결국 이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어서 금붙이를 다 자기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수송아지 형상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아론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 잘못을 궁색하게 변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들은 모세가 없는 현장에서 아론이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 정도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는 한계와 무능함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이지만 자기 동생이기도 한 모세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론의 변명이 끝난 바로 그 다음에 출 32: 2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모세는 아론의 말을 듣고서는 결국 아론의 지도력 부재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론은 자신이 유능하고 분별력 있는 지도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에게 사실 그대로를 고백하고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론은 자기 자신은 도저히 모세와 같이 출중한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정했던 사람입니다.
III. 결론
아론은 약점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라고 할지라도 오직 아론의 직계 후손들만이 제사장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연약한 사람이며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아론을 버리지 않으시고 아론 자신뿐만 아니라 아론의 모든 후손들이 대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이와 같은 영광과 축복을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생인 모세를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로서 귀히 여기며 1등이 아닌 2등,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서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등과 주연은 오직 한 사람, 모세가 되게 했고, 자신은 2등이나 조연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고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이 주어진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나 교회 안에도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도자의 그늘 뒤에 숨어서 지도자를 돕는 조력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헤아려서 겸손하게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새 해에 일할 여러 일군들을 뽑아야 할 이 때에 우리 모두 아론의 정신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순종을 가로막는 것들
출 7: 1-7
어려서 개를 좋아했고, 많은 시간 개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불만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앉으라면 앉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그러면 좋을 텐데... 앉으라고 해도 멀뚱멀뚱 쳐다만 봅니다. 공을 던져서 물어오라면 공을 가지고 멀리 도망을 칩니다. 더 속상한 것은 방안에서 오줌을 싸고, 흙 뭍은 발로 이불 위로 뛰어올라오고...
알고 보니까 말을 잘 듣는 개들은 다 특별 훈련을 받았더라구요. 개 훈련소에 보내서 적어도 5개월 정도 훈련을 받아야 그렇게 말을 듣는다더라구요. 그것도 아무 때나 보낸다고 훈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생후 5개월 정도 된 강아지 때 훈련을 시켜야 그렇게 말을 잘 듣는다더라구요.
그러니까 개들이 말을 잘 듣기 까지는 피나는 훈련이 있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이후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귀감이 될 정도로 모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사건건 토를 달았습니다. 못하겠다고 버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조건도 붙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속상하게 만들어드렸고 또 심지어 화나게 까지 해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비로소 본문에 와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군소리 없이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개가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받고 돌아와서 드디어 주인의 말에 순종하게 된 것처럼 모세가 이제야 훈련 과정을 끝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본문 6절 말씀은 드디어 모세가 순종의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지금까지 왜 그렇게 순종하지 못했을까요? 무엇이 모세의 순종을 가로막았을까요? 혹시 우리 안에도 같은 문제가 있어서 순종하기 힘든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이 점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한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자격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출 3:10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처음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대답이 "No!"입니다. 3:11을 보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한 마디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자기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세는 유대인이었지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바로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어머니로부터 은밀하게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그가 받은 교육은 애급의 왕족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을 애급의 왕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또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족속과 함께 살았습니다. 미디안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미디안 종교를 따르며 미디안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돼서 장정만 60만이 넘는 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온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도자들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는 자격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때로는 모세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주의 일을 할 때 나름대로 자격 기준을 들어서 스스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가 이제 얼마 밖에 안 되는데... 나는 평신도인데... 아직 남편도 구원시키지 못했는데... 기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자기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자격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나름대로 자격 기준을 들어서 마땅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 지 제일 오래니까... 나는 남다른 은사를 가졌으니까... 나는 이래보여도 항존직인데...” 자기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자격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준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들에서 양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봐도 왕이 될 수 없던 사람입니다. 자격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바울은 원래 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봐도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던 사람입니다. 자격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고 모두가 감사합니다. 자격 없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자격 없는 자기를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놀라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봐야 할 진정한 자격은 무엇일까요? 출 3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핑계에 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답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자격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출 3:13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누가 보내서 이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출 3:14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이 자격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필요충분한 자격 조건은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확인해야 할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이 일을 맡기셨는가?” 라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출 4:1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또 이런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지팡이를 뱀으로 다시 뱀을 지팡이로 변하게 해 주시는 표적입니다. 둘째는 손을 문둥병자의 손으로 바꾸셨다가 다시 원래대로 해 주신 표적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자격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또 하나의 필요충분한 자격조건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앞 길을 여시고, 이 일에 친히 간섭하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내가 이 일을 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지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이 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능력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하시고 구체적인 표징을 보일 방법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가겠다고 순종하겠다고 나서야 할텐데 모세는 아직도 “No!"입니다.
모세가 또 거절한 이유는 보다 실제적입니다. 4:10을 보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자기는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어렵고 또 바로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모세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께 받은바 사명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에게는 그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핑계를 댑니다. “주님 저는 건강이 좋지 못해서요... 주님 저는 배운 것이 없어서요... 주님 저는 말 주변이 없어서요...” 자기의 무능을 핑계 거리로 삼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역자들도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을 고백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입니다. 저는 벌레만도 못합니다. 저는 마른 막대만도 못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입고 나아가야 할 능력은 무엇입니까? 출 4장을 보면 능력이 없어 가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그 답에서 우리가 힘입고 나아가야 할 능력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출 4:12을 보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주께서 맡겨주신 일을 행할 때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소리쳤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나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때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힘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 출 4:1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모세의 부족함을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 감당하려하지만 언제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주님께서 빌립이 가져온 오병이어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하나 그저 한 사람 밖에 먹지 못하는 적은 양의 먹거리에 직접 손을 대셨습니다. 그 부족한 양을 채우셨습니다. 그래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볼 것이 아니고 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봐야 하겠습니다.
셋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출 4장을 보면 모세가 마지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갔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들이 모세의 말을 잘 따라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저들이 모세를 받아들였고 모세의 지도력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출 5장에 보면 모세가 이제 바로 앞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저에게 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이 아주 냉담합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고 한가해서 광야에 가서 제사를 드리게 해 달라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혹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었습니다.
백성들이 놀랐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기들을 힘들게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모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가 모세에게 찾아와서 따졌습니다. 5:21에 보면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모세가 다시 하나님께 “No!"라고 거절합니다. 출 5:22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순종하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을 거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실패를 맛봅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들고 나아가다가 뜻밖의 암초를 만나 좌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실패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 “내가 내 손을 애급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급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결국은 성공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앞으로도 여러 차례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나 결국은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실패는 당신이 실패자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실패는 당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무언가 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는 당신의 위신이 손상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커다란 시도를 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는 당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다른 방법으로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는 당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실패는 당신의 생을 낭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새 출발할 이유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실패는 당신이 결코 하지 못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약간 오래 걸릴 것을 의미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도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성공할 것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순간의 실패를 딛고 최후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최후 승리를 얻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격에 대한 오해, 능력에 대한 오해,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극복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아론
출 7: 1-7
모세와 아론은 형제이다. 모세는 동생이고 아론은 형이다.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이다. 모세와 아론을 낳아 기른 부모는 아므람과 요게벳이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에 속하는 경건한 부부였다.
아므람과 요게벳의 가정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의 가정이었다. 이 부부는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여자들이 낳는 남자 아이를 학살하는 위험 속에서 생명을 걸고 두 아들을 낳아 기른 모험적 부부였다.
모세가 났을 때 아므람과 요게벳은 석 달을 숨겨 키웠다. 그 이상 더 숨겨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이를 갈 상자에 넣어 하숫가에 두고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예측한 대로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왔다가 갈 상자에 담긴 아기를 보고 애처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미리암은 가까이 가서 아기를 키울 유모를 구해 줄까고 물었다. 공주는 유모를 구해 달라고 했다. 미리암은 달려가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유모로 소개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자기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모세를 이렇게 키운 것을 보면 모세의 형 아론도 동일한 위험과 고통 속에서 키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모세와 아론은 날 때부터 민족의 울분과 고난의 짐을 지고 태어났다. 모세와 아론은 한 집에서 따뜻한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지 못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자랐고 아론은 노예의 아들로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 요게벳이 모세에게 젖을 먹이려 갈 때에는 불안과 초조를 피할 수가 없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으되 희망 없이 자라는 아론을 볼 때에는 불쌍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유년 소년 청년이 되기까지 두 형제는 남남으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론은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아론은 모세가 비록 바로의 궁에서 자라기는 하지만 모세의 가슴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가서 들에서 양치는 목자가 되었다. 40년이란 세월이 물흐르듯 흘러갔다. 모세와 아론은 한 배에서 난 형제이건만 서로 얼굴도 대면하지 못한 채 모세는 나이 80살이 되었고 아론은 83살이 되었다.
그 때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불렀다. “모세야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이 고난 당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도 내가 들었다.”
“이제 내가 저들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리라.” 너는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노니 우리로 광야 사흘 길을 가게 하라”고 고해라.
모세는 하나님께 대답했다.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이스라엘 백성도 듣지 않고 바로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말에 능한 사람이었다. 행7:22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에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에 능한 자라”고 했다.
그런데 왜 모세는 자기는 말에 능하지 못한 자라고 했나? 40년 동안 양치는 목자로 살았기 때문에 말주변이 없어졌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모세는 40년 동안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자랐다. 그러한 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갔다. 그러한 그가 바로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도 떳떳이 나타날 수가 없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핏줄을 타고났으면서 바로의 궁중에서 왕자처럼 행세했다. 그러한 그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보았을 때 모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는 모세로서는 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는 말에 능한 자니라. 그가 너를 만나려 오느니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어라.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어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아론을 찾아왔다. “너에게는 모세라는 동생이 있는 줄 아느냐?” “너는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고 말씀했다.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신 호렙산으로 가서 모세를 만났다. 형제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 배에서 한 핏줄을 타고 난 형제가 난 후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했다. 아론은 말로만 듣던 동생이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 두 형제가 만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다. 모세가 만약 아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입이 뻣뻣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고 하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론이 모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히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하다. 모세와 아론이 만남으로 두 형제가 마음과 뜻을 같이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출애굽기 5장에서 끝장까지, 모세와 아론의 일생이 끝나는 신명기 34장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모세와 아론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모든 일은 모세와 아론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사건은 일어나고 사건은 해결되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아론에게 낱낱이 고했다. 아론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다 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이 저희들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저희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뜻으로 모세와 아론 앞에 엎드려 경배를 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찾아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광야로 보내라고 하신다. 우리들은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기를 원한다.” 바로가 허락할 리가 없다.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어림이 없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재앙을 명령했다. 열 가지 재앙을 명령했다. 바로가 듣든지 듣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전했다.
마침내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다. 애굽을 떠난 지 석 달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했다. 모세와 아론은 큰 일을 했다. 애굽에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만에 해방시켰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 두 사람이 뜻을 모으면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다. 한 사람으로서는 시작할 수 없는 일을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일을 시작할 수가 있다. 한 사람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을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참을 수가 있다. 한 사람일 때는 넘어지면 일어날 수가 없으나 두 사람이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일으켜 줄 수가 있다.
전4:9-11에 기록된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듯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듯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은 한 다리로는 걸을 수가 없다. 두 다리가 있어야 걸을 수가 있다. 신앙의 동지, 사업에 동지, 목회에 동지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역자, 동사자, 동반자, 동업자를 가진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여러분에게 동역자가 있나? 동사자가 있나? 동업자가 있나?
공부하는 학생에게 동업자가 있으면 둘 다 우등생이 된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동업자가 있으면 사업에 성공한다. 목사에게 동역자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주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에게 동사자가 있으면 크게 충성할 수가 있다.
혼자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는 사람, 혼자 날뛰는 사람, 두 사람의 동역자를 못 당한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당해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
내가 누구를 도울까를 생각하자. 누가 나를 도와줄까를 생각하자. 나 혼자 한다. 나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그러한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자만에 빠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큰 일을 못한다.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서로 협력했는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는가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 올렸다. 시내산에는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자욱했다. 산이 진동하고 우레와 번개가 쳤다.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하나님은 백성 중 아무도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오직 한 사람 아론만 동행하게 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율법도 받았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수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받은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낭독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계명대로 준행하겠노라고 서약했다.
그럴 때 모세는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과 70인 장로들을 데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했다. 하나님의 발아래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했다. 그렇게 한 후 모세는 여호수아를 데리고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고 장로들은 백성들과 함께 산아래 머물게 하되 아론과 훌의 지시를 따르게 했다. 아론은 산아래 남아있는 백성들의 책임을 졌다.
모세는 40일 40야를 시내산에 머물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례와 법도를 받았다. 주 내용은 성전을 어떻게 건축하라는 것과 제사장들로 하여금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에 관한 것이었다.
아론이 입을 제복을 비롯해서 성소에 불은 어떻게 켜며 향은 어떻게 사르며 짐승을 잡아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에 관한 법도를 하나님은 일일이 말씀해 주셨다. 출25장에서 31장까지 무려 7장에 걸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모세는 40일 만에 하나님이 친히 쓰신 증거의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을 내려왔다. 모세는 못 볼 것을 보았다.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희희낙낙 춤을 추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모세는 홧김에 두 증거의 돌판을 집어던졌다. 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이 산산조각이 났다.
모세는 아론을 불렀다. “형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님이 어떻게 하셨기에 백성들이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아론의 대답은 “너무 노하지 말아라. 이 백성들의 완악한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저들의 말이 ‘모세는 어디로 갔나?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
그래서 내가 그렇다면 누구든지 금이 있는 사람은 가져오라 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금을 가져온 것이 더미를 이루었다. 그 금을 불에 던져 넣었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아론에겐 회개하는 빛이 없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장본인은 아론이었다. 백성들이 충동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론이 어떻게 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먹고 마셨다. 이러한 아론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아직까지 내가 성경 가운데서 풀지 못하고 있는 난제 중에 하나이다.
아론이 범죄함으로 만사가 파탄의 위기에 놓였다.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제1계명을 범한 죄였다. 제1계명을 범한 마당에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이 지켜질 수가 없었다. 계명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아론은 모세의 오른 팔이었다. 모세는 오른 팔을 잃었다. 아론은 모세의 입이었다. 모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한 동지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가던 길을 가야 하나? 가던 길을 돌아서야 하나? 모세는 벽에 부딪쳤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론이 범죄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대안을 세울 수가 없었다. 동지가 배신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동역자가 범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모세는 용단을 내렸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속한 자는 나오라고 했다. 금송아지 우상 앞에 절한 자들을 도륙하라고 명령했다. 삼 천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이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거든 내 이름을 생명 책에서 제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옥 가도 좋습니다.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세는 다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다시 40일 금식 기도를 했다. 아론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두 번째 증거의 돌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산을 내려왔을 때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나아와 모세를 맞이했다.
모세는 아론에게 대제사장의 옷을 입혔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리게 했다. 아론이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계명을 범했다.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그것은 아론이 자기의 형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 세운 것은 아니었다. 아론을 위해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아론은 죄 용서함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 죄가 있다 없다. 그 일을 한다 못한다. 그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 다른 사람을 세워야 한다. 정죄하는 것, 속죄하는 것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 사람이 죄사함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임직하는 것, 퇴직하는 것도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손을 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한 일을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된다.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은 해야 한다. 죄를 범했더라도 하나님이 맡긴 일은 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면 모든 일은 잘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일을 맡겨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일을 빼앗으므로 사람을 만들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보다 우월하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은 차이가 있다.
모세와 아론은 40년 동안 동고동락 동사동역했다. 모세가 가는 곳에 아론도 가고 아론이 가는 곳에 모세도 갔다. 모세가 원망을 들을 때 아론도 원망을 듣고 아론이 배척을 당할 때 모세도 배척을 당했다. 모세가 백성을 인도하면 아론도 그 뒤를 따르고 아론이 제사를 지내면 모세도 그 제사에 동참했다.
이러한 두 형제가 단 한번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 동안 배회한 가데스를 떠나 므리바란 곳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심히 원망했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 광야로 이끌어내어 죽게 하느냐?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죽음만 못하다. 우리를 이 메마른 사막으로 끌어내어 어찌할 작정이냐? 사람도 짐승도 목이 타죽겠다.”
모세와 아론은 회막문에 엎드려 기도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모세야, 지팡이를 가지고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모아라. 그리고 네 손에 든 지팡이로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게 하라.”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게 한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을 모았다. 모세는 백성들 앞에 나아가 외쳤다. “들으라, 패역한 족속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리라.” 그리고 모세는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다. 사람도 마시고 짐승도 마셨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 일로 모세와 아론을 불렀다. “모세야 아론아, 너희가 왜 화를 내느냐? 물을 너희가 내느냐? 왜 반석을 치느냐? 반석을 명하면 물이 나리라고 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가 물을 주는 것처럼 왜 반석을 치느냐? 너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시내산 사건과 므리바 사건은 대조적이다.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시내산 사건은 큰 사건이요 므리바 사건은 적은 사건이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했으니 도저히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므리바 사건은 불평 불만하는 사건이었다.
시내산 사건에서 모세와 아론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왕과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을 수 있었다. 므리바 사건은 크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편에 서서 자기 의를 내세우려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았다.
어떤 뜻으로 맺어진 동지든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면 자비와 긍휼하심을 입지만 사람편에 서서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만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 앞에 자기 의를 나타낸 것은 단 한번의 실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는 교만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구원의 반석이신 메시야를 내리친 죄를 범했다. 그것은 성령을 훼방한 죄와 같았다.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유의해야 될 일이 있다. 분별과 판단을 바로 해야 한다. 동지 의식이 강하면 인정과 사정에 끌리기 쉽다. 네가 옳다 하면 나도 옳다. 네가 싫다 하면 나도 싫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실수하면 따라서 실수하고 한 사람이 범죄하면 따라서 범죄하기 쉽다.
아무리 마음과 뜻을 같이 한 동지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될 일은 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아론이 화를 내었을 때 모세가 막았더라면 둘 다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칠 때 아론이 막았더라면 둘 다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둘 다 같이 화를 내고 둘 다 같이 죄를 지었다.
출애굽 40년 5월 1일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에돔 변경에 있는 호르산으로 불렀다. 모세는 호르산에서 아론의 옷을 벗겨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다. 아론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마치고 호르산에서 죽었다. 므리바 물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아론을 장사지내면서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나 때문에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아론이 죽은 후 모세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다.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께로 받은 계명을 다시 선포했다. 그리고 느보산에 올라가 죽었다. 므리바 물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세와 아론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 동안 애곡했다.
모세와 아론은 위대한 인생을 살고 위대한 죽음을 죽었다. 위대한 인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뜻을 같이 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것이 위대한 인생이다. 위대한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값으로 사망의 선고를 받았을 때 죽음 앞에 순종하는 것이 위대한 죽음이다.
모세와 아론은 사명을 다하고 죽었다. 모세와 아론은 죽었으나 그들이 한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와 아론은 죽었으나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갔을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므리바의 실수만 범하지 않았더라면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을 것이다. .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동지가 있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동지가 있어야 한다. 큰 일을 하게 되면 동지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중에 믿을 수 없는 동지와 일을 하면 동지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에 죽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는 김재규가 동지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라의 가장 요직인 중앙정보부장의 자리를 맡겼다. 그 김재규의 손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은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이 국가의 공익을 위해 일을 했더라면 절대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적은 일에도 자기 위신과 자기 영달을 위해 일하려 했기 때문에 한국 현대사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지난 1998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시작은 좋았으나 마지막이 좋지 않았다. IMF라는 경제적 난제를 후임 대통령에게 물러 주었기 때문에 국민의 비난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실패한 대통령, 낙제점 대통령, 자기 집도 다스리지 못한 대통령, 역사 철학이 없는 대통령, 독선과 아집을 벗어나지 못한 대통령이란 악평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본인도 그것을 시인했다.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들어야 할 말이지만 자기가 섬기던 교회 교인들에게 냉대를 받았다는 유감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하나는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할 믿음의 동지가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가 마지막에 곤경에 처했을 때 아무하고도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 아론과 같은 동지가 있었더라면 난국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 있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다. 아말렉과 싸울 때 여호수아는 일선에 나가 싸우고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붙들어 내려오지 않게 함으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세와 아론은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여호수아를 앞장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다.
생사를 같이 할 믿음의 동지가 있으면 외롭지 않다. 실패하지 않는다. 죄를 지어도 용서함을 받는다. 저주를 받아도 상은 잃지 않는다. 땅에서 원망을 들어도 하늘 나라에서 상을 받는다.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해도 천국에는 들어간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믿음의 동지 동역자를 가지기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