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윤덕영 -친일공작 앞장선 윤덕영 고종 괴롭혀 간접살인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1.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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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윤덕영 -친일공작 앞장선 윤덕영 고종 괴롭혀 간접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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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9. 21:02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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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
-친일공작 앞장선 윤덕영 고종 괴롭혀 간접살인
고종 황제가 돌아가신 것은 1919년 1월22일 오전 6시20분으로 당시 황실업무를 담당했던 이왕직에서 발표했고 그리고 지금까지 공식화 돼 있다. 하지만 이 일시는 조작된 것으로 시정돼야 한다. 실제로 황제가 숨진 것은 21일 새벽 1시45분이었다. 그렇다면 28시간 남짓을 속인 것 이 된다. 속여야 할 그 속사정이 뭣일까. 돌아가신 그 시간에 하세가와 조선 총독을 비롯하여 황실 사무를 총괄할 이왕직 장관 등 간부들이 일본에 가 있거나 가고 있는 도중이었다. 영친왕의 결혼이 결정되어 그 준비를 위해서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하급관료들로서는 겹치게 된 영친왕 결혼의 경사와 고종 서거의 애사의 선후를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 할 수가 없었기에 발표를 망설였던 것이다. 동경에 가있는 고위층과 전화연락 끝에 선조후경으로 결정되어 통고된 것이 21일 밤이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사실대로의 시간으로 공표해도 될 것을 왜 조작해야 했을까. 흉흉했던 당시의 민심이 바로 그 변수다.
이미 발표하기 이전에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궁밖에 퍼져 있었다. 일본 총독부가 순종황후인 윤비의 친정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50만원의 거금을 공작금으로 주어 독살한 것이라느니, 궁내부대신을 역임했던 민병석과 윤덕영을 총독부가 사주, 고종의 전의 안상호로 하여 금독탕을 마시게 하여 죽게 했다느니, 돌아가신 즉시 시신이 흑갈색으로 변색했느니 등 독살설이 무성하게 나돌았었다.
그 무렵 파리강화 회의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밀사를 고종이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에 놀란 총독부는 '조선 백성들은 일본의 문명통치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을뿐 아니라 짐도 감히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친필 서한을 고종으로부터 받아내려는 역공작을 펴 고종과 가깝게 오갈 수 있는 윤덕영에게 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들어줄 고종이 아니요 그 앙갚음으로 밀명을 내린 것이 독살이라는 것이었다. 윤덕영이 후에 말한 바에 의하면 이 독살설 때문에 팔도의 유생들로부터 협박장이 답지했고 암살단까지 조직했다는 경찰 보고도 있어 한동안 일본군이 신변 보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했다. 이런 민심의 회오리 속에 돌아가신지 28시간이나 늦춘 후에 발표를 했다가는 독살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되고 그때 회오리 칠 민심에 겁을 먹고 붕어일시를 조작한 것이다.
윤덕영의 독살설은 미지수로 남았지만 적어도 간접살인자로서의 오명은 벗어날 수가 없다. 고종은 갑자기 졸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것으로 돼있다. 졸도 이전까지는 건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데 졸도하게 된 유발요인이 있다. 졸도 십 수시간전에 그토록 반대해왔던 영친왕과 일본 귀족인 방자여사가 정책결혼을 위해 슬하를 떠나갔던 것이 다. 작별인사를 하러 들어온 영친왕을 본 고종은 몸의 중심을 잃고 고개를 의자에 기댄 채 들지 못했을 만큼 이미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 정책결혼에 수행할 순종황제의 장인이요 윤덕영의 아우인 윤택영, 이완용 송병준 조동윤 등이 함녕전으로 고종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도 '가엾은 세자를…' 하며 말을 못 맺었다 했다.
이 충격의 씨앗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윤덕영인 것이다. 그의 회고담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왕세자(영친왕) 전하와 일본 귀족과의 혼인은 내가 주장해 온 바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오로지 나의 노력 덕분이다. 한데 이태왕(고종)께서는 이 일을 반대하시고 민영돈의 딸과 혼약하고서 마치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비가 살아계셨을 때 약혼해놓은 것처럼 속여 일본 귀족과의 결혼을 방해했다. 이에 이왕가의 흥망이 걸린 문제로 보고 이미 혼약예물로 호박반지까지 보낸 이 사이를 분쇄하는 공작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약혼녀의 아버지인 민영돈은 나와는 가까운 인척관계에 있었다. 나의 맏며느리가 바로 민영돈의 큰딸이기에 만약 이 혼사가 이루어지면 후덕이 만만치 않음을 내가 모를 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버리고 이왕가의 혼약을 밑바닥부터 부셔 버린 나의 충심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영친왕이 떠나던 그날 고종은 저녁을 든체만체 하고 자리에 누우셨다. 이때 상궁 몇이 여느 때처럼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드렸는데 이때 읽은 책은 사방산 이야기였다.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적거리시더니 10시 넘어 뇌일혈 증상을 일으킨 것이다. 이왕직 사무관인 겐도오가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2시. 덕수궁 함녕전으로 달려가니 전의 안상호와 총독부 병원 모리야스 박사가 머리맡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고, 이강 이지용 이재각 민영휘 조중응 등이 별실에 와 있었다 했다. 발표도 있기 전에 돌아가신 사실이 궁밖으로 흘러나가게 된 것은 궁녀들의 애절한 곡소리 때문이었다. 일본 관리들은 함녕전의 문을 모두 닫고 커튼을 쳤으며 덧문까지 닫았는데도 그 곡소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울지 못하도록 협박을 했지만 유독 한 여인의 울음만은 막을 길이 없었다. 정화당 김씨였다. 영친왕의 약혼녀 민규수의 백년한이 윤덕영의 작품이거니와 고종황제의 약혼녀 정화당의 천년한도 바로 윤덕영의 노회한 작 품이다.
강제합방후 일본이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는 숙제가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까지 친히 가서 일본 천황 앞에 가 무릎 꿇리는 주종의 예를 베푸는 일이었다. 이 일을 처음 맡았던 이완용이 고종을 배알했을 때 끝내 등을 돌리고 얼굴을 대하지 않았으며, 순종을 배알했을 때에는 좀체로 성낸 적이 없던 황제가 “총독의 힘을 빌려 짐을 협박하는 게로군”이라 했다 한다. 이렇게 두 황제의 눈 밖에 나고 그로써 일본측에서도 쓸모가 없게 되자 친일파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공작의 악역을 좋다하고 자임하고 나선 것이 윤덕영이다. 순종의 모든 것을 덕수궁의 고종이 조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첫 공작이 고종의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는 일이다. 덕수궁의 살림들에 이 명분 저 명분을 들어 딱지를 붙였다. 그래도 굽힐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윤덕영은 고종이 친근히 지내는 광화당 이씨 삼축당 김씨를 내쫓고 수발드는 궁녀를 축소함으로써 인의 장막을 풀고 고독 속에 몰아넣었다. 충분히 계산된 고립정책이었다.
그래놓고 어느날 고종에게 아뢰었다. “민 황후 참변 후에 후궁으로 혼약한 규수 김씨가 30년 동안 공규로써 전하의 은총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키고 있사오니 군덕을 베푸옵소서” 했다. 미인계인 것이다. 그리고 하세가와 총독도 이 사실을 알고 어찌 한 인생을 그토록 불행하게 저버릴 수 있는가라고 말하더라는 공갈을 잊지 않았다. 물러가라고 여러 번 호통치는 데도 윤덕영은 6시간을 버티어 고종을 피로케 한 다음 일단 누군지도 모르는 김씨를 궁안에 들여놓고 살도록 하는데 허락을 받아 냈다. 그리하여 1917년 5월 윤덕영이 고종의 특사로서 수절하고 있는 김씨 집에 가 서른일곱살의 노처녀를 이화문장이 영롱한 쌍두마차에 태워 덕수궁 문안에 들여놓았다. 정화당이라는 호칭이 주어지고 별당에 살게 했으며 이왕직에서는 월 3백원을 내려 생활토록 했다. 물론 고종은 이 정화당을 한번 불러본 적 없고 정화당도 고종의 얼굴 한번 본 적 없이 상을 당한 것이다. 동서고금에 남편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아내로 산 여인은 정화당뿐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고종이 계신 침전에 든 것은 고종 서거후의 일이며, 윤덕영의 빈전을 지키라는 분부때문에였다. 정화당의 애절한 울음소리는 밤을 새웠고 이 통곡이 덕수궁 담 넘어가 윤덕영의 독살설을 유발한 것 이다. 물론 정화당의 울음은 고종의 주검을 슬퍼하여 우는 울음은 아닐 것이다. 한번 보지도 않은 남편에게 무슨 정이 있어 울겠는가. 그녀의 울음은 너무도 기구한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강제 합방 전후해서 이완용과 윤덕영의 사이는 험악할 정도로 나빴다. 이완용은 외척을 빙자하여 농간을 일삼는 소인배라고 말하고 다녔으며, 윤덕영은 일본 유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다녔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을 조선 제일의 인물로 치지만 그자는 본래 주의주장도 없고 절조도 없으며 대세의 굴곡을 잘 탔다는 것밖에 없다. 러시아 전성시대에는 친로파가 되고 미국 전성시대에는 친미파가 됐으며 노일전쟁 후에 일본이 득세하자 이등박문의 그늘 뒤에서 춤추지 않았는가. 나는 동양정신의 고루함을 못 벗어난 탓인지 지난 30년 일본을 신뢰하지 않고는 조선이 존립할 수 없다는 오로지 그 한 신념으로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크고 작은 일을 다 처리해내지 않았던가” 했다.
누구나가 손대기 싫었던 일로 윤덕영이 지탄을 받아가며 해낸 일이 궁녀들을 궁 밖으로 내쫓고 임금의 재정을 바짝 죄는 소위 궁중 숙정을 해냈고, 고종과 순종을 갈라놓는 덕수궁 창덕궁 분리도 역적소리 들어가며 해냈으며, 강제병탐의 궁내공작과 순종황제를 일본 천황앞에 데려가 무릎 꿇리는 굴복의 예를 성사시킨 것이며, 고종의 죽음을 부른 영친왕의 일 본 여인과의 결혼도 그가 해낸 악역이었다. 합방후 윤비의 친아버지인 윤택영은 몰락하여 서울의 고리대금을 다 갖다 쓰고 중국 일본을 방랑하는 처지가 됐는데, 윤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은 옥인동의 아방궁으로 불리는 초호화주택을 짓고 살며 당시 양대 은행인 해동은행을 설립, 은행장으로 취임하는가 하면 1930년대 전반 소득세납부로 본 20대 재벌 가운데 18번째로 돈많은 거부가 됐다. 토속부자인 박영효나 윤치영보다 부자고 신흥부자인 박흥식보다 부자였다. 일제때 왕가의 급용을 핑계대고 몇 백원씩 타 간 돈과 순종에게 연 9만원, 윤비에게 그 반액으로 드린 용돈을 이런 저런 핑계로 가로챘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 다. 결국 그 돈 다 날리고 그 역시 유랑의 신세가 되고 말았긴 하지만···.
조선일보 1999. 08/26(목)
[출처] 윤덕영|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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