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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타케시(岡田武史)는 1956년8월25일생입니다.
현재 직책은 일본국가대표팀 감독 겸, 일본축구협회 특임 이사 입니다.
일본 축구협회의 매우 특징적인 모습인데, 국가대표 A팀의 감독을 이사회에 넣습니다.
이게, 보다 확실한 정책 지원을 위한 것 같습니다.
별명은 "오카짱"인데, 현역시절부터 그 안경... 그게 유명했답니다.
그래서 운동장에 나갈때 안경을 벗으면 동료 선수들이 되게 어색해 했다능... (풋)
성격은 매우 담백한 편으로, 벤치에서 양복입는 걸 싫어해서 맨날 운동복만 입다가,
이누카이 일본축구협회장이 뭐라 해서 지금은 양복을 입는답니다.
오사카 출신으로 매우 솔직 담백한 면이 강한 A형입니다. 선수시절에는 수비를 보았고,
옛 소속 구단은 JSL 실업팀인 "후루카와 전공(古河電工)" 입니다. 19801~1990년까지 10년간 189회 출장을 했군요. 대표팀 경력은 1980~1985년까지 24경기 1득점입니다.
아버지가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원래 초딩 시절엔 오사카 야구장에서 난카이 호크스를 응원하던 야빠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들어가서 야구부에 갔더니 선배들이 후배들을 하도 엄하게 두들겨 패는 바람에 "이 뭐병?" 하고 야구부를 관두었답니다. 대신 당시 멕시코 올림픽에서 일본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했는데. 그걸 보고 "아~~ 씨바 대세는 축구야" 하고 마음을 먹고 축구에 매진, 고등학교 시절엔 제법 유망주 소리를 듣기 시작했어요. 결국 고3때 청소년 대표에 뽑혔는데, 당시 고3 학생은 딱 세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아 선수권에 출전하는 명예를 얻었네요.
고등학교시절 "독일에 축구유학을 가고 싶다" 고 마음을 먹은 고딩 오카다는 어디에다 물어보면 좋을지 몰라서 일본축구협회로 전화를 걸어서
"저... 독일 유학을 가고 싶은데요... 어떻게 가나요?"
라고 했다가
"일단 학교는 졸업하고 보자?"
는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오카다 감독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는데, 여기서 현재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피지컬 코치로 있는 이케다 세이고와 선후배 관계를 맺습니다. 이케다 코치가 1년 후배인데요.(나이는 2살 많은데 1년 재수했음) 또한 고려대와 와세다의 정기 교류전 덕분에 한국에게 "물리도록 져봤다"고 하네요.
하지만 재일교포가 많은 오사카 특징상, 한국인과 문화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이케다 세이고 코치가 홍명보 감독의 "삼고초려"를 받았을 때, 선배의 조언을 묻자, "한국 축구를 배우기 위한 좋은 기회다" 라고 적극 추천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고려대의 영향(?)인지 선후배 관계가 제법 타이트하기로 유명한 와세다 대학 축구부에서도 후배의 빨래 심부름을 별로 시키지 않은 맘 좋은 선배로 기억되고 있다네요.
물론 고려대 출신인 홍명보 감독을 마치 자신의 대학 후배처럼 아끼는 "선배삘"도 있답니다.
고려대와 와세다대의 교류전이 한일 축구 교류의 커다란 흔적을 남겼음을 알수 있죠.
대학 졸업 후 원래는 언론인 되려고 언론고시를 준비했답니다.
그래서 TBS(도쿄 방송)에 시험을 봐서 서류전형은 합격했고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더랍니다.
면접관의 질문이 "TBS가 뭐의 약자일까요?" 였는데
본인은
"(아썅,,, 조때따...) 도쿄 뭐시긴거 같은데"
라고 답했다가 당근 낙방. (답은 도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
언론고시 준비까지 했것만 되도 않는 질문에 낙방한 오카다는 1980년 후루카와 전공에 입사합니다. 후루카와 전기 공업 주식회사의 일반 사원으로 생활하면서 저녁에는 후루카와전기공업 축구부 (現J리그 제프 치바의 전신)에서 공을 찼습니다. 원래 대학시절부터 "지능형 수비수"로 이름을 날린 탓에 일본축구리그(실업)에서도 이름을 날리더니 1986년엔 소속 팀의 아시아 클럽 선수권(ACL의 원형) 우승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요.
현역시절, 시간개념이 매우 부족해서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켰는데, 리그 최하위 스미토모 금속(현 가시마 앤틀러스)을 상대로 일본 리그 연승기록 갱신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답니다. 그런데, 하필 부인과 외출했다가 경기시간에 맞추지를 못해 결국 후반전에 출전을 했다능...당연히 팀은 패하며 연승 끝!
수비수이자, 지적인 선수였던 그는 당시 일본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던 "존 디펜스" 개념을 본인 스스로 책을 뒤져가며 공부한 끝에, 감독에게 직접
"이번 한 경기만 존 디펜스 합시다. 만약에 지면 다시 맨투맨으로 돌아가고요."
하고 청원을 한 끝에 경기를 무실점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1982년에 있었던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된 오카다. 원래는 마에다 히데키라는 선수가 대표팀 주장이었는데 부상으로 멤버 제외. 그 자리를 메우러 들어간 거랍니다. 근데........ 조별예선에서 본인의 A매치 최초이자 마지막 골을 넣었는데, 그게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한 경기였습니다. (엉?) 당시한국 멤버는 최순호, 강신우 등이 있던....
현역을 마감한 계기는 후루카와 전공이 독일 바이에른 뮌헨을 초청해서 친선경기를 가진 1990년이었는데 원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다가 세계수준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마음으로 처절하게 도전했다가 2:1로 간단히 제압당하자, 일본과 세계의 벽을 통감한 그는
"일본인이 이런 외국팀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해야 이기겠는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지도자의 길을 걷기로 하지요.
현역 은퇴 후 당연히 후루카와 전공의 코치로 발령을 받고, 잠시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에 그리던 독일로 지도자 유학을 떠난 오카다가 일본에 귀국하니 J리그 발족이라는 대 사건이 터졌죠. 본인 말로는 "세상이 깡그리 변한 듯한" 인상을 받았답니다. 제프 이치하라의 키요쿠모 에이쥰 감독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는데 이 키요쿠모 에이쥰 감독이 또 중요한 Key Person입니다.
키요쿠모 에이쥰은 1987년 일본 클럽으로는 최초로 아시아 클럽 선수권 대회를 우승하여 일본 국내에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활동했는데, 그 때 감독이 일본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스 오프트입니다.
한스 오프트는 페예노르트 출신의 네덜란드 감독으로, 말하자면 히딩크와 동년배(히딩크 46년생, 오프트 47년생)로 네덜란드 토탈풋볼의 세례를 흠뻑받은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전술과 전략에 대한 개념은 선수시절 페예노르트의 라이벌 PSV에서 뛰었던 히딩크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환경(히딩크는 PSV, 오프트는 페예노르트)에서 형성된 것으로
1992년 자국에서 열린 AFC 아시안 컵을 우승으로 이끌고 (한국은 당시 태국에게 밀려 예선 탈락했음...) 1994년엔 도하의 비극(이라크의 골로 대한민국이 94년 월드컵 진출... )까지 팀을 잘 이끌고 나갔죠.
한스 오프트가 남긴 유산은
아이 콘택트, 스몰 필드, 트라이앵글, 슈퍼 서브 와 같은 축구용어가 있는데, 그 개념이 히딩크가 우리 선수들에게 요구한 것과 비슷한 개념들이죠. 또한 선수 교체를 왠만하면 하지 않는 보수적인 타입으로, (같은 네덜란드 학파인 허정무 감독도 선수 교체는....) 매우 소극적인 경기운영을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선수 발굴과 육성에는 탁월해서 (같은 네덜란드 학파인 허정무 감독도 선수는 잘 발굴하죠) 쥬빌로 이와타 시절에는 팀의 전성기를 이끌어냈죠.
이런 한스 오프트의 영향을 받은 키요쿠모 감독의 밑에서 오카다는 직간접 적으로 "네덜란드 학파"의 조류를 받아들입니다. 네덜란드 학파(Dutch School)은 볼 포제션을 극대화하고 공간활용을 통한 빌드업을 주요 목표로하는 네덜란드 풍의 축구를 의미하는데, 이는 결국 Passing Game과 삼각형 구조(트라이앵글)라는 지엽적 개념들의 도움을 받지요.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네덜란드 학파적인 축구를 하는 두 감독을 들라면 저는 홍명보와 오카다를 꼽고 싶긴 하네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태클 사양...(--;)
한스 오프트와 도하의 비극 이후, 일본 축구협회는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텔레 산타나 감독을 데려오려고 하다가, 돈 이야기에서 막혀서 급한 김에 팔칸이라는 브라질 감독을 데려왔습니다. 언론과 팬들이 싫어할 만 했죠. 근데 그만 이 팔칸이 아시안 게임 준준결승에서 한국에게 박살이 나면서 "일본인 감독으로 돌아간다"는 JFA의 결정이 내려졌죠.
여기서 가모 슈 감독이 등장합니다. 가모 슈 감독은 한스 오프트 감독의 유산을 지켜내려했고, 때문에 한스 오프트 휘하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키요쿠모 감독을 데려오려했죠. 하지만 키요쿠모는 이를 고사했고 대신 오카다를 추천합니다. 결국 오카다 감독은 "키요쿠모 감독이 나를 싫어해서 대표팀에 보낸다"고 억울해 하면서 일본 대표팀 수석코치로 들어갑니다. 가모 슈 감독은 "존 + 프레스"를 신봉하는 감독이었고, 한스 오프트는 "존 + 프레스 + 빌드업"을 추구하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당시 가모 슈 감독은 이를 팀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인재를 모으는데 열심이었죠. 오카다는 일단 1) 가모 슈 감독님하고 안친하다. 2) 지도자 경력이 짧다. 3) 한스 오프트 같은 사람 난 잘 모른다. 고 고사를 했지만, 결국 키요쿠모 감독의 집요한 추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표팀에 합류합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한국과의 인연이 이어집니다.
가모 슈 감독은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승승장구하며 마침내 숙적 한국을 홈으로 불러들입니다. 물론 요요기 국립경기장에서의 일전은 한국의 승리 (2:1) 일본은 실망하고, 이어 언론은 연일 2002년 월드컵 개최를 놓고 신경전 중인 한국에 패한 감독을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카자흐스탄 원정에서의 무승부로 일본 언론은 완전 까임 모드로 변했고, 결국 일본 축구협회는 감독의 목을 칩니다.
오카다는 속으로 "조때따...." 라고 읇조렸을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한국이 다시한번 천운을 선사했죠. 그의 유일한 A매치 득점을 안겨준 한국이 말이죠. 오카다는 단지 "지금 현재 팀 분위기를 잘 안다"는 이유로 대표팀 수석코치에서 감독대행으로 승격합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감독 대행 오카다는 우즈벡과의 경기에서 1:1로 겨우 비기며 승점 1점을 기록한 뒤, 2위 싸움의 상대인 UAE와 홈에서 일전을 벌였지만 이 역시도 1:1. 언론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마침내 이번 상대는 숙적 한국!
당시 경고누적으로 수비의 핵인 홍명보가 결장하게 된 한국은 홈, 잠실운동장에서 오카다 재팬을 맞이합니다. 나나미, 로페스의 골로 2:0 쾌승. 일본 언론은 급방긋 오카다를 치켜세웠습니다. 그리고 최종전 카자흐스탄 전에서 5:1 대승. 승점 13점으로 승점 19의 대한민국에 이어 조2위로 월드컵 예선 플레이 오프에 나갑니다.
당시 아시아에는 티켓이 딱 3.5장 뿐이었고, A조 1위(사우디)와 B조 1위(한국)이 걍 나가고 나머지 2위들끼리 플레이오프. 때문에 A조 2위 이란과 플레이오프를 치뤄야 했는데, 여기서 3:2로 승리하며 마지막 3번째 티켓을 따 냅니다. (이란은 결국 4번째 진출국이 되기 위해 호주와 일전을...)
나카야마 마사시(별명, 곤)를 적극적으로 발탁하는 등, 일본 대표팀에 숨을 불어넣은 공로로 대표팀 감독으로 정식 승격되기도 하였죠. 하지만 1998년 월드컵에서 3전 전패 하면서 1승1무1패 승점 4점으로 예선을 돌파한다는 계획은 결국 좌절되고 맙니다.
그 후로 J리그를 유랑하며 성적을 남기던 그에게 다시한번 대표팀의 부름이 있었던 것은 2007년 11월의 일이었습니다. 이비챠 오심 감독이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2008년 2월부터 시작되는 월드컵 예선에 차질이 생긴 것이죠.
당시 기술위원장 오노 츠요시는 급히 후임을 물색하다가 시간이 없으니 말이 통하는 감독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오카다 감독을 불러들였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기록이 2개가 있는데.
1)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는 5경기 연속 패배 기록이 최초 (98월드컵 3경기 및 친선전 포함)
2) 월드컵 3전 전패한 감독이 다시 A팀 감독이 된 세계최초의 기록
입니다. (웃음)
2008년 국내파만으로 대표팀을 꾸려서 훈련을 대학팀이랑 했는데, 1:0으로 졌습니다. (엉?)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 가서 3개월 전 친선경기를 가진 네덜란드와 한조에 속하게 되자, 일어나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게 영어로 인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 "그나저나, 일본 대표팀 감독은 어디갔어?" 라고... 3개월 전에 시합까지 했는데, 존재감 0 이었음이 밝혀져서 뻘쭘했다는. (엉?)
게다가 같은 조 감독들끼리 사진을 찍는 포토세션이 전통으로 되어있는 FIFA 조추첨 행사에서 오카다 감독만 안보여서 기자들이 "어디계셨어요?" 했더니, "월드컵을 두번이나 나오지만 이게 전통인 줄 몰랐다" 고 뻘쭘한 대답(하아....)
그런데.... 승점 6점으로 16강 진출하여 까임방지권 획득.
(웃음)
원래는 더 일찍 써보려 했는데, 오카다가 워낙 병진이 되어버린 탓에
까임방지권 획득 후 올려봅니다.
허정무 감독은 대체 언제 까임 방지권을 획득하려나....
PS. 오카다 감독은 일본에서도 "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내 뱉는 "친한파" 감독입니다. 현재의 일본 대표에게서 옛 98년도 한국 대표팀의 포스을 느끼는 것이 저만은 아닌것 같네요. 이젠 한국의 장점까지 흡수하려는 것인가? 오카짱?
첫댓글 재미있게읽고갑니다...^^
아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왠지 정이 가는 얼굴이던이 참 재밌는 양반이네요 ..A형이 걸린다는 ㅋㅋ 혈액형을 믿진 않습니다만 ㅋㅋ
잘보았습니다. 허정무감독이나 국내 유명감독도 올려주심 재밌을것 같네요 ㅋ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덤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인생드라마를 내보내는 우리나라의 언론도 생각나는 글이라 더 재미있었습니다. ^^
재밌네요 ㅎㅎ. 차붐이 참 좋아한다던데 ㅋㅋ.. 그나저나 전 이번월드컵 끝난 이후가 더 흥미롭습니다. 과연 일본축구의 스타일은 어떻게 변할것인가 ㅎㅎ. 한국과 같은 길을 갈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일본만의 길을 만들것인가 흥미롭네요. 그가운데에는 한국과의 끊임없는 경쟁이 있을테구, 여러모로 기대됩니다. ㅎㅎ
잘읽었습니다^^ 한번 실패했던 감독을 다시 쓴다는게 장점은 있는것같습니다
글 참 맛깔나게 잘쓰셨네요...ㅎㅎ 오카다 감독 생긴것과 다르게(응?) 학구파군요 ㅎㅎㅎ
오카짱은 얼굴만 봐도 A형 ㅋㅋㅋ
이거 잼있네요 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ㅎㅎ
재미있는글 잘읽었습니다/./.. 허감독이나 오감독이나 인생역전?/ㅎㅎ
오카다 감독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것 같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 쓰셨네요. 쏙쏙 들어 옵니다.
대단한 지식이시네요! 감사합니다.
19801년이라니! 오카다는 미래에서 왔군!<-퍽
뭐, 수정 안해도 재밌을 것 같긴 합니다만 오타라서 지적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