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철학하기 중간과제
A조 국어국문학과 2019101010 김진주
<익숙한 낯설음>
이제 막 법적으로 성인이 된 날이었다. 글쎄, 그 순간에 합당한 질문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나와 가장 가까웠던 누군가가 내게 던진 한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내가 가장 원하는 죽음이 어떤 방식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너무 늙어 허무하지도 너무 젊어 날카롭지도 않은 존재가 되면-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할 때까지 사막을 걷다가 죽음도 인지하지 못하고 죽고 싶다고 답했다. 내 남은 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소진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른 채로, 고됨과 배고픔에 무뎌질 때까지 걸어 지우개처럼 생이 닳도록 하겠다고. 그렇게 답한 이유에는 나의 죽음 앞에서 무엇도 그리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나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장치들을 버렸다는 사실이 나의 생을 일단락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고 싶었다.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제주에 여행을 다녔다. 여행이라기엔 너무 길었고, 정착이라기엔 방황에 가까웠다. 바다와 코를 맞대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반년을 넘게 살았다. 육지에 일이 생기면 잠시 올라갔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집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날들이었다. 마음이 편안한 곳과 일상이 편리한 곳이 일치하지 않아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도피처로 선택한 곳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그곳이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나에게 제주는 곧 게스트하우스였고, 게스트하우스가 곧 제주였다. 내가 크게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학교를 제주로 결정한 이후 완전히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온 지 똑같이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제주는 익숙했다. 육지 사람이면 잘 모르겠지만, 으로 시작되는 웬만한 제주 사람들의 말에 팔 할 정도는 뻔뻔스럽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은 그랬다. 여행자로 일 년을 돌아다녔으니 거주지는 몰라도 관광지는 잘 알았다. 사람이 많은 게 싫어 소중한 비밀 장소도 만들어 두었다. 그렇게 익숙한 곳이면 행복했던 게스트하우스의 생활처럼 또 행복한 날들이 생겨나리라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긴 시간을 머물렀다고 한들, 여행자의 신분과 거주자의 신분은 너무나도 달랐다. 모든 곳이 익숙하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는 조천읍에 위치해 있었다. 함덕 바다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 20분, 서우봉까지는 왕복이 한시간 반 정도로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바다만 보이는 곳에 있었다. 바닷바람이 불어 짠기에 얼굴이 늘 퉁퉁 부어 있었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을 새면 가리는 것 하나 없이 바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었다. 겨울에는 화목 난로에 장작을 땠다. 벌목한 땅에서 편백나무를 얻어오고 귤을 수확한 후 가지치기를 마친 귤밭에서 귤나무를 얻어 왔다. 편백나무는 몇 시간, 귤나무는 몇 시간 타는지도 알았다. 손과 눈알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고 난로에 귤껍질을 던져 놓았다. 침상에 누워 있으면 나무로 지어진 천장에서 바퀴벌레가 떨어졌다. 보일러 하나 없는 방에서 군용 매트리스 위에 만 이천 구백원짜리 싸구려 전기요를 틀고 잤다. 전기요는 온도조절장치가 항상 고장 나 있어서 아예 차갑거나 너무 뜨거웠다. 자고 일어나면 뜨거운 다리에 양철 컵을 문질러 피부를 식혔다.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 촌장님이 끓여준 짜이를 마셨다. 그러고 있자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이 짜고 뜨겁던 11월의 제주였다.
내가 저당 잡힌 그리움은 거기에 위치했다. 가을이 되면 몸이 자꾸 아팠다. 똑같은 냄새가 나고 똑같은 바람이 불었다. 홧김에 가출하듯 몸빼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시청 부근에서 먹었던 오므라이스가 가끔 생각났다. 귤도 먹고 싶었다. 향도 피우고 짜이도 끓여 마셨다. 그러나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익숙했지만 모든 게 낯설었다. 가끔 함덕에 갔다. 눈을 감고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와 초록색 바다가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하고 덤덤하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낯설었다. 가출하듯 버스를 타고 찾았던 시청은 지금 우리 집에서 20분 거리, 친구를 만나고 저녁을 먹으러 매일 가는 곳이 되었다. 내게 이제 더 이상 제주는 없다.
내게 지금 가장 낯선 것은 제주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사랑했던 어느 구석에 가더라도 편안하게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집과 해야 하는 일을 제쳐두고 잠시 떠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나는 변했고, 제주는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변해버린 내가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낯설음’은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내가 만들어내는 간극 그 자체였다.
나는 나의 간사함을 실감한다. 불변에 대한 열등감을 체화하고 있다.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은 그에 대한 나의 정의를 붕괴시킨다. 그까짓 낯설음 쯤, 새로운 정의로 받아들이면 그만일지 모르겠지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는 과거로 회귀하는 일이 심신의 도망과도 같아서 차라리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낯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나는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여서, 여전히 완벽하게 낯선 사막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운 것을 떠올리고 그 순간에 머무르지 못한 나를 자책하거나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가장 ‘무(無)’에 가까운 곳에서 떠돌고 싶다. 사막의 풍경은 꽤 오랫동안 같고 또 매 순간 달라질 테니, 익숙해지지도 낯설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신체가 굶어 꼬부라지든, 썩어 문드러지든 상관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나의 종말이면 좋겠다.
그러나 익숙한 낯설음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로 치부할 수 있다면, 그렇기에 무엇도 쉽게 정의하거나 인생의 지표로 쐐기박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날들이 온다면 나의 제주는 또 한 번 달라지겠지, 가을이 와도 몸이 아프지 않은 11월의 제주를 기다리는 익숙한 날들이다.
첫댓글 한 편의 작품을 읽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표현들이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답니다. 다만 뭐랄까. 감수성에 호소하는 표현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와는 반대로 <나의 간사함을 실감한다.>는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글쓰기에 대한 낯선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