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9.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이사38,1-6.21-22.7-8 마태12,1-8
영원한 청춘
“주님과 일치의 여정”
주님과의 일치가 안식이자 치유의 구원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열정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영원한 청춘이요 참 아름답습니다.
세월의 흐름에도 풍화작용을 겪지 않는 늘 푸르는 영혼입니다.
어제 난(蘭)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고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 100명의 교사들 가운데 사군자(매난국죽梅蘭菊竹)로 네분이 명명됐는데
저는 난(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표적 사군자로 봄의 매화(梅花)로서는 지조의 남명 조식, 여름의 난(蘭)으로서는
절개의 정암 조광조, 가을의 국(菊)으로 기품의 다산 정약용, 겨울의 죽(竹)으로 인고의 포은 정몽주를 꼽은
기사를 봤습니다.
사군자로 상징되는 인물들 역시 진리에 몸바친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분들이겠습니다.
바짝 말라 붙었던 불암산 계곡이 요즘 내린 비로 청춘을 회복한 듯 합니다.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집무실에서도 우렁차게 들립니다.
어제는 빗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썼고 오늘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곳곳에 흐르는 도랑물에 침묵의 땅은 노래하는 살아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들려 오는 매미노래 소리들입니다.
꼭 하늘 비가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하늘 비 없어도 늘 은총으로 맑게 흐르는 계곡물 같은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성전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수도형제들의 시편성무일도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 소리가
늘 맑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처럼 들립니다.
영원한 청춘의 삶에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결정적 요인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많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김포에서 수도원을 방문했던 레지나, 헬레나, 이사벨라 50대 후반의 자매들,
참으로 하루종일 기쁘게 신바람나게 일하고 떠날 때 전혀 피곤하지 않은, ‘영원한 청춘’을 연상케 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은, 얼마나 신선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지요! 감동했습니다.
그 산더미 같던 배즙들을 박스에 말끔히 넣어 포장하니 무려 수백 박스입니다.
저보다 한 살 연상 48년생인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런 “칼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입니다.
여전히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유일한 작가일 것입니다.
‘청춘예찬’이란 글에서 마지막 대목이 강렬했습니다.
“찰스 다윈, 정약전, 정약용, 이벽, 이승훈, 황사영, 안중근은 모두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청춘이다.”
책 뒷 표지의 말마디도 정다웠습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87세 고령에도 한결같이 활약을 펼치시는 열정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에서 지금도 영원한 현역으로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해 사는 70대 스테파노, 마르코 수사도
나이에 관계 없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의 영원한 청춘입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여정중에 한결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일치의 관계가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병이 들어 죽다가 간절한 기도로 살아 난 히즈키야가 영원한 청춘입니다.
물론 하느님과 히즈키야 사이에서 다리 역할에 분주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역시
영원한 청춘의 예언자입니다.
히즈키야의 기도와 응답과정이 감동적입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기도후 슬피 통곡하는 히즈키야에 감동한 하느님의 응답이 이사야를 통해 계시됩니다.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이에 대한 표징이 무엇이냐는 히즈키야의 물음에 대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이사야의 말씀도 감동적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이사야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또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라는 대목에서
역시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를 살았던 다윗인지 잘 드러납니다.
얼마전 너무나 잘못된 확신으로 얼마 못 살고 병으로 죽을 것 같다는 모녀분에게 강력히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제 허락없이는 절대 두분에 죽음을 주지 않습니다.” 격려했을 때
안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영원한 청춘의 예수님 모습이 참으로 눈부시게 드러납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예수님께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가 분별의 잣대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분별의 잣대로 삼을 때 참으로 단순하고 자유로운 무애인(無碍人)의 삶입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비정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바리사이들을
압도하는 주님의 폭포수 같은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다윗의 실례를 들면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에 있는
영원한 청춘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 빵을 먹었다는 다윗의
참으로 자유로운 처신에서 그가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
영원한 청춘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지니고 하시는 주님의 선언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밀이삭을 뜯어 먹은 예수님 제자들이 죄인이 아니라, 이들을 율법의 잣대로 정죄한 바리사이들이
진짜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본말전도의 사실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자비가 우선이요, 자비를 판단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판단의 잣대로 삼으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를 살았던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일치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하면서
우리 모두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