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박정호 ㈜SK(SK (207,000원▼ 12,000 -5.48%)) 사장 모친상가에 1시간 30분이 넘게 머물면서 박 사장과 독대를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전문경영인 친족상에 기업 대주주가 이 정도 시간을 머물다간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최 회장과 박 사장이 20년 이상 맺어온 끈끈한 관계에다가 지난 14일 최 회장 석방 이후 중요한 경영 의사 결정이 밀려있는 SK그룹 사정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 회장은 14일 오후 4시 15분께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설치된 박 사장 모친의 빈소를 방문했다. 최 회장은 고인(故人)과 유가족들에게 조문을 한 뒤 바로 옆 별실에서 박 사장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임형규 SK 수펙스추구협의회 ICT위원장(부회장)도 자리에 함께 했다. 당초 15분 내외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비공개 회동은 50분 가량 이어졌다. 5시쯤 박성욱 SK하이닉스 (32,000원▼ 1,050 -3.18%)사장이 빈소에 들러, 4인 회의 형태가 되었다. 네 사람은 5시 45분 전후에 대화를 끝내고 자리를 파했다. 최 회장은 바로, 박성욱 사장은 이후 조문을 마치고 장례식장을 떴다.
- ▲ 최태원 SK그룹 회장(맨 오른쪽)이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박정호 ㈜SK 사장(가운데) 모친상 조문을 마치고 떠나고 있다. 이날 두 사람과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은 1시간 30분 가량 따로 회동을 가졌다. /정용창 기자
◆소버린 사태 당시 비서실장…동지적 관계
최 회장은 이날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는 지에 대해서 언급을 피했다. 이날 최 회장이 오랫동안 장례식장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 재계는 먼저 최 회장과 박 사장이 오랫동안 맺어온 끈끈한 관계를 거론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난 2003년 SK그룹 경영권을 놓고 영국계 펀드 소버린과 분쟁을 겪을 때 최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이 바로 박 사장”이라며 “최 회장 입장에서는 고생을 같이하면서 산전수전 겪은 ‘동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박 사장은 1989년 (주)선경에 입사해 1994년 대한텔레콤으로 적(籍)을 옮겼다. 이후 SK텔레콤과 SK그룹에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지난해 말 정철길 SK이노베이션 (94,600원▼ 400 -0.42%)사장(수펙스추구협의회 전략위원장) 후임으로 SK C&C (256,000원▲ 0 0.00%)사장에 올랐다. 이후 SK C&C와 ㈜SK가 합병되면서 ㈜SK사장이 되었다. 최근 그룹 최대 경영 현안 가운데 하나였던 ‘옥상옥(屋上屋)’ 지배구조 재편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수훈을 박 사장이 세운 셈이다.
- ▲ 최태원 SK 회장이 23일 오후 박정호 ㈜SK 사장(가운데) 모친상 조문을 위해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서고 있다. /정용창 기자
◆IT사업 재편·반도체 투자 등 그룹 현안 논의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오랜 대화가 개인적인 소회를 나누고 위로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룹 경영과 관련된 논의를 하기 위한 것이란 풀이가 나온다.
옛 SK C&C는 IT서비스 업체이지만 다양한 업종과 형태의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만 혼하이(鴻海·폭스콘)와 공장 자동화 설비 및 서비스 개발을 위한 합작법인 설립, 스웨덴 에릭슨과 ‘커넥티드 카(connected car·무선인터넷으로 연결된 스마트 차량)’·헬스케어 기술 개발 협력 등 최근 여러 굵직한 신사업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14일 최 회장 출소 이후 ㈜SK는 그룹 지주회사란 사정과 맞물려 SK텔레콤 (254,000원▼ 4,000 -1.55%), SK플랫폼 등 IT(정보기술) 계열사들과 함께 대규모 사업 재편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임형규 부회장이 배석하는 형태로 시작되었고, 이후 반도체 계열사 SK하이닉스의 박성욱 사장이 동석한 후 대화가 추가로 30분 가량 이어진 것도 그룹 경영과 관련된 대화가 주였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한 SK그룹 관계자는 “그룹 경영에 관한 논의를 하신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했다.
SK그룹은 17일 46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25일 준공식을 갖는 경기도 이천의 M14 새 공장 외에도 2개 라인을 새로 짓겠다는 게 이번 발표의 핵심이다. 최 회장은 25일 준공식에 직접 참석한다. 최 회장은 다음날인 26일에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의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 선영을 참배한다. 14일 석방 이후 빠르게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최 회장 입장에서 반도체 투자는 그룹의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최 회장 “25일 구체적 숫자 발표한다”
한편 최 회장은 25일 반도체 공장 준공식에 관해서 “구체적인 숫자 등도 다 나온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IT업계 일각에서는 반도체 분야 투자 계획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IT산업과 관련된 언급을 하지 않겠냐는 분석도 제기하고 있다.
최 회장은 또 복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해 “일이 아주 많더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14일 자정 석방 직후 서울 서린동 SK사옥으로 출근해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 경기도 이천 반도체 공장, 울산 석유화학 공장 등 현장을 방문해 각 계열사 경영 상황을 점검하고 임직원을 격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