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속 좁은 인생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회의가 생기고 마음을 상하는 때가 참 많습니다. 아무리 내가 조심한다고 해도 내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 수가 없기에 쓸데없는 것으로 자신을 가득히 채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말 한마디 때문에 평생을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나도 사실 따지고 보면 작은 말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서 결국 마음 상해서 며칠이나 몇 달을 침묵하며 삐져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그렇게 잘 삐지고 화를 내고, 마음을 자주 한 채 지내서 가족들이 내게 말하기가 상당히 거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말을 듣고도 와락 화내거나 감정을 모두 쏟아 붓는 사람은 훨씬 솔직한 사람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화도 잘 내고 감정을 온통 쏟아 붓는 사람들은 비교적 화해도 훨씬 잘하고 마음이 오히려 화통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꽁’하고 끌어안고 사는 사람은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답니다. 그런 편견과 고집 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내게는 아주 어려운 일일지라도 아주 쉽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관리하고 다스리기는 너무 어려운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 공동체에서나 직장, 사회에서 또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아주 복잡하고 천차만별로 흩어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어느 스님이 아주 깊은 참선에 잠겨 완전히 자신을 버리고 관상에 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참선에 들면 큰 거미가 나타나서 마음을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님께 “제가 참선에 들기만 하면 큰 거미가 나타나 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쫓으려고 해도 쫓아지지 않아서 그놈을 어떻게 해야 제게서 물러나게 할 수 있는지 스승님! 도와주십시오.”하고 말하였더니 스승님이 “다음에 참선에 들 때 거미란 놈이 나타나 괴롭히거든 그놈 배에다 검은 먹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놓아라. 어디서 그 괴물이 나타나는지 한 번 알아보자.” 고 말했습니다. 과연 다시 참선을 하는데 그 큰 거미가 슬슬 내려와 마음을 흩어놓아서 얼른 붓을 들어 거미의 배에다가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더니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참선을 끝내고 보니까 동그라미는 자신의 배위에 그려져 있어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유심생’(魔由心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마귀는 마음에서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외부에서 내 마음에 침투하는 마귀도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마귀를 키우고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흉측한 마귀를 우리는 기도하거나 묵상하면서도 만들어내고, 가족들 간에도 만들어내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만들어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결국은 내가 만든 마귀의 간섭에 나는 종살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노예가 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어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그런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마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하고 언제나 만들어낸 마귀가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의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 나는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재물과 부귀영화의 욕심 때문에 아무리 큰 동그라미를 그려도 아주 작은 동그라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재물과 부귀영화는 자꾸만 커져가고, 그 괴물의 교란 때문에 나는 성덕(聖德)생활에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진실로 자유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명쾌하게 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내 의지와 의견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성령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셔야 우리가 비로소 자유롭고 주님께서 머무실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말 하나를 불씨로 키워서 내 마음을 가득히 채우고 많은 감정에 불을 놓아 마른 장작을 태우듯 감정을 폭발시키며 끊임없는 욕망의 불길에 부채질을 하면서도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해서 이렇게 된 일이라고 주님을 원망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겨우 잠재워 놓은 작은 불씨가 어느 틈에 되살아나서 감정에 붙기만 하면 그 때는 겉잡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 부족한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축일3월 29일 성 에우스타시오 (Eustasi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 지역 ; 뤽세이유(Luxeuil)
활동 연도 ; 560?-626년경
같은 이름 ; 에우스따시오, 에우스따시우스, 에우스타시우스, 유스터스
성 에우스타시우스(또는 에우스타시오)는 560년경 부르고뉴(Bourgogne)에서 태어나 뤽세이유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보비오(Bobbio)의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의 촉망받는 제자였던 그는 뤽세이유 수도원을 설립한 성 콜룸바누스가 610년 부르고뉴의 국왕인 테오도리쿠스 2세의 부도덕한 결혼을 반대하여 모든 아일랜드 수도자와 함께 이탈리아로 추방되어 보비오에 정착한 후 그 이듬해에 제2대 수도원장으로 스승을 계승하였다. 그는 원장으로 있는 동안 겸손과 항구적인 기도로 모범이 되었고, 수도원을 학문과 영성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갈리아(Gallia) 일부 지역과 바이에른(Bayern) 지방의 선교에도 힘썼고, 보비오의 수도원과도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의 재임 중 수도원은 6백여 명의 수도자들이 생활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에우스타시오 (Eustasiu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