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 / 황주은
빈털터리 애인에게 맨살을 보여준 것을 후회한다
상처에 덧칠을 하는 것은
어두워지는 일
"쓰레기야"라고 부를 때
정성을 다해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취한 얼굴을 받아 준 변기 앞
무릎에 머리를 박고
가난해서 버렸던 부자 애인을 생각한다
주유소로 변해버린 우리들의 아지트에
풍선 인간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회색 머리 노파가 앉아 있다
눈빛을 지우고 혼잣말을 한다 이것은
더욱 어두워지는 일
애인은 떠날 때마다 구름을 남긴다
우두커니 구름에 걸터앉아 운다
눈동자가 유통기한을 넘긴다
찢어진 습자지 조각들 공중에 날린다
빗방울이 검은 송곳으로 박히기 시작한다
― 시집 『불의 씨』 (한국문연, 2021)
* 황주은 시인(본명 황은주)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교대 졸업. 콜로라도 프론트레인지 컬리지 수료.
2013년 <시사사> 등단.
시집 『불의 씨』
성북교육청 영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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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펼쳐진 시간은 왜 이렇게 자욱할까.
눈을 비벼도 흐려지기만 하는 시야를 헤치며 우리는 걸어가고 있다.
남루함을 그림자처럼 끌고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다.
가끔 돌아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움의 포즈가 아니라 후회의 포즈다.
사랑한 것을 후회하고, 몸을 부빈 것을 후회하고, 오래 머문 것을 후회한다.
목적지도 없는 시간의 풍파를 견디며 후회가 마치 참회인 것처럼 목을 떨어뜨리고 ‘어두워’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흐림’의 조도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우리의 안쪽일까 바깥쪽일까.
진원도 알 수 없는 구름이 우리를 어딘가로 들어올린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시간. 자욱한 구름 속에 화자가 있다.
그녀 혹은 그인 화자는 과연 우리들 중 누구의 몸을 대신하고 있을까.
‘빈털터리 애인에게 맨살을 보여준 것을 후회한다’라고 화자는 말한다. 가끔 직설은 슬프다.
내뱉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므로. ‘애인에게 맨살’을 보여주던 순간을 모으면 몇 도쯤 될까.
그 순간의 숨결과 피부와 눈빛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면 제법 뜨거울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온도이기도 하지만 관계(relation)의 온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자는 문장의 끝을 ‘후회한다’라고 맺고 있다.
후회라는 말은 냉각기冷却機다.
우리의 체온을 열정을 관심을 급격하게 끌어내린다.
이 시의 첫 행은 관계의 뜨거움을 급격하게 냉동시킨 드라이아이스 같다.
그래서 조용히 읊조리면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는 것처럼 통증을 일으킨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지는 대부분의 관계는 이런 드라이아이스가 아닐까.
형체도 없이 차갑고 뿌옇게 사라지고 마는.
‘상처에 덧칠을 하는 것은/ 어두워지는 일// 쓰레기야 라고 부를 때/ 정성을 다해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왜 이렇게 화자는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것일까.
‘맨살’을 보여주던 그 순간을, ‘정성을 다해 대답한’ 그 순간을 그냥 따뜻한 그대로 흘려보내지 못한다.
다만 드라이아이스처럼 자신의 시간을 뿌옇게 흐리게 하고 만다.
이 시에서 애인은 사랑하는 남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이기도 하다.
‘주유소로 변해버린 우리들의 장소에/ 풍선 인간이 허우적거리고 있다’라는 문장은
헤어진 남녀의 후기인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장소’는 사랑의 공간이면서 관계의 무대 혹은 감정의 타임라인 이다.
‘주유소’는 휘발성이 강한 장소다.
우리가 현실에서 주유소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10분이다.
뜨거웠던 숨결과 피부와 눈빛이 오갔던 ‘우리들의 장소’가 10분도 머물지 않는 ‘주유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서 ‘풍선 인간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풍선 인형이 아니라 ‘풍선 인간’이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말한다.
화자는 어쩌면 팔다리를 흔들며 허우적거리는 모습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긴 팔다리를 가지고도 아무도 껴안을 수 없는, 바람이 빠지면 사라져버리는 풍선 인간.
‘후회한다’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화자의 몸은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 인간’의 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두커니 구름에 걸터앉아 운다’
이것은 습관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별을 선택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구름은 타자가 남긴 허물이다.
거기 우리는 걸터앉아 울고 있다.
무거워지면 쏟아져 내려 다만 물일뿐인 관계,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관계의 실체다.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관계의 미로 속에 우리의 시간이 ‘찢어진 습자지 조각들’로 날린다.
땅에 닿는 순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꽃가루처럼.
- 정다인 (시인)